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나의 편견을 들춰낸 그녀, 사랑스럽다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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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주(wizard73)등록 2005.02.19 10:30
조제는 이 영화의 여주인공의 이름이다. 물론 여주인공에게는 쿠미코라는 일본에서는 아주 평범할(우리나라로 치면 숙자, 순자 쯤 될) 이름이 있다. 그러나 그녀는 조제라 불리길 원한다. 조제는 프랑소와즈 사강의 소설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이다. 사강의 작품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조제가 소설에서 읊조린 대사들 몇 개를 들춰봤을 때, 영화 속 조제와 너무 잘 어울리는 이름인 듯 싶다. 냉소적이기도 하고 자기애가 강하고 고집스럽고….

조제는 선천적으로 하지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보호시설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다 도망나와 거지같은(할머니에겐 정말 죄송한 표현이지만 저 배우를 어디서 구했나 싶게 정말 거지같다.) 할머니에게 얹혀 산다. 그녀가 세상과 만나는 유일한 시간은 아무도 길에 나서지 않는 새벽, 너덜너덜한 유모차 안에서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바깥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꺼려하는 할머니 덕에 세상을 보고 싶다는 조제의 욕구는 새벽에 한정된다. 그러나 밤새 마작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대학생 츠네오가 새벽 퇴근길에 유모차 안의 조제와 마주치면서 조제의 세상보기는 한 발짝 더 나아간다. 한마디로 사랑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이십대 초입인 조제와 츠네오가 겪는 연애이야기가 바로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다. 연애이야기가 뭐 별거 있겠는가. 처음엔 서로의 모습에 호감을 느끼고 다가가고 서로에게 위안받고 열망하고, 그러다가 감정이 일상으로 굳어갈 즈음에는 서로에게 지치고 짜증내고 어느 한쪽이 먼저, 혹은 동시에 발을 뒤로 빼면서 깨지고, 아파하고….

그러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소소한 연애이야기를 절대 감정과잉의 우를 범하지 않으면서 섬세하게, 연애 도중 겪을 수밖에 없는 두려움과 비겁함과 권태와 쓸쓸함까지, 모조리 잡아낸다는 것이다.

더구나 장애여성 조제와 번듯하게 생긴(그래서 인기도 꽤 있어뵈는) 대학생의 사랑을 동정이나 조금의 편견도 없이 있는 그대로 보는 그 시선이 이 영화를 특별하게 만든다.

사실, 여타 영화에 나오는 장애여성들은 그들이 아무리 비중 있는 배역일지라도 그들의 목소리는 스크린에 드러나지 않았다. <오아시스>의 공주만 보더라도, 남자주인공에게는 구원이고 이름 그대로 공주일지 모르지만, 공주의 감정과 심리는 영화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다. 아니, 자신을 강간하려던 인간과 사랑에 빠진다는 건 억지스럽기까지 하다. 이 영화에서 공주는 주연급 배역이었으나 영화 전체의 소품, 그것도 눈이 부실 정도로 처절한 연기를 하는 일급 소품(배우 문소리에겐 정말 미안한데 어쩔 수 없다.)일 뿐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 장애여성 조제는 자신을 해하려는 자에게는 식칼을 휘두르고(츠네오와 조제의 첫 만남은 식칼이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먼저 섹스하자고 제안하고, 떠나는 애인에게 도색잡지를 선물하는, 말 그대로 영화 전체 이야기를 주도하고 자기 삶을 주도하는 주인이다. 조제에게 애인을 빼앗기고 분을 못 이겨 찾아온 츠네오의 옛애인에게 "부러우면 너도 다리를 잘라버리라"고 내쏘는 조제의 모습은 매력적이다 못해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런 조제를 사랑하는 츠네오 역시도 장애인 애인의 장애도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헌신적인 순애보를 쌓는 전형적 인물로 그려지지 않는다. 처음부터 늘 두려워했고(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가족에게 인사시키는 자리를 피하고 싶었고 결국은 담백하게(!) 도망쳐 나온다. 얼마나 현실적인지! 물론 담백하게 도망쳐서 궁상맞게 눈물을 흘리지만 말이다. 이 또한 얼마나 현실적인지!

또 츠네오의 옛애인은 어떤가. 조제가 듣고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장애인이 다이빙하는 거 보고 싶다"고 당돌하게 얘기하는 모습은, 평범한 우리가 갖고 있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비열함이 아니던가.

장애여성이라는 설정이 섣부른 연애의 동기(동정심으로 인한)가 되거나 연애의 장애물(편견에 의한)이 되는 함정을 피해간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별 다섯개가 모자라다.

거기다가 사랑에 대한 더함도 모자람도 없는 쿨한 해석은 이 영화를 더욱 더 매력적인 영화로 만든다. 사랑은 조제와 츠네오가 성장해가는 과정일 따름이다. 집 안에 갇혀지내던 조제가 호랑이를 만나고 물고기들을 만나는 과정이 바로 사랑이고 이별인 것이다.

조제는 그 과정으로서의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조제와 츠네오의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길에서 조제는 이미 이별을 준비하고 있다. 시간과 감정의 유한성을 깨달아버린 조제는 떠나는 츠네오에게 "이건 약할까?" 하고 걱정하며 도색잡지를 건네는 것으로 이별의식을 대신한다. 여기서 내게 이 영화를 권했던 후배가 <봄날은 간다>의 상우와 은수 얘길 했던 게 떠오르며 무릎을 치게 된다. 조제는 <봄날은 간다>의 은수보다 확실히 한수 위다.

물론, "츠네오가 떠나면 바닷가에 버려진 조개껍질처럼 굴러다니게 될 것"이라던, 물고기들이 떠다니는 여관방에서의 독백처럼 조제는 이별 후의 쓸쓸함을 사랑의 대가로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전동휠체어를 타고 장을 보러 나가는 조제의 뒷모습을 보며 걱정보다는 믿음이 앞선다. 아마도 조제는 식칼을 휘두르며 쓸쓸함과, 편견으로 가득한 세상과 맞서 살아갈 것이라는 믿음.

영화를 보면서 장애인에 대해, 같은 여성이면서도 여성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는 내가 자꾸 드러나는 것 같아 부끄러웠지만, 그렇게 나의 부끄러움을 들춰낸 조제에게 사랑과 존경의 인사를 보내고 싶다.

아, 조제 얘기만 해서 츠네오 역을 맡았던 츠마부키 사토시에게 약간 미안해진다. <워터보이즈>에서 익살스러운 수중발레를 하던 귀여운 소년이 어느새 사랑과 이별을 아는 늠름한 청년으로 성장했다는 게 참 뿌듯했다. 이 영화의 또 다른 장점은 젊은(혹은 어린) 배우들의 솔직한 매력을 한껏 뽑아냈다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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