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우의 옷을 벗기는 게 탕평이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등록 2008.04.10 09:22수정 2008.04.10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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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개혁을 반대하는 좌상 장태우(가상 인물). 드라마 <이산>. ⓒ MBC


사복 차림으로 전격 등장한 이후 '공무원 파업'을 주도하며 노론의 리더로 떠오른 장태우. 정조 임금을 이웃집 철부지 대학생쯤으로 얕보는 장태우. 좌의정 타이틀을 받고 관복으로 갈아입은 후에도 그는 여전히 정조 임금의 개혁을 사사건건 가로막고 있다.

처음에 정조 이산이 임명장을 내밀자, 장태우는 의아해하며 "이런 저를 좌의정에 기용해서 뭣에 쓰려 하십니까?"라는 취지의 질문을 했다. "지금처럼 계속 나를 견제하면 된다"는 것이 정조가 제시한 답변의 취지였다. 당신 같은 사람이 조정 중신으로 있는 것 자체가 조정의 균형을 이루는 요인이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장태우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은 인물이지만, 드라마 <이산> 속의 '좌상 장태우'는 이와 같이 정조 임금의 탕평정치를 상징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조정 인사에서 사색당파의 균형을 이루려 한 정조 임금의 의지를 보여주는 장치인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비록 가상이기는 하지만, 실제 역사와 크게 어긋나지는 않는다. 정조 사후에 정순왕후(당시에는 대왕대비)와 더불어 장용영을 혁파하는 등 정조시대의 개혁을 원위치 시키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심환지(1730~1802년)가 정조 치하에서 규장각제학을 거쳐 이조·병조·형조판서를 역임하고 우의정까지 지낸 점을 보아도 그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조가 탕평정치를 지향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지만, 이 같이 정조의 탕평은 그 탕평을 파괴할 사람들이 정부 요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역기능을 하고 말았다. 탕평 덕분에 핵심 요직에 진출한 사람들이 도리어 탕평을 훼손하는 역할을 하고 말았으니, 정조 임금의 탕평이 성공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당파에 대한 안배 없이 누구나 능력만 있으면 핵심 요직에 기용하는 '높은 수준의 탕평'에 도달하지 못하고, 각 당파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 그치는 '낮은 수준의 탕평'이 가진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정조의 탕평이 낮은 수준의 탕평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중국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중군위(中軍尉)였던 기해(祁奚)의 사례를 살펴보는 것이 흥미로우리라 생각한다. 참고로, 군위(軍尉)란 것은 평시에는 군정을 담당하고 전시에는 사령관 역할을 하는 자리였다. 중군위는 그런 군위의 일종이었다. 


기해는 비록 정조처럼 군주는 아니었지만 그가 남긴 인사추천은 춘추시대 역사서인 <좌전>에서 탕평의 모범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기원전 570년에 3년간의 중군직 생활을 끝내고 진나라 도공(悼公)에게 후임자를 추천할 때부터 그는 중국 역사에 오래 기억될 만한 탕평의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이제는 늙어서 좀 쉬고 싶다며 기해가 사표를 내밀자, 도공은 그에게 후임자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런데 기해가 추천한 후임자는 뜻밖에도 그의 원수였던 해호(解狐)란 인물이었다. 정적보다 더 싫은 자신의 원수를 후임자로 천거한 것이다.

그런데 기해의 추천에 따라 도공이 해호를 임명하려던 참에 해호가 죽고 말았다. 그래서 도공이 다시 부탁했다. 후임자를 다시 추천해달라는 것이었다. 기해가 다시 추천한 인물은 기오(祁午)였다. 기오는 다름 아닌 기해의 아들이었다. 지난번엔 원수를 후임자로 추천하더니 이번에는 자기 아들을 추천한 것이다. 결국 기오가 신임 중군위에 임명되었다. 중군위 자리가 세습된 셈이다.

얼마 안 가서 중군위의 부관(副官)인 양설직(羊舌職)이란 사람이 사망했다. 도공은 현직 중군위인 기오에게 부탁하지 않고 전직 중군위인 기해에게 다시 부탁했다. “누가 그 자리를 잇는 게 좋겠소?” 기해가 천거한 인물은 양설직의 아들인 양설적(羊舌赤)이었다. 기해는 자신의 부관이었던 양설직의 아들을 자기 아들의 부관 자리에 천거한 것이다. 그러므로 중군위 자리뿐만 아니라 그 부관 자리까지 세습된 셈이다.

아니, 기해가 탕평의 모범사례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원수를 후임자로 천거하는 쇼맨십을 보이더니, 원수가 죽자 자기 아들을 중군위에 천거하고, 나중에는 자기 부하의 아들을 자기 아들의 부관으로 천거하다니! 그게 어떻게 탕평의 모범사례가 될 수 있겠는가? 결과적으로는 기해-양설직 콤비가 기오-양설적 콤비로 대를 이어 계승된 게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정실 인사의 모범사례가 아닐까? 

