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만의 화장실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한 이유

검토 완료

김동환(heaneye)등록 2008.07.20 16:19
몇 달 전 저녁. 자취방 화장실에서 면도를 하고 있는데 지직 소리와 함께 갑자기 화장실 전구가 나갔다.
나는 소리없이 두어번 화장실 버튼을 똑딱거린 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말을 중얼거리며 천장에 붙은 전구 덮개를 돌리려고 했다. 야무진 모양답게 꿈쩍도 않는다.

우리집 화장실 전등. 성격있다. ⓒ 김동환


음식을 잘 하는, 얼마전 서울에서 머리 수술을 마치고 밝은 표정으로 돌아오신 주인 아주머니께서는 지은지 3년된 이 집의 모든 기물을 무척 사랑하신다. 아주머니라면 이번 화장실 전구 건도, 필요 이상으로 안타까워 하시리라. 아. 나는 그런 상황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데. 한편으로는 정당히 세를 들어 사는 내가 과연 이런 걱정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도 든다.
허허.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이런저런 신중한 생각으로 우물쭈물 하는 사이, 귀찮음이라는 이름의 관뚜껑이 덮혔다.
나는 핸드폰 플래쉬를 켜고 면도를 마쳤다. “아 몰라. 그냥 쓰지 뭐.”

귀가 간지럽다. 지인들의 한숨이 환청이 되어 귓가를 지분거린다.
근데 사실 그다지 별난 것도 없었다. 단지 화장실 전등 버튼을 눌러도 화장실 안이 환해지지 않는 것 뿐.
정말이다. 화장실에 불이 들어오지 않아도 문을 열어두면 충분히 밝으니까 세수를 한다던가 양치를 할때는 전혀 불편할 일이 없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화장실 불이 안켜져서 불편한건 한두가지 정도다. 다행히 나는 화장실에서 사진을 찍는 습관이 없었고 전혀 불편하지 않은 순탄한 일상이 계속되었다.

실은 가끔 찍었다. ⓒ 김동환


나는 점점 더 숙달되어 갔다.
뭐랄까. 긴급출동 SOS에 출연해서 이 상황에 대해 무표정으로 침착하게 진술하는 나를 TV에서 본 동생이 "엄마. 오빠가 TV에 나와!"라고 외치는 현장에 엄마와 함께 있더라도 전혀 부끄럽지 않을 만큼. 불꺼진 화장실은 내게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갔다.

며칠 지나니 재미난 노하우가 생겼다. 샤워를 할 때는 화장실에 가까운 실내등을 켜놓고 문을 눈꼽만큼 열어둔다. 그러면 그 눈꼽만한 틈으로 얇은 빛들이 뒷꿈치를 들고 들어와 정면의 평평한 타일을 짚으며 화장실 내부로 단정하게 반사되는데, 사실 이걸 보는 재미가 각별하다. 외계인의 손가락을 찾는듯한 멍청한 표정으로 희미한 빛의 궤적을 손끝으로 쫓다가, 아무래도 내가 미친게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수도꼭지를 틀곤 했으니까. 어둠속에서 희미한 빛이 부리는 장난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변기를 사용하는 것은 좀 더 특별한 경험이다. 문을 닫는 순간. 내 손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이 펼쳐진다. 나도 안다. 나는 열세 살 보이스카웃이 아니다. 그러나 손바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렇게 재밌는 경험인줄은 몰랐다. 내 손바닥은 유난히 밝은 색임에도 불구하고. 연신 눈을 껌뻑 거려보지만 별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계속 바라보다가 문득. 시각이 하잘 것 없어졌음을 느낄때 청각은 스멀스멀 피어난다. 소머즈가 된 것 같다. 귀에 힘을 주며 입으로 뚜두두두두두 소리를 내 보았다.

들린다.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 앞방에서 컴퓨터 오락하는 소리. 옆방에서 라면 끓이는 소리. 실없는 소머즈 놀이를 하지 않아도 확실히 잘 들린다.
입을 닫고 잠시 귀를 기울여본다. 이거 왠지 아까보다 내가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어있는 것 같은 기분. 앞뒤가 전혀 맞질 않는다. 나는 그냥 5분쯤 전에 내집 화장실 문을 닫았을 뿐인데.

스며드는 빛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다. ⓒ 김동환


“응. 우리집 화장실은 변기에 앉으면 불이 꺼지면서 천천히 남반구의 별자리 홀로그램이 나타나. 풀이 갈라지는 기분좋은 바람소리도 나오는데 춥진 않아.”

변기를 눕히는건 곤란하겠지만 요런 욕실 상품 어떨까. 변비약과 함께 팔면 벌이가 괜찮을 텐데.

거칠게 생각해보면 이런 것이 바로 자기만의 공간을 갖는 매력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래도 부모님과 살고 있다거나, 여자친구가 언제고 놀러올지도 모르는 상황이라면 화장실 전구는 1년 365일 24시간 환하게 켜져야 할테니까. 당연하다. 그곳은 나만의 화장실이 아니니까.

한달 쯤 전부터 자취방을 정리하고 부모님 집에서 얻어 살고 있다. 안타깝게도 부모님의 화장실은 재미가 없다. 수챗구멍은 항상 깨끗하고 세면대는 깔끔하게 정돈 되어있으며, 무엇보다 화장실 문이 꼭 닫히질 않는다.

사랑하는 부모님과 함께 사는건 참 좋은데
한편으로는 좀 아쉽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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