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랖 넓은 시인의 두렛상, '울컥'

강현덕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안개는 그 상점에서 흘러 나왔다>

등록 2010.11.25 15:13수정 2010.11.25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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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덕의 시집 장정. <안개는 그 상점 안에서 흘러 나왔다> ⓒ 정용국

▲ 강현덕의 시집 장정. <안개는 그 상점 안에서 흘러 나왔다> ⓒ 정용국

진수성찬이다. 귀하고 얻기 어려운 재료로 만든 밥상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재료라 하더라도 그녀의 손길과 정갈함이 듬뿍 배어있는, 정성이 가득한 밥상이기 때문이리라. 강현덕 시인이 등단 15년 만에 두 번째 시집 <안개는 그 상점 안에서 흘러나왔다>(천년의시작)을 선보였다.

 

조금 느린 걸음인가 했더니 책이 묵직하다. 밥상으로 친다면 잡곡밥에 시래기 국, 간 고등어에 귀한 장조림까지 보인다. 한 귀퉁이엔 강된장에 호박 쌈도 올라 있다. 이런 공들인 밥상을 물리고 나니 후식으로는 달콤상큼한 샤베트가 따라 나와 깜짝 놀라게 한다.

 

강현덕 시인의 두렛상에 모인 이들을 살펴보자. 클매, 당고모, 언청이 삼촌, 외감 당숙, 텅 빈 어머니, 흙이 된 아버지가 정겹고 때론 아련한 얼굴로 와 계시다. 김종영, 배병우, 김승희, 김홍도, 멀리 스페인에서 피카소 선생과 슈베르트 아저씨도 오셨다. 불법 체류 외국인 노동자와 노숙자, 철거민, 로드킬 된 어린 노루와 외로운 십자매, 그리고 해미읍성 회화나무도 자리하고 있다. 우선 상차림과 손님에 즐거운 마음으로 수저를 들어보자.

 

평론가 이승희는 강현덕 시인의 시조에 대해 '자연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바탕에 깔려 있다'고 전제하면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시조 고유의 장르적 구속을 일탈하여 자유를 구사하되, 오히려 시조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작품은 시조와 현대시의 구분을 어렵게 할 정도의 자유스러운 호흡과 리듬을 가지고 있다.

 

형식에 관한 논의에 앞서 그녀의 시조는 하나같이 우리말에 대한 깊은 사랑을 바탕으로 삭막한 현실과 일상의 풍경 사이를 왕래하며 대상 세계의 의미를 새롭게 읽어내고 또 이를 소유하고자 한다. 그녀의 시조 한 복판에는 하나로 수렴되기 어려운 이미지의 풍경과 현존의 기억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중략- 그녀는 다양한 이미지를 생산하고 키워나가면서 시의 육체를 완성하고 주제를 육화시키는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평론가 이연승이 강현덕의 '시조 고유의 장르적 구속을 일탈' 하였다는 우려는 지나친 듯하다. 외려 '자유스러운 호흡' 으로 신선함을 주면서도 시조의 '대 자유 속 정형' 을 잘 극복하고 있는 모습이 신기할 따름이니 말이다.

 

2.

 

강현덕 시인은 2008년 한국시조작품상을 수상하며 오랜 만에 저력을 평가받았다. 수상작이었던 '동굴에서의 잠'은 심사위원이었던 유재영 선생의 극찬을 받은 작품이었다. 시상식에 참석했던 필자의 기억에는 '노숙자, 궁핍 등으로 연상되는 단어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완벽하게 노숙자의 상황을 뜨겁게 껴안고 있다'라는 심사평이 남아 있다.

 

동남쪽 바라다 뵈는 산비탈 동굴에서

한 석 달 꿈도 없는 겨울잠 자고 싶다

동굴은 너무 깊어서

몇 번이나 구부러지고

 

-중략-

 

서울역 깊은 동굴 거대한 방 귀퉁이

신문지에 둘둘 말린 잠들이 모여 있다

그 위를 더듬거리는

딱정벌레 몇 마리도

                                      - '동굴에서의 잠' 네 수중 첫째, 넷째 수

 

