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으로 번역한 시는 시가 아니다

[책읽기가 즐겁다 361] 박희병 번역, <이언진 시집 : 골목길 나의 집>

등록 2010.05.10 19:25수정 2010.05.10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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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목길 나의 집>(돌베개,2009)

 ├ 글 : 이언진

 ├ 옮긴이 : 박희병

 └ 책값 : 8500원

 

 

18세기 천재 시인이라고 일컫는 이언진이라는 분 시를 우리 말로 옮긴 책이 나와 있기에 기쁘게 맞아들이며 읽었습니다. 더없이 뜻깊은 책이요 그지없이 알찬 책이라고 여기며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내내 이 책을 번역이라고 해야 할는지 뭐라고 해야 할는지 어지러웠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나서 영 찜찜합니다. 도무지 이언진이라는 분을 어떻게 돌아보아야 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호동거실>이라는 책을 우리 말로 옮긴 서울대 국문과 교수 박희병 님은 '호동(衚衕)'이란 '골목길'과 같고, 이 골목길에서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고 책머리에 밝힙니다. '비천(卑賤)'이란 "지위가 낮고 꾀죄죄한" 모습을 나타냅니다. 예나 이제나 잘나고 이름있고 돈있는 사람이 골목길에서 살아가는 법이란 없거나 아주 드뭅니다. 오늘날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예술쟁이가 골목동네로 나들이를 와서 얼핏설핏 담 너머 구경을 하기는 하지만, 정작 골목동네에서 '가난하고 낮은 지위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일이란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 골목길'이라는 글월이 영 못마땅합니다. 아니, 가없이 슬픕니다. 골목길 사람들은 스스로를 부러 낮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를 애써 높이지 않고, 스스로를 괜히 낮추지 않습니다. 언제나 있는 그대로 살아갑니다.

 

농사꾼이기에 더 훌륭하거나 거룩하지 않습니다. 대통령이라서 더 빼어나거나 남다르지 않습니다. 모두 똑같은 사람입니다. 더 많은 돈을 못 벌고 더 큰 이름을 못 누리며 더 센 힘을 뽐내지 못할 뿐, 골목길 사람은 여느 자리 사람이든 궁궐 안쪽 사람이든 다 매한가지로 애틋하고 알뜰한 목숨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호동거실>을 우리 말로 옮겼다고 하는 <골목길 나의 집>이라는 책은 골목동네 사람을 꾸밈없이 바라보고자 하는 매무새가 엿보이지 않아 슬프고 씁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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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그림. ⓒ 돌베개

겉그림. ⓒ 돌베개

.. '골목길'은 서민이나 중산층이 사는 공간을 표상한다. 골목길의 집들에는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들이 모여 산다. 시인의 집은 바로 이 골목길 속에 있다. 시인은 골목길 속 자신의 집에서 세상을 응시하고, 자기 자신을 응시하고, 골목길의 온갖 사람들을 응시하고, 조선의 현재와 미래를 응시한다. 그 응시의 결과가 바로 이 시집이다 … <호동거실>에는 백화(중국의 구어)가 많이 구사되어 있다. 한시에는 원래 백화를 써서는 안 된다. 이런 오랜 관습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언진은 백화를 여기저기 마구 사용하고 있다 ..  (6, 188쪽)

 

더욱이, 이 책 <골목길 나의 집>은 번역이라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책을 읽은 저로서는 도무지 번역이라고 느낄 수 없습니다. '6언시(글자수를 여섯으로 맞추어 넉 줄로 쓴 시)'를 옮긴 번역책 <골목길 나의 집>인데, '6언시'는 5언시나 7언시와 견주어 자유롭게 말하고 입말(그래 봤자 중국 한문입니다)을 살려서 쓰는 문학이라고 하는데, <골목길 나의 집>은 '시'가 아닌 '산문'으로 옮겼습니다.

