초겨울에 보내는 편지

<내 추억속의 그 이름 117> "부치지 못한 편지"

검토 완료

이종찬(lsr)등록 2003.11.24 15:02

발간 감들만 덩그러니 매달려 있는 농촌의 초겨울 ⓒ 이종찬

춥습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춥고 배가 고픈지 모르겠습니다. 텅 빈 가슴 속을 짜릿하게 적셔줄 술도 없는데, 바늘 같이 따가운 바람이 휑하니 휘몰아치고 있습니다. 세상의 나무란 나무도 모두 말라 죽어버렸는지, 아니면 바람 속에 모두 날아가 버렸는지 한 그루도 보이지 않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디가 동쪽인지 어디가 서쪽인지 분간조차 가지 않습니다.앞을 보아도 뒤를 돌아보아도 온통 바늘바람뿐입니다. 세상이 얼어가고 있습니다. 제 자신도 얼어가고 마침내 제 영혼마저도 고드름처럼 길쭉하게 얼어가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선생님! 여기가 대체 어딥니까? 여기가 이 세상의 끝이라는 곳입니까? 저만치 어둠 속으로 마구 휘몰아치는 바늘 바람 사이, 차갑고 깨끗한 별들이 환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저 별빛 쏟아지는 세상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냥 이대로 서성대고 있기만 합니다.

가슴이 답답하고 찢어집니다. 이 가슴이 찢어질 데로 다 찢어져 마침내 제 자신이 칼바람 되어 휘몰아 친다면 저 차갑고 깨끗한 세상에 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아직도 가슴이 다 찢어지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매서운 바늘바람만 대책없이 맞고 서 있습니다.

바늘바람은 칼이 되어 아까보다 더 빨리 제 가슴을 찢어가고 있습니다. 이윽고 이리저리 다 찢기운 제 가슴이 칼바람 되어 저 광활한 벌판으로 휘달려가고 있습니다. 달려가다가 또 달려가다가 마침내 이 세상을 한바퀴 더 돌아 다시 한번 제 가슴이 찢어지는 날, 그때가 되면 이 세상의 추위와 배고픔을 잊어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때가 되면 제 올곧은 삶의 길을 기어이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 아니, 길이 없으면 새로운 길을 스스로 열어나가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미천한 삶의 껍질을 깡그리 벗지 못한 채 그냥 그대로 서 있기만 합니다. 이 서러운 세상 저어기 먼 곳, 산 속인지 들판인지 분간할 수 없는 바로 저어기 저 곳에 꺼질 듯이 다가오고, 가까이 다가서려면 저만치 멀어져가는 불빛이 있습니다.

저는 그 불빛을 잡으려 안간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제 가슴이 다 비지 못한 까닭인지 저 따사로운 불빛이 자꾸만 제게서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아니, 저 불빛은 저만치 멀찍이 서서 따라오라고 손짓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 불빛이 있는 까닭에 절대 쓰러질 수가 없습니다.

저 불빛은 바로 선생님의 빛나는 눈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니 선생님만이 간직하고 있는 살아 움직이는 눈빛. 때로는 불호령으로, 때로는 그지없는 따스함으로 저를 다독여주시는 선생님! 저 불빛은 용광로처럼 뜨겁게 끓어오르는 선생님의 가슴입니다.

선생님! 건강은 어떠하십니까? 제가 있는 이곳에도 첫 얼음이 얼었습니다. 그리고 첫 눈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 첫눈은 찬비에 섞여 내렸습니다. 그냥 제 모습 그대로 내리지 못하는 눈. 그렇습니다. 비에 섞여 내리는 저 진눈깨비를 바라보면 마치 제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 같습니다.

눈이 되어야 할 것이 눈이 되지 못하고, 비가 되어야 할 것이 비가 되지 못하고, 저리도 어정쩡하게 내리고 있습니다. 하늘마저 저러하니 더없이 쓸쓸하고 더없이 서럽기만 합니다.

선생님! 이 세상에 차라리 진실이란 것이 없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무런 미련도 없이 미친 듯이 히히대면서 그냥 그대로 한세상 흘려보내는 것이 오히려 더 아름다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 발길 가는 대로 그렇게 말입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선생님께서 등단한 해가 1958년, 제가 태어난 해가 1959년. "너는 그때 배춧잎이었느니라."라고 하신 그 말씀처럼 차라리 배춧잎이었을 때가 더 좋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또다시 겨울을 맞이하고 보니 선생님 건강이 염려스러워집니다. 내내 선생님 뵐 때마다 선생님의 건강을 입으로만 묻고 있는 제 자신이 참으로 한심스럽기만 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어려울 때만 찾는 제게 늘 소주 한잔이라도 꼭 마시게 한 뒤 보내주시는 선생님.

하동 천승세 선생님 ⓒ 이종찬

지은 죄값 무거워
캄캄하게 숨어서
녹슬고 봤다

몇 겁의 하늘을 뚫고서야
저승나라 근력(筋力)들을
만나뵐 수 있단 말이냐
몇만 길 땅 속을 파고들어야
원혼들의 객담이라도
들을 수 있단 말이냐

이윽고 녹을 씻는다
종가집 장손의
신실한 자지처럼

불을 얹고

박힌다
박힌다

지난 번 펴낸 선생님의 첫 시집 <몸굿>을 자주 꺼내 읽습니다. 선생님의 시들을 읽다 보면 그 시들이 벌떡벌떡 일어나 "네 이 놈!" 하면서 저의 나약한 모습에 호통을 치는 것만 같습니다.

벽력 같은 그 호통은 절망 속에 헤매고 있는 제게 양식이 되어, 제 피가 되고 제 살이 되어 저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줍니다. 선생님의 시 '대못'처럼 저는 이 세상에 불을 얹고 박히려 합니다.

언제든지 오는 차비만 가지고 내려오라는 선생님의 말씀 대로 가는 차비가 마련되는 데로 선생님께 달려가겠습니다. 그렇게 달려가다가 만약 길을 잃더라도 이젠 걱정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시처럼 이 세상에 '불을 얹고' 그대로 박혀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 차라리 가다가 길을 잃어버리는 것이 더 나은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이란 것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지 않겠습니까? 뜻있는 그 누군가가 긴 세월동안 온 몸을 던져 갈고 닦아 만든 것이 길이란 것 아니겠습니까?

저 또한 바늘바람처럼 이 세상을 휘이 돌면서 길이 없는 길을 가고 싶습니다.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바다 위에도 길을 내고, 아득한 허공을 아찔하게 떠돌다가 하늘에도 길을 내고, 때로는 머리가 깨어져 피를 흘리면서 이 세상 어둡고 응달진 곳에 길을 내고 싶습니다.

선생님! 술은 가까이 두시되 멀리 하시고, 멀리 하시되 가까이 두십시오. 버르장 머리 없는 제자가 감히 한 말씀 올립니다. 많이 꾸짖어 주십시오. 오래된, 1996년 초겨울에 쓴 편지를 수 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비로소 보냅니다. 죄송합니다. 이 해가 가기 전에 꼭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선생님! 올 겨울은 예년에 비해 더욱 추울 것 같습니다.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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