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 사죄하는 마음, 한 풀어줄 수 있다면 기쁨

다문화가정에 외국인이란 편견 버려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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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숙(greenihs)등록 2010.12.08 18:51
   이시이미찌꼬 - 창신대 외래교수(관광 일본어과)
                 
     한국인에 사죄하는 마음, 한(恨)풀어줄 수 있다면 기쁨
     

"고교 일본국사 시간에 한국에 대해서는 아시아 단원에서 아주 조금만 언급될 뿐이었고, 단지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조