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도 공부하는 까닭은?

장정일의 <공부>

검토 완료

이인(specialin)등록 2008.06.16 13:32

책 ⓒ 랜덤하우스코리아


진보와 보수는 언제나 있다. 한쪽에 편을 들면서 사람들 앞에 나서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정치의식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생존위협을 받은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한 편에 뚜렷하게 서는 건 모험이다. 그러다보니 진보나 보수를 외치기보다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중간 지대, 색깔로 치면 회색지대가 넓다.

삶은 정치이고 시민의식은 정치의식의 다른 말이기 때문에 불행한 역사를 거쳤다지만 자기 목소리를 감춰서는 안 된다. 시민들이 생각을 견주고 토론하며 모여야 민주사회는 나아진다. 참여해야 민주(民主)라는 말 그대로 주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진보도 싫고 보수도 싫다며 정치판단을 하지 않고 중용인 척하며 점잖은 체하는 사람들이 많다. 「장광일의 공부」[2006. 랜덤하우스코리아]는 머리말부터 이 그럴싸한 중용을 가차없이 몰아세운다.

내가 ‘중요의 사람’이 되고자 했던 노력은, 실제로는 무식하고 무지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의 중용은 나의 무지였다. 중용의 본래는 칼날 위에 서는 것이라지만, 만은 사람들에게 그것은 사유와 고민의 산물이 아니라, 그저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러니 그 중용에는 아무런 사유도 고민도 없다. 허위의식이고 대중 기만이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에는 무지의 중용을 빙자한 지긋지긋한 ‘양비론의 천사’들이 너무 많다. - 머리말

이 글이 아프게 느껴졌다. 5에 있다고 중용이 되는 건 아니다. 10의 중간은 5의 언저리겠지만 10의 중간은 50의 언저리며, 1000의 중간은 500의 언저리다. 과거를 알고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으로 따져야 중용이지, 안주했던 어제의 중간은 오늘의 극단일 수 있다. 또한 중용이라고 취하는 침묵이, 깊은 고민의 결과인가 살펴야 한다. 오늘의 침묵이 내일의 웅변으로 피어난다는 보장은 없다. 아는 게 없어서 어쩔 수 없는 침묵이라면 내일도 침묵할 것이다. 내일이라고 지식이 늘어나는 건 아니기 때문에.

장정일은 시인이자 소설가이고 현재 대학교수인 ‘지식인’이다. 그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마흔 넘어 새삼 공부를 하게 된 이유는 우선 내 무지를 밝히기 위해서다. 진짜 중용을 찾기 위해!’라고 말하며 공부를 한다. 수만은 책으로 쌓았을 그의 지식이 이제야 자신의 무지를 밝히기 위한 지식이었다니. 새삼 공부란 무엇인지, 얼마나 무엇을 알고 있는지 되살피게 한다.

이 책에 실린 글들과 선택된 주제들은 2002년 대선 이후 2006년까지, 장정일이 한국사회를 보며 궁금한 것들을 공부한 결과물이다. 그가 책을 파고들며 공부한 내용들은 양심적 병역거부, 후흑설과 통치방식, 친일파와 근대화론, 네오콘과 촘스키, 시오니즘과 이스라엘현대사, 조봉암과 이승만, 하이데거와 나치, 바그너와 히틀러, 레드 콤플렉스, 대중독재론과 박정희 등이다. 얼핏 들어 아는 내용 같지만 따지면 별로 아는 게 없다. 한 주제를 논하려고 여러 책을 뒤지고 꼼꼼히 읽은 그의 땀이 응결되어 이 책이 나왔기에,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상식의 지경이 넓어질 수 있다.

무엇보다 이 책의 미덕은 책 제목처럼 공부하게 하는 자극을 준다는 데 있다. 원래 공부란 누가 해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해야 한다. 이 책을 읽으면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지은이보다 상대적 지적가난을 느끼게 된다. 두꺼운 책의 지루함을 자기가 다 감당하고 공부 세계로 오솔길을 내주는 지은이를 보며 모처럼 공부열기로 데워질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끝으로 공부를 왜 해야 할까? 장정일이 책에 그 답을 적었다.

공부는 좋은 시민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는 의견과 의견이 부딪치는 사회다. ‘나만 옳다’는 독단에 빠져 상대방의 개념과 논리에 대해 귀를 닫고 있으면, 민주주의는 기만과 독선에 병들게 된다. 무엇보다 개념과 논리를 서로 이해하고 있어야 대화가 가능하다. 모르면 남의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으면 서로 간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도 없을 것이다. - 책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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