그러나 이에 대한 춘추시대 지식인들의 평가는 달랐다. <좌전>에서는 “군자들은 기해가 그때 능히 현자를 추천한 것이라고들 말했다”(君子謂祁奚於是能擧善矣)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면서 <좌전>은 “상서(尙書)에서 ‘무편무당 왕도탕탕’(無偏無黨 王道蕩蕩)이라고 했는데, 이는 바로 기해를 두고 말함이다”라고 덧붙였다. 기해를 ‘무편무당 왕도탕탕’인 탕평의 모범사례로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아니, 자기 원수를 추천하는 쇼맨십을 보이다가 결국에는 자기 아들과 자기 부관의 아들을 추천했는데 그게 어찌 탕평의 모범사례가 될 수 있을까? <좌전>의 대답은 이러하다.

"해호를 추천한 것은 아첨하기 위함이 아니었고, 자기 아들을 세운 것은 자기편을 편애함이 아니었으며, 하급자(의 아들)를 추천한 것은 파벌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기해의 추천이 겉으로 보기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결코 아첨하기 위함도 아니고 자기편을 편애하기 위함도 아니며 파벌을 만들기 위함도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당대 지식인들의 칭송을 받았다는 것이 <좌전>의 기록이다. 

그럼 대체 무엇 때문에 기해의 인사추천이 칭송을 받은 것일까? 그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위의 문장에서 “자기 아들을 세운 것은 자기편을 편애함이 아니었으며”(立其子不爲比)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르면 자기편을 편애하는 것이 비(比)인데, 기해는 그런 비(比)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비(比)라는 표현이 사리를 얻기 위해 원칙 없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했다. 사심을 갖고 일을 처리하는 것을 비(比)라고 했던 것이다.

기해의 인사추천은,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모양새가 안 좋아도, 아무런 사심 없이 당파를 불문하고 적임자를 추천했기에 탕평의 모범사례가 될 만하다는 것이 당대 지식인들의 평가였던 것이다.

그가 해호를 추천할 때에는 해호가 적임자였기 때문이지, 원수를 추천한 관대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얻기 위함이 결코 아니었다. 또 그가 자기 아들과 부하의 아들을 추천한 것은 그들이 적임자였기 때문이지, 자기 이익을 얻거나 자기 파벌을 만들기 위함이 결코 아니었다.

사심을 배제하고 당파에 관계없이 적임자를 뽑은 것이라면 그 대상이 자기 원수이건 자기 아들이건 자기 부하의 아들이건 간에 그것이 탕평의 모범이라는 <좌전>의 기록을 고려해볼 때에, 우리는 정조시대의 탕평정치가 탕평의 모델에 그리 썩 부합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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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 인사에서 당파의 안배와 균형을 중시한 정조 임금. 드라마 <이산>. ⓒ MBC


적임자도 아닌 장태우. 사사건건 군주의 발목만 잡는 장태우. 좌의정보다는 언관(言官)이 딱 알맞을 장태우. 무엇보다도 개혁과 탕평을 반대하는 수구보수 장태우.

비록 드라마 속의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런 장태우에게 좌의정을 제수한 것은 탕평의 본질에 부합하는 것이 아니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정조시대의 실제역사에서도 일정 정도 나타난 현상이었다.

사색당파의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는 형식적 목표 하에 자신의 국정 방향에 흔쾌히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관직을 제수한 정조 임금의 탕평정치를 ‘낮은 수준의 탕평’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장태우 같은 사람의 관복은 벗겨버리고 탕평의 대의에 적합한 사람들에게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이 진정한 탕평인데, 정조시대에는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물론 그것을 정조 임금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리더십이 훌륭하긴 했지만 그 리더십이 사색당파를 붕괴시킬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할 수 없이 당파의 균형을 유지하는 선에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파의 균형을 유지하자니 최선의 적임자를 임명할 여력은 없었던 것이다.

<좌전>에 소개된 바와 같이, 진정한 탕평은 사색당파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군왕의 통치방향을 반대하는 사람들까지 정부 요직에 기용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당파의 안배에 신경을 쓰지 않고 사심 없이 최선의 적임자를 기용하는 것이 '영·정조가 추구했지만 결코 이루지 못한 진정한 탕평'인 것이다.

드라마에 빗대어 말하자면, 장태우의 옷을 벗겨버리고 개혁과 탕평에 동의하는 적임자에게 좌상을 제수하는 것이 진정한 탕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파의 균형보다는 최선의 정치를 목표로 하는 게 탕평의 궁극적 목표일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군왕이 각 당파를 억누를 만한 압도적 권력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인재 풀을 갖고 있어야 한다. 정조 시대에는 그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기에 낮은 수준의 탕평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산 #정조 #탕평 #탕평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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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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