 

2005년에 옮겨진 <번역과 번역가들>(열린책들)이라는 책을 읽으면, 에핌 에트킨드라는 분이 "산문으로 번역된 시는 이미 시가 아니며, 그렇다고 해서 진정한 산문도 아니라는 것이다(109쪽)"라고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이언진 님 시를 우리 말로 옮긴 <골목길 나의 집>은 틀림없이 뜻이 있고 아름다운 문학입니다. 그러나 번역이라 할 수 없는 번역을 선보이는 한편, 18세기 이언진 님이 살아가던 골목동네를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 '높'습니다. 너무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눈썰미로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말로 옮길 때에 '6언시'처럼 여섯 글자로 맞추거나 어슷비슷한 짧은 글월로 맞추기란 너무 힘들 수 있습니다. 그래도 '시 문학'이라는 꼴은 갖추어야 하지 않으랴 생각합니다. 모두 170 꼭지 시를 옮긴 <골목길 나의 집>이라는 책에서 열세 꼭지를 가려내어, 저 또한 어설프고 어줍잖습니다만, 이언진 님이 골목동네에서 골목사람하고 어깨동무하는 이웃으로 지내던 느낌을 헤아리면서 골목사람들 말투로 다시금 옮겨 봅니다. 책에는 우리 말로 옮긴 산문 밑에 이언진 님이 한문으로 적은 싯말을 고스란히 적어 놓았기에 저 같은 쥐대기도 어설프나마 번역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한문 원문까지 옮겨 적기란 너무 버겁고 부질없다고 느껴, 박희병 님 번역에 제 번역을 붙이기만 합니다. 박희병 님 번역은 넉 줄로 나누어 놓았는데, 이 자리에서는 두 줄로 붙입니다. 왜냐하면 이언진 님 6언시는 넉 줄이 아닌 두 줄로 나누어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 문학을 옮겨서 나누려 한다면 시 문학 짜임새와 얼거리와 글맛과 글흐름을 모두 살피어 오늘날 우리 말로 가다듬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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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닥다닥 붙은 골목길 집들이란, 값비싼 아파트와 견주면 참 낮고 꾀죄죄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높고 잘난 분들이 살지 않는 골목동네라 하더라도 고운 햇살과 맑은 기운 가득한 터전입니다. <골목길 나의 집>을 우리 말로 옮긴 분께서 이러한 대목을 좀더 헤아릴 수 있었다면, 번역 또한 '골목사람 수수한 말투'로 손쉬우면서도 '18세기 조선문학 가운데 하나인 이언진 님 말결'을 잘 살릴 수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 최종규

다닥다닥 붙은 골목길 집들이란, 값비싼 아파트와 견주면 참 낮고 꾀죄죄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높고 잘난 분들이 살지 않는 골목동네라 하더라도 고운 햇살과 맑은 기운 가득한 터전입니다. <골목길 나의 집>을 우리 말로 옮긴 분께서 이러한 대목을 좀더 헤아릴 수 있었다면, 번역 또한 '골목사람 수수한 말투'로 손쉬우면서도 '18세기 조선문학 가운데 하나인 이언진 님 말결'을 잘 살릴 수 있었으리라 믿습니다. ⓒ 최종규

 

(1)

새벽종 울리자, 호동의 사람들 참 분주하네.

먹을 것 위해서거나 벼슬 얻으려 해서지. 만인의 마음 나는 앉아서 안다.

(새벽종 울리자 / 골목사람 바쁘다 /

 밥 빌고 벼슬 얻으려는 / 이 마음 난 앉아서 안다)

 

(5)

치가(治家)하려면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어야 하고 애 기를 젠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야지.

'빈이락(貧而樂)' 이 세 글자 비결을 알면 얼굴에 근심이 깃들 리 있나.

(살림 하며 눈귀 멀고 / 아이 보며 기저귀 간다 /

 가난이 즐거우면 / 얼굴에 근심 없지)

 

(9)

집 나가 노닐면 고생 또 고생 집에 있으면 즐겁고 기쁘지.

몸이 늙거나 약해지지 않고 식솔이 기한(飢寒)에 떨지도 않지.