시인이 초대한 많은 손님들 중에는 시대적 버거움을 안고 버둥거리는 삶이  여럿 보인다. 시대와 불화하고 있는 이들은 우리들의 거울이자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붉은 비가 내린다'에서는 '내몽골 깊은 초원 걸어온 만삭의 여자'가 '등록증 없이 낳을 아이의 옷' 때문에 시인은 가슴이 아픈 것이고, '문없는 냉장고 속 환타'에는 '붉은 스프레이로 갈겨놓은 번지들이' '또다시 울컥' 하게 만드는 것이다. 세상에 걱정 없는 삶이 얼마나 있을까마는 시인이 보는 세상은 유난하게 질긴 어질머리와 흔들림으로 가득하다. 강현덕 시인의 오지랖은 참 넓고도 따듯하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주름

잡아보지 못했다

늘 나를 잘못 눌러

날 한 번 세워주지 않는 세상

 

오늘도 똑같은 형편

후줄근한

하루

                                               - '다림질' 두 수중 둘쨋 수

 

'우짜노, 꽃잎 널찌네/ 나도 아직 못 봤는데/ 그 위로 젖은 까치/ 종, 종, 종, 뛰온다야/ 니 온다 말 할라는 거 아이가?/ 창문 열어 볼란다야' 비온다고 안달이던 시인은 풀썩 주저앉아 '날 한 번 세워주지 않는 세상'이라며 '후줄근한 내 하루'를 한탄하고 있다. 속으로 시인의 엄살에 막 웃음이 터져 나온다. 마치 일인다역의 배우가 돌아설 때마다 얼굴을 바꾸는 놀라운 역할을 강현덕 시인의 시에서 읽는다.

 

그러나 내가 아는 시인은 우뚝하고  용감하다. 빛바랜 청바지에 말장화 질끈 신고 애마를 몰며 안산과 잠실의 간선도로를 질주하는 여장부이다. 이런 생활인의 속살이 시에 배여 눈물 가득하고, 가슴 뭉클하다가 불쑥 그녀의 용기에 뱃장도 생겨 어깃장도 부려보게 되는 것이리라. 결국 강현덕의 시는 우리의 삶 한 가운데 똬리를 틀고 앉은 심지 굳은 현장이다.

 

 3.

 

다시 들여다보면 강현덕의 시는 또한 여자의 시어로 가득하다. 여성만이 느끼고 간직할 수 있는 생리적 특성뿐만 아니라 자연과 사물에 보내는 눈길도 어머니의 그것처럼 포근하고 정겹다.

 

초이레

흰 달처럼

부푸는 그녀의 배

 

잘 여문

씨앗 하나

삼킨 것뿐이라는데

 

우주를

단박에 만드는

 

저 가벼운 産婦여!

                                             - '씨앗 하나' 전문

 

직설과 은유의 교묘한 설법이다. 여자만이 할 수 있는 자신에 찬 화법이다. 마치 하안거 마치고 난 눈빛 형형한 스님의 할과도 같다. 배시시 웃음이 나오다가 무릎을 치게 하는 화법에 남자는 그냥 할 말을 잃을 뿐이다.

 

시집 전체에는 '임신과 해산' 을 암시하는 단어와 말들이 여러 번 나온다. (만월)에서는 '만삭의 배를 내민 여자가 걸어오다 -중략- 여자는 건강한 양수를 조금씩 바다에 푼다' 이렇게 달과 여인을 읊어내고, (경상도) 에서도 '산달이 된 낙동강/ 소리도 없이 몸을 풀고' 라는 비장함으로 여인의 대역사를 그려내고  있다.

 

'어머니와 아줌마'로 대변되는 우리나라의 여성성(女性性)은 세계적으로도 그 유래를 찾기 힘든 막강화력을 가지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좁고 추우며 척박한 이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위대한 몸부림에 점수를 준다면  남자보다 여성에게 그 공을 돌려야 할 것이다.

 

강현덕 시인의 시가 건강하면서도 따스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바쁜 생활인의 일상에서 엮어낸 이 시집은 아주 푸근하고 정성 담긴 강현덕표 두렛상이다. 골고루 담아낸 접시를 비우며 달고 아릿한 맛에 벅차고 울컥한 마음 감출 수 없었다. 역시 시의 힘은 건강하고 정직함에서 비롯된다.

2010.11.25 15:13 ⓒ 2010 OhmyNews

안개는 그 상점 안에서 흘러나왔다

강현덕 지음,
천년의시작, 2010


#강현덕 #안개는 그 상점 안에서 흘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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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한국작가회의, 한국시조시인협회 사무총장.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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