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누구나 다수가 될 수 있는 '절차'를 열어 놓은 것 "

'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말하나-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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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희(sost)등록 2009.12.16 13:17
올 6월은 시국선언의 달이었다. 전국 87개 대학 3000여 명의 교수들 뿐 아니라 공무원과 교사, 해외교민‧주부‧고교생들도 시국선언에 동참했다. 선언문들은 한 목소리로 '민주주의의 후퇴'를 우려했다. 특히 다수의 힘을 앞세운 정부와 여당 4대강 사업과 미디어법, 비정규직 법 개정, 세종시 수정 등을 밀어 붙이며 소통을 거부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실질적 민주주의 실현은 아직 멀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박상훈(왼쪽) 후마니타스 대표는 "민주주의는 절차적 평등"임을 강조한다. 그는 2007년 10월 최장집 고려대 교수(가운데), 박찬표 목포대 교수(오른쪽)과 함께 쓴 '어떤 민주주의인가'에서도 민주주의의 절차를 강조했다. ⓒ 후마니타스


그러나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정치학 박사)는 '절차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의 구별은 "'민주화 이후'에 실망한 운동권들의 논리"라고 지적한다. 지난 9월 11일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사회교양특강에서 그는 "민주화가 됐다는 말은, 사람들이 권력 작동 방식을 바꾸기 위해 다수의 의지를 정당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모아서 그 결정을 정부나 국회를 통해 실천하는 '절차적인 것'이다"고 강조했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민주화 이후'에 실망한 운동권의 낭만적 비전

박 대표는 "사회·경제적으로 좀 더 평등해지고, 시민 누구나 평등해야 한다는 실질적 민주주의의 실현은 절차적 민주주의 안에서 '누가 승자가 되느냐'가 결정한다"며 "민주화가 됐다고 민주주의가 곧바로 실현되는 게 아니라 이를 제대로 실현하려는 사람들의 실천과 능력에 따라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들이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군사정권 하에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사람들은 '권위주의가 사라지고 민주화가 되면 모든 문제가 사라진다'고 기대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 간 세상은 사람들의 기대만큼 크게 변하지 않았다. 박 대표는 "이러한 기대에 어떤 문제점이 있었는지, 또 민주화 이후 우리는 그 문제를 어떻게 대면하고 이해하는지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민주주의는, 어떤 지향을 갖는 사람도 다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절차적으로 열어놓은 것"이라며 "실제 민주화 이후 집중해야 했던 문제는, 이 개방된 공간을 잘 활용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바꾸고 다수의 힘을 모을 것이냐 하는 일이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민주화 세력은 이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고, 기존의 운동 방식이 아닌 정당과 정치 동원이 등장한 현실 속에서 선거를 치르며 실망한 나머지 '실질적 민주주의'라는 또 다른 낭만적 비전을 만들어 냈다는 게 박 대표의 설명이다.

현대 정치학의 거장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란 정치적 평등 체제"이라고 말했다. 민주화 혹은 개헌을 한다고 해서 사회적 불평등 같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다만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정치적 제도와 절차가 변화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절차를 별 게 아닌 것으로 평가하고 경제적 평등이나 풍요 같은 '실질적 민주주의'란 비전만 남게 되면 어떻게 될까? 박 대표는 "이는 민주주의가 아닌 체제의 성과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며 파시즘의 예를 들었다.

"파시즘은 나름대로 복지 체제를 많이 갖추고 있었습니다. 유럽에는 '행복한 삶'과 관련된 문구가 많은데, 대부분 파시즘 시대에 만든 말이에요. 사생활 영역에서도 공적으로 행복해야 된다는 가치와 전통을 만든 것은 어떤 면에서는 파시즘의 복지관이었습니다."

박 대표는 로버트 달을 언급하며 "그가 절차적 민주주의의 요건이라고 한 것은, 다수가 자유롭게 회의를 해 결정을 내리는 것처럼 의제에 대한 평등한 통제권을 갖는 일 등 그 요건이 모두 달성되면 굉장한 사회가 될 것 같은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면서 "(우리가 쉽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절차적 민주주의의 내용을 심화하는 일은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란 말을 덧붙였다.

'대표'를 뽑고 감시하는 일에 '참여'하는 게 민주주의의 핵심

결국 현대 민주주의의 중심 테마는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의 영역, 다시 말해 '대표를 어떻게 구조화해 민주적 가치와 병행하게 하는가'란 게 그의 생각이다. '대표'를 두고 '참여'를 어떻게 확대하며 질을 높인 것인가를 고민하는 한편, 대표 또한 얼마든지 타락할 수 있으므로 그들의 책임성을 규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현대 민주주의의 중심인데 이게 어려웠다는 것이다.

