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아직 망설이며 말 하지 않았을 뿐

그리움으로 덮어주는 고마운 세월

검토 완료

한미숙(maldduk2)등록 2008.08.28 10:10
‘지금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박인환 시에 가수 박인희가 불렀던 가사이다. 이렇게 시작되는 노래. 그 다음에 이어지는 노랫말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라는 말은 들을 때마다 정말 그럴까, 하고 의혹이 들곤 했다. 그런 추억을 가진 연인의 이름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 기억조차 희미해져도 정말 잊혀지기는 할지 궁금해서였다.

너무도 생생하고 가슴이 아려서 당시에는 아무리 죽어도 못 잊을 것 같은 절절한 사연도 세월 앞에 속절없이 희미해져가는 걸 느낀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는 정말 신기하게도 그의 이름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성 조차도 모르겠다. 어찌 이리도 까마득할 수 있을까? 하지만 자전거 뒤에 앉아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감고 달렸던 늦가을 초저녁 바람결은 내 몸에 감겨올 듯 생생하다. 이름은 잊었지만 분위기는 가슴에 남아있으니.

그와 나는 한 직장의 같은 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 집은 서울 동작구 ‘신대방삼거리’에 있었고 그의 집은 한 정거장 떨어진 ‘모자원’쪽이었다. 우리는 직장에서 날마다 만났고 일요일에도 가끔 만났다. 만나는 곳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공군사관학교 후문이 그의 집 근처에 있었다. 그곳의 너른 잔디밭을 걸으면서 나는 주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시골이 고향이고 농사짓는 부모님과 동생들 이야기, 서울에서 대학을 중퇴하고 어찌어찌 인연이 되어 지금 직장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얘길 들으며 나도 내 속 깊은 얘기를 꺼냈으리라. 나는 그가 그저 좋았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주근깨가 박혀있던 동그란 얼굴. 쌍꺼풀이 없는 눈도 왠지 듬직한 그의 체구만큼이나 미더움을 더했다. 사투리가 섞인 말투로 내 이름을 부를 때면 그의 텁텁한 목소리가 다정하고 그윽했다.

일요일이었다. 그날도 나는 공군사관학교 후문에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나올 것이었다. 그의 바지주머니 한켠엔 언제나 문고판 책이 들어있었다. 직장에서 쉬는 시간이면 가끔 두꺼비 같은 그의 손에 앙증맞은 책이 펼쳐져 있었다. 어쩜 나는 그 모습에 끌리지 않았나 싶다. ‘왜 두 사람은 항상 붙어다니냐?’ 고 동료들이 물어볼 때, 집으로 가는 방향이 같아서, 라고 말했지만 실은 그가 좋아서였다.

키 큰 코스모스가 자전거 바람에 흔들리는 모습이 가까워지면서 그가 다가왔다. 활짝 웃는 그의 고른 치아가 어찌나 환한지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미숙씨!”

내 이름을 부르며 그가 자전거에서 내렸다. 나는 그의 연인같은 기분이 되었다. 점심때가 되어 내가 문득, 집에 가서 점심을 해먹으면 어떨까 물었다. 그가 사는 자취방이 궁금했지만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가 나를 자기네 집으로 초대한 적도 없었다. 내 말에 그가 어물거리며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불안한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아, 저... 미숙씨, 잠깐만요’ 하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 여자가 우리 앞에 다가와서는 버티듯 서 있었다.

여자는 목이 깊게 파인 보랏빛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깊게 파인 목에는 원피스와 같은 재질의 머플러가 바람이 불 때마다 코스모스처럼 한들거렸다. 작고 까무잡잡한 얼굴이 무척 앳되고 귀여운 인상이었다. 키가 컸는데 굽 높은 구두를 신고 있어서 작은 키가 아닌 그보다 더 커보였다. 여자는 그를 째려보듯 바라보았다. 그가 다른 곳에 가서 얘기하자고 말하자, 여자는 그와 나를 번갈아보며 말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집에도 안 들어오고, 여기서 뭐하는 건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그 순간, 나는 두 사람이 부부처럼 말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얘기였지만 언뜻 그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소름이 쫙 끼쳤다. 보랏빛 원피스가 내게 말했다.

“oo씨가 잘 해주죠? 이 사람 말하는 거 다 거짓말이에요. 하나도 믿지 마세요.”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노랫말이 아니더라도 나는 그와 함께 했던 두 계절의 시간이 내 마음 한곳에 접혀있다. 원망과 분노는 체에 걸러진 듯 다 빠져나가고 순전한 그리움만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역회사와 바이어오피스를 다니다가 그만 둔 나는 벌어놓은(?)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었다. 그게 그림이었다. 그림도구를 준비하고 남영동 화실에서 죽치고 앉아 밤낮으로 그림만 그리던 때가 스물네 다섯 살 즈음이었다.

수중에 남아있는 돈이 점점 줄어들면서 나는 내가 하는 ‘짓’이 막연하고 무모하다는 걸 깨달았다. 친구들한테서는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나는 하는 일도 없었고 특별한 계획도 없었다. 나 스스로가 하루를 사는 날파리 같다고 여기던 때였다. 사는 일들이 그저 시니컬했다.

