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애의 지적욕구를 자극했던 남편의 영영사전

이야기가 있는 책

검토 완료

한미숙(maldduk2)등록 2008.08.20 10:41

남편이 쓰던 영영사전, 표지가 헤졌지만 딸애의 오래된 친구이다. ⓒ 한미숙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다. 집에 책이라고는 남편과 내가 지니고 있던 소설책들과 시집들, 딱딱한 이론서들 약간이 전부였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나는 그렇게 아이를 ‘방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이는 심심했다. 다 먹고 남은 빈 우윳곽을 장난감 삼아 놀기도 지루했다. 뻣뻣한 빈 곽은 만지고 또 만져서 휴지처럼 돼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가 두꺼운 사전을 끌어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책장을 한 장씩 천천히 넘기며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진지해지는가 하면, 또 다른 장면이 제 눈에 들어올 땐 환호와 감탄이 섞인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아이가 열중했던 책은 남편의 영영사전이었다.

고사리 같은 아이 손엔 꽤나 무거웠을 영영사전. 사전 속의 무엇이 아이로 하여금 강렬한 느낌을 받게 했을까? 나는 아무리 바빠도 아이가 내뿜는 감탄사에 한번쯤 호응을 해주어야 했다. 별 기대 없이, 아니 ‘사전에 뭐 볼 거 있다고? 라는 단순무식한 생각으로.

그런데 아이에게 다가선 내 눈엔 나도 볼 수 없었던 것을 아이가 보게 했다. 평소엔 소 닭쳐다 보듯 했던 사전이었다. ‘그런데 뭘?’ 하는 나에게 아이는 제가 봤던 걸 손가락으로 짚었다. 두 페이지정도를 넘기면 작은 네모 칸에 나타나는 그림들, 아이는 그걸 보는 재미로 사전을 본 것 같다.

아이의 눈을 사로잡았던 사전 속 전면 칼라그림들. ⓒ 한미숙


우리가 생활하는 다양한 모습들이 네모 칸 안에 들어있었다. 아침마다 면도하는 아빠의 면도기, 자기처럼 기저귀를 찬 아기들. 어디 그 뿐인가. 제 입맛을 사로잡았던 달콤하고 부드러운 아이스크림도 있다. 더 신기한 건 엄마 일터에서 봤던 물건이 책에도 있는 것이다.

흑백으로만 인쇄된 얇은 페이지가 지루하다싶으면 사전은 보너스처럼 한 장 양쪽을 온갖 색이 섞여있는 칼라로 장식했다. 아이는 그걸 감격으로 만나기 위해 흑백의 얇은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넘기지 않았을까싶다. 새삼, 사전의 겉표지부터가 선명한 삼원색이었다는 걸 그때야 알았다.

나는 그때 대학교 근처에서 미술재료를 파는 화방을 하고 있었다. 아침이면 재료를 사러오는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몸이 두개라도 부족할 때였다. 한바탕 바쁜 시간이 지나면,  빠져나간 물건들을 정리하고 거래처에 주문을 했다. 물건만 파는 게 아니라 크기마다 다른 캔바스(나무로 된 그림틀에 천을 씌운 것)를 짜는 일도 직접 했다. 인건비를 생각하면 사람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놀이방 종일반에 보낸 아이는 내가 일하는 화방에서 아빠의 영영사전을 보고 자랐다. 그건 아이에게 훌륭한 장난감이고 친구였다. 사전으로 눈 뜬 아이의 지적욕구는 초등학교, 중, 고등학교를 여전히 책과 친구하며 지낸다. 아이는 올해 또 수능을 본다. 시험위주로 꽁꽁 무장된 학습서도 재밌는(?) 책이 되길 바란다면 엄마의 잔인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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