박 대표는 또 "민주주의는 혁명의 안티테제"라고 말했다. 그는 "민주주의 안에서 기존의 혁명관을 추구했던 사람은 민주주의만큼 '급진적으로 사회를 바꾸는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없다'는 점을 발견했다"며 "그 대표적인 사람이 엥겔스"라고 설명했다. 맑스가 죽은 뒤  1890년대까지 살았던 엥겔스는 민주화 이행과정의 민주주의를 실제 경험한다.

이후 그는 '프랑스 계급투쟁'의 서문에서 "거리에서 전선을 치고 양쪽의 물리적 충돌을 통해 혁명을 이뤄내는 건 민주주의 하에서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엥겔스가 "투표에서 수많은 '종이돌(paper stone)'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 내용은 '평화로운 계급투쟁'이라는 사회주의의 전환을 가져왔다.

지난 11일 국회 앞에서 열린 '언론악법 국회 재개정 촉구' 기자회견. 미디어법 논란은 이명박 정부 들어 민주주의의 절차가 얼마나 훼손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 전국언론노동조합


"결국 우리가 민주화 이후에 만나게 된 것은 제도화된 경쟁체제로서의 민주주의"라며 박 대표는 "헌법이 뒷받침하는 정치영역 안에서 다른 이들에게 복종을 강요할 제도와 법을 만들고, 그 틀 안에서 어떤 비전이 승리해 사회를 바꿀 수 있는가를 다투는 체제가 민주주의"라고 했다.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는 기존의 민주주의에 대한 비전에 전환이 필요함을 깨닫게 했다"며 박 대표는 그 전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모두가 정치를 싫어하지만, 정치 없이 공동체가 운영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이죠. 즉 민주주의를 말하는 데 있어서 '정치란 무엇인가'를 대면하지 않으면, 백사장에서 모래를 집으면 쑥 빠져나가는 것처럼 알맹이가 없는 게 됩니다."

정치는 어렵지만, 좋은 정치가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강의 주제는 자연스레 '정치란 무엇인가'로 이어졌다. 박 대표는 "경제학과 달리 정치학은 교과서를 쓸 수 없는 학문"이라며 정치와 정치학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개념과 틀을 가진 경제학에 비해 정치학은 모두가 정치에 대한 나름의 판단을 갖고 있고, 상식의 세계에서 다뤄지는 것이어서 그 체계를 세우기 어렵습니다. 그만큼 정치'학'을 통해 실제 정치를 포착하는 일은 아무리 뛰어난 대가도 10~20%밖에 할 수 없어요. 훌륭한 정치가는 바로 정치학이 포착할 수 없는 정치의 세계에서 특별한 자기 인식을 획득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정치가에게는 정치학이론을 많이 아는 게 아니라 자신이 경험 속에서 언은 지혜, 현명함, 사례 깊음 등이 중요합니다."

그는 때론 보통 사람들의 정치적 탁견이 정치학자보다 더 뛰어날 때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정치에 대해 저마다 상식을 갖는다며 "이 상식의 세계와 싸워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를 세우고, 말하는 건 어렵다"고 말했다. 박 대표가 '제대로 된 정치학은 논란을 동반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고 생각하는 이유다. "좋은 정치학은 사람들을 편하게 만들지 않고 괴롭히는 것이고, 또 '경청할 만한 논란'을 제기하는 사람의 것입니다."

박 대표는 "어쨌든 우리가 더 행복해지려면 좋은 정치의 구조 없인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좋은 정치의 결과는 생각보다 주목을 덜 받지만, 나쁜 정치의 결과는 너무 파괴적"이라면서 "정치의 영향력은 다른 어떤 것보다 크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치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일이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삶과 그들이 가진 열정과 결핍감들을 잘 포착하면서 스스로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개성이 정치가의 요건이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박 대표는 "민주주의는 참 매력 있고, 그 결과는 대단하다"며 "민주주의의 결과가 미치는 범위가 점점 넓이지면 한국도 더 나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상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민주주의는 그 가치 위에서 인간 사회의 풍부한 요소들이 학문적으로, 또 예술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가장 인간적인 비전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홈페이지(http://journalism.semyung.ac.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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