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을 마냥 즐기다

[영웅 안중근 17] 둘째마당 - 하얼빈행 열차를 타다

등록 2010.10.12 14:38수정 2010.11.12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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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과 경술국치 100년을 앞두고,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위대한 애국자 안중근 의사의 유적지인 러시아 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포브라니치나야, 중국 쑤이펀허, 하얼빈, 지야이지스고(채가구), 장춘, 다롄, 뤼순 등지를 지난해 10월 26일부터 11월 3일까지 아흐레간 답사하였습니다. 귀국한 뒤 안중근 의사 순국날인 2010년 3월 26일에 맞춰 눈빛출판사에서 <영웅 안중근>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2010년 경술국치 100년에 즈음하여 <영웅 안중근>의 생애를 다시 조명하는 게 매우 의미 있는 일로 여겨져, 이미 출판된 원고를 다소 손보아 재편집하고, 한정된 책의 지면 사정상 미처 넣지 못한 숱한 자료사진을 다양하게 넣어 2010년 11월 20일까지 43회 연재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 기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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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 포브라니치나야 간 철도 언저리 풍경(1) ⓒ 박도

 

하얼빈 행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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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역 플랫폼과 육교 ⓒ 박도

몇 권의 역사책을 들추는 새 바깥에는 어둠이 걷히고 있었다. 아침 요기도 하고 마실 물도 살 겸 우수리스크 역 앞 가게로 갔다. 이른 시간 탓인지 밥집들은 문을 열지 않았다. 슈퍼도 7시가 되어야 문을 연다고 붙어있기에 잠시 기다린 뒤 들어갔다.

 

"아는 것만큼 본다"고 하더니, 아는 것만큼 먹을 수밖에 없었다. 말도 통하지 않고 러시아 문자도 잘 몰라 슈퍼에서 기껏 산다는 게 눈에 보이는 비스킷 세 봉지와 한글로 된 맥스웰하우스 캔 커피, 그리고 생수 두 병을 샀다.

 

하얼빈에서 만날 김우종 선생님이 10년 전에 만났을 때 당신 부인이 비스킷을 좋아한다는 말이 생각나서 한 봉지는 선물로 드리려고 큰 봉지로 세 개를 샀다. 객차로 돌아오는데 꼭 내 집 카사와 빛깔도 모양새도 똑같은 고양이가 어슬렁어슬렁 거렸다. 카메라를 객차에 두고 온 게 후회가 되었다. 객차에 오르면서 매번 문을 열어주는 승무원에게 미안하여 비스킷 한 봉지를 드렸다.

 

9: 00, 객차에만 갇혀 있기가 무료해서 역 앞 거리의 고양이도 촬영할 겸 우수리스크 역 일대 아침 풍경도 구경하고자 객차에서 내리려고 하자 승무원들이 곧 열차가 떠날 거라며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들은 말이 통하지 않는데다가 어린이처럼 호기심이 많은 나를 물가의 풀어놓은 아이처럼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하기는 열차가 떠날 때 내가 자리에 없다면 어떻게 찾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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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 포브라니치나야 간 철도 언저리 풍경(2) ⓒ 박도

 

'세상은 넓다'

 

곧 출발한다는 열차는 두 시간이나 더 머문 뒤 10시 50분에야 움직였다. 출발할 때 보니까 내가 탄 객차 뒤에 한 량이 더 붙었다. 국경을 넘어 쑤이펀허로 가는 열차는 14~15량의 객차를 달고 달렸다. 열차가 출발하자 승무원이 그제야 화장실 문을 열어주면서 세면을 하라고 손짓을 했다.

 

나는 칫솔을 물고 세면대로 갔으나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객실의 생수로 입안을 헹궜다. 마침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세면대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손짓을 하자 그는 세면기 아래 쇠막대를 올려 물을 틀어주었다. 수도꼭지도 나라마다 다 틀렸다. 유럽 여러 나라를 돌면서 보니까 화장실 변기 물 내리는 것도 나라마다 다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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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근교 거리를 거닐고 있는 말 ⓒ 박도

사실, 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 행 열차를 탈 때는 장거리 여행이니까 으레 열차 내 식당 칸도 있을 것으로 여겼다. 영화나 다큐 같은 데서 보면 그랬다. 그런데 이 열차는 내 기대와는 달리 식당 칸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는 한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까지 줄곧 가는 게 아니라 도중에 세 번이나 앞 기관차가 바뀌는 열차노선인 데다가 장거리 손님은 거의 없기에 식당 칸을 달고 다니지 않는 듯했다. 그날 블라디보스토크~하얼빈 승객은 나 혼자뿐이었다.

 

텅 빈 객차지만 열차가 달릴 때는 지루하지 않았다. 드넓은 연해주 황무지 들판 지평선을 바라보는 경이감이랄까 즐거움이 있었다. 그새 황무지에는 들불을 놓아 까만 재로 뒤덮였는가 하면, 드문드문한 밀밭에서는 파릇파릇한 밀 싹들이 자라고 있었다. 차창 밖 좌우가 지평선으로 새삼 '세상은 넓다'라는 말을 실감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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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 포브라니치나야 간 철도 언저리 풍경(3) ⓒ 박도

 

'느림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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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 포브라니치나야 간 러시아 철도 간이역 ⓒ 박도

12: 15, 자그마한 시골 역을 지났다. 플랫폼에는 1인 역장이 열차비상 정지표를 들고 서 있었다.

 

열차는 단선으로 천천히 달렸다. 열차에 오른 지 그새 22시간이 지났지만 거리로는 삼분의 일도 이르지 못했다.

 

나는 '느림의 미학'을 마냥 즐기고 있다. 내 진작 바란 던 바였다. 이번 답사 여행은 육지 여정은 모두 열차로 이동토록 계획을 세웠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하얼빈, 하얼빈에서 다롄, 모두 항공로선이 있지만 굳이 알아보지도, 계획에 넣지도 않은 것은 안중근이 모두 열차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낯선 고장의 참 맛을 알려면 항공여행보다 기차나 버스 여행이 더 바람직하다. 블라디보스토크~하얼빈 행은 이틀 밤을 열차에서 자야하기에 이틀치 숙박비를 절약하는 이점도 있었다.

 

세상만사가 다 그렇지만 문명의 혜택이라는 것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잘 산다는 것, 출세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잘 살면서 너무 좋은 음식만 먹는 사람은 그게 오히려 성인병이 되어 생명을 단축하기도 한다.

 

벼락 출세하고는 높은 자리에서 뇌물 챙겨 먹다가 그게 얹혀서 고층건물이나 강물에 바다에 투신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가장 고위직인 대통령을 하고서도 직위를 이용해 뇌물 챙긴 게 부끄럽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대국민사과를 한 전직 대통령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일제강점기 때 이국 땅 영하의 감옥에서도 조국 광복을 꿈꾸며, 일본의 사냥개가 된 자에게 침을 뱉으며 행복을 누리는 지사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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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 포브라니치나야 간 철도 언저리 풍경(4) ⓒ 박도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 <절정>

 

시인은 극한 상황에서도 앞날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의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 경지를 어찌 감히 예사사람인 내가 알겠는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새 승무원이 오더니 곧 국경을 넘는다고 하면서 짐을 챙기고 여권을 준비하라고 했다. 그러고는 그는 각 객실의 의자 밑까지 훤히 다 드러내 세관원이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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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리스크 ~ 포브라니치나야 간 철도 언저리 풍경(5) ⓒ 박도

2010.10.12 14:38 ⓒ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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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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