(집 나가면 괴롭고 / 집에서는 즐겁다 /

 늙어도 튼튼하고 / 굶거나 추운 식구 없다)

 

(15)

조정에서 누차 불러도 응하지 않는 건 범 안고 자고 뱀 품고 달리듯 위태하기 때문.

용퇴하면 화(禍) 적고 복 많을 텐데 뭣 땜에 사주 보고 점을 치는지.

(나라님 부름 싫다 / 범 안은 독뱀 방석 /

 물러서니 걱정 없다 / 내 팔자 그예 좋다)

 

(19)

호동에 가득한 사람들 그 모두 성현(聖賢) 배고파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도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을 지니고 있음을 맹자가 말했고 나 또한 말하네.

(골목 사람 거룩하다 / 가난하고 배고파도 /

 착하고 고운 마음 / 맹자님도 말했다)

 

(28)

아이 우는 소리 천뢰(天뢰)와 같아 피리와 거문고 소리보다 훨씬 낫지.

처마의 한적한 물소리 참 좋으니 똑, 똑, 똑 베개맡에서 듣고 있노라.

(아이 울음 하늘 소리 / 뭇 악기보다 좋다 /

 처맛물 조용한 소리 / 누워서 듣는 똑똑똑)

 

(43)

인정세태는 천만(千萬) 가지고 바다 속엔 온갖 고기가 있지.

선생의 마음은 터럭처럼 세밀해 저자사람 얼굴의 마마 자국까지 알지.

(사람 마음 갖가지 / 바다엔 숱한 고기 /

 내 마음 촘촘한 터럭 / 장사꾼 낯 다 알지)

 

(58)

저잣거리의 구운 떡 어린애는 그 값을 아네.

좋은 물건이면 그뿐 난 진짜 가짜 따위 가리지 않아.

(저잣거리 구운 떡 / 아이는 아는 제값 /

 좋으니 두루 좋아 / 참거짓 떠나 좋지)

 

(78)

밥은 하루 지나면 쉬었는가 싶고 옷은 해 지나면 낡았는가 싶지.

문장가의 난숙한 문투 한당(漢唐) 이래 어찌 안 썩을 리 있나?

(밥은 하루면 쉬고 / 옷은 한 해면 낡고 /

 어리숙한 글쟁이 / 예부터 썩을밖에)

 

(81)

가난한 집 식탁 썰렁하여서 반찬이란 꼴랑 된장뿐이네.

오늘 아침은 처자가 호강하누나 / 제사 지낸 서쪽 이웃 쇠고기 보내 줘.

(가난해 밥상 썰렁 / 된장 하나만 겨우 /

 오늘 아침 뜻밖에 / 젯상 고기 들어와)

 

(91)

진짜 보타산과 진짜 관음이 10보 옆에 있다 해도 나는 안 갈래.

내 엄마가 곧 부처 엄마니 / 집에 있으면서 엄마를 잘 공양할래.

(보살 관음 살아서 / 내 곁에 있다 해도 /

 울 엄마가 참 부처 / 울 집에서 섬기리)

 

(105)

손가락끝, 붓끝, 종이 사이에 하나의 부처 분명 생겨나지만

손가락끝 보고 붓끝 보고 종이를 봐도 부처는 없네.

(손붓이 빚은 부처 / 환히 그려진 모습 /

 손붓 종이 어디도 / 참 부처는 없는데)

 

(132)

천하엔 본래 일이 없는데 유식한 이가 만들어 내지.

책을 태워 버린 건 정말 큰 안목 그 죄도 으뜸이요, 그 공도 으뜸.

(처음부터 없던 일 / 글쟁이가 지어내 /

 책 불사름 훌륭해 / 엉터리요 멋진 일)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2010.05.10 19:25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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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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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8)>(그물코,2007∼2009)

골목길 나의 집 - 이언진 시집

이언진 지음, 박희병 옮김,
돌베개, 2009


#책읽기 #번역 #이언진 #박희병 #삶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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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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