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절하게 독서하기> 아웅산 수찌와 버마군부

우리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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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환(kdh2966)등록 2010.06.21 14:09

<처절하게 독서하기> 아웅산 수찌와 버마군부 45년 자유 투쟁의 역사 버마 민주화 운동의 대표자, 아웅산 수찌를 조명해본다. ⓒ 김동환


"디모끄레시 아삐아와 야 쉬예 도아예! 도아예!"(우리는 완전한 민주주의를 원한다! 원한다!)

조샤린은 1994년 한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민주화 운동을 해오고 있다. 부천의 안경 제조 업체에서 일하며 받는 일당 3만 5천 원으로 틈틈히 시간을 내 '뉴스 저널'을 발행하며 고국의 민주화 운동을 후원한다. NLD(민족민주동맹)의 한국 지부 대외협력국장으로서 책임감이 만만치 않다. 그는 왜 정치적 망명자가 되어 한국에 왔을까?

1988년 8월 8일, 버마(미얀마)에서는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1962년부터 군부가 지원해 온 유일한 합법정당 BSPP(버마사회주의계획당)의 철권통치는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마약을 비롯한 음성적 경제행위의 조장은 국가경제의 지반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국제사면위원회에서는 버마 군사정부의 국경지역 주민 즉결처형, 고문, 성폭행, 불법전쟁동원, 인간지뢰탐지기 활용 보고서를 발간하며 버마 사회가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는 양상을 그대로 세계에 알렸다. 1988년의 시위는 일상적인 군부의 파괴행위에 맞선 버마인들의 평화적 시위였으나 정부의 무차별 발포로 무려 1천명 이상이 사망하고 반체제 인사 수천명이 안전지대로 대피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버마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랑군대학의 학생회관,
"파시스트 정권 물러가라"
"일당 독재 물러가라"
학생과 승려, 시민들은 함께 구호를 외쳤다. 캠퍼스를 점령한 군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대답은 정조준한 총알 세례였다. 군 당국은 9명 사망을 발표했지만 목격자와 참가자는 수백명의 사상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군부 정권은 그렇듯 잔혹한 것이었다.

'아웅산 수치'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조국을 영국으로부터 독립시키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아웅산 장군, 아웅산 장군은 버마 국민들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식민지 국가들이 의례 그렇듯 허무와 방종, 순응이 사회의 지배적인 분위기일 때, 그는 과감히 총을 들었고 독립전쟁의 일선에 나섰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현재 군부정권의 지도자 네윈과도 동지적 관계를 가졌다. 네윈은 왜 이리 변했을까? 아니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까?

아웅산수치는 88년 8월 26일, 랑군 슈에다곤 파고다에 모인 군중 수십만명 앞에서 첫 대중연설을 가졌다. 독립영웅의 딸은 그렇게 버마 민주화 운동의 핵심으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해 9월 랑군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아웅산 수찌를 중심으로 NLD를 결성, 버마 정계의 태풍을 몰고 온다. 군부 역시 전술적으로 BSPP를 해체하고 민주화의 부분 요구를 받아들여 NUP(민족통일당)을 창당한다. 결국 그러한 위장전술은 얼마 못가 진상을 드러냈다. 국민들의 대다수는 NLD를 지지했고, 군부의 지반은 파탄임이 드러나자 거센 폭력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가택 연금', 운동이 최고조에 치달았을 때, 군부가 선택한 것은 상징과 신화의 발목을 붙잡는 것이었다. 운동의 자발성, 주체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핵심만 무너뜨리면 된다는 전략일 것이다. 효과적이진 못했던 것 같다. 가택 연금은 아웅산수찌를 오히려 세계 속에 알리면서 동시에 버마의 지독한 정치상황을 알리는데 일조했다. 현재도 아웅산 수찌의 동향은 언론의 1면을 장식한다. 특히나 그녀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군부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안긴 것이었다. 그러나 군부는 그렇게 약하지 않았다. 버마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계적인 요구에 아랑곳하지 않고 독재체제를 강화시켜나갔다. 국명까지 버마에서 미얀마로 바꾼  군부정권은 딴슈에 정권에 들어 오히려 왕정체제로 복귀하는 모습인 듯하다. 민주화의 핵심 운동가들이 가택 연금,  수배, 체포를 겪으며 NLD는 와해되고 있는 상황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아웅산 수찌와 버마 군부'는 버마의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정리한 책이다. 국민들의 영웅 아웅산수찌를 조사하며 그녀에 대한 신뢰를 머금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주장한다. 민주화가 추동되는 것이 한 영웅에 의한 것이 아니듯 이제 앙웅산수찌 개인에 대한 과도한 믿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고 조심스럽게 이야기 한다. 그 근거로서 수찌여사가 아직 충분하게 버마의 미래를 위한 구체적 비전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비주의'가 독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아웅산 수찌는 2009년 서거한 한국의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조화를 보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국은 1987년 신군부를 국민의 힘으로 몰아내고 제도적인 민주화를 일궈낸 나라다. 또한 일본의 식민지 경험을 겪었던 나라인 만큼 역사적 진로가 유사함에도 한국은 민주화에 성공했다. 그 동력은 어디있었을까? 그 과정에서 정치지도자들은 어떻게 행동했는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을 것이다.

<처절하게 독서하기> 아웅산 수찌와 버마군부 2007년 버마의 승려시위, 피해도 있었지만 승려집단이 항쟁의 지도부로 자리잡을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주었다. ⓒ 김동환


2007년 랑군에서 승려들이 주도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중소도시에서까지 일어난 이 시위는 승려 집단이 전국적  조직을 갖췄다는 희망의 근거가 되었다. 물론 군부정권의 살인 진압 역시 한층 강경해졌지만 그들의 힘찬 전진에,  조샤린의 해외 망명 투쟁의 의지에서 아웅산 수찌는 답을 얻어야 할 것이며, 사실상 그 길 밖에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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