게다가 집에서는 나이가 아직 금값으로 취급받을(?)때 선을 봐서 후딱 해치우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내키지 않은 선도 몇 번 봤다. 잠깐 부모 비위를 맞춰주자는 맞선은 한번의 식사로 끝났다. 그림을 그리려고 직장까지 그만 둔 내 기세가 바닥으로 떨어질 즈음 ‘둘리(가명)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회사는 집에서 멀지 않은 난곡에 있었다.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이 아니라 그려져 나온 그림(원화)의 움직임을 그리는 것(동화)이 불만스러웠지만, 그래도 일을 하면서 다시 뭔가를 해볼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생겼다.

그 당시(1985년) 애니메이션 대부분은 일본작품이었다. 일을 받으면 원화에서부터 동화, 선화, 칼라, 편집, 촬영까지 끝내서 다시 일본으로 작품이 보내졌다. 그쪽 프로그램 시간에 맞춰야하기 때문에 우리는 일이 왕창 몰리는 한여름에 꼬박 밤을 새워 작업을 하기도 했다.

우리는 한 방에 일곱 명 정도가 모여 작업했다. 각자 맡은 그림에 집중하느라 연필심이 움직이는 소리와 종이 넘기는 소리, 지우개로 지우는 소리만 가득했다. 점심시간이면 서둘러 밥을 먹고 그와 나는 회사근처 동산을 산책하곤 했다.

산에 있는 나무와 풀에 대해서 그는 모르는 게 없었다. 하찮게 자라는 풀조차도 그의 입을 통하면 새롭게 내 눈에 들어왔다. 여린 풀꽃 하나라도 조심스럽게 다루는 그의 온화한 성품이 그대로 느껴졌다. 산에서 내려오는 우리를 보고 같은 방 동료들이 웃으면서 농담을 했다.

“둘이 꼭 연애하는 것 같애!”
사람들은 그를 보고 남자로 태어났으면 한가락 했을 인물이라고 말하곤 했다. 우린 동갑이었지만 그의 곁에 있으면 나는 내 투정을 받아주는 언니 같았고, 큰오빠 같았으며 진한 우정을 주고받는 연인 같았다.

납기일을 맞추느라 밤샘작업이 잦을 때였다. 그를 만나러 친구가 회사에 와 있다고 알려줬다. 고향친구가 왔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이 시큰둥했다. 얘기 몇 마디하고 후딱 가버리는 고향친구도 있나 싶었지만 나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

“혹시 그 사람이 돈 얘기는 안 해요? 아직 거기까지는 아니군요. **대학을 중퇴했다고 했죠?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나두 속았어요. 이젠 정말 내가 먼저 끝낼려구 그래요. 이쯤에서 미숙씨가 알게 되서 그나마 다행이에요.”

여자와 얘기하고 있는 사이 그가 언제 자리를 떴는지 자전거를 끌고 가는 뒷모습이 저만치에서 보였다.

집에까지 걸어가는 동안 발짝이 제대로 떼어지지 않았다. 꼭 귀신한테 홀린 것 같았다. 무엇인지 확실하게 잡히지 않아도 두 사람을 생각하면 속이 울렁거렸다.

그들이 했던 말들을 곱씹어보자니 너무 어이가 없었다. 여자가 다짜고짜 따지듯 말하는데도 변명 한 마디 못하는 그가 정말 의도적으로 내게 접근했을까? 접근이란 말도 그에겐 가당치 않았다. 나는 정말 그를 좋아했으니까. 이쯤해서 그의 정체가 드러났으니 다행이라는 말을 믿어야 되는지도 혼란스러웠다.

이쯤이 아니라면 어느 때쯤에는 그가 괴물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아직 그가 망설이며 얘기하지 않았을 뿐, 거짓말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그런 사람일 수는 없었다. ‘그런 사람’은 또 뭐란 말인가? 머릿속은 복잡해지고 거짓말과 진실이 뒤죽박죽 섞여 가슴이 답답했다.

그를 찾아온 고향친구는 바로 여자였다. 밤샘작업으로 집을 비웠다고 찾아온 거였다. 일하러 간 남편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봐 직접 가서 확인해봐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여자의 출현이 내겐 엄청난 충격이었고, 그를 다시 예전처럼 볼 수 없다는 것도 가슴아팠다.

시간이 25년이나 흘렀다. 그와 여자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한여름 무더위가 가시고 늦가을 때늦은 매미울음소리가 들리면 내게 ‘거짓말’을 했던 그가 문득 생각한다. 평생을 사귀어도 좋을 친구였다고 믿었던 그였다. 어디에서 살든지 두 사람 모두 행복하게 살고 있기를 기원한다. 거짓말 사건이 일어나기 전, 그에게서 받았던 따뜻한 위로는 세월이 흐를수록 그리움으로 더 커지는 것 같다.

자전거를 타고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던, 다정한 ‘연인’. 새삼 그 시절이 까무룩 하게 흘러갔다.
덧붙이는 글 '거짓말' 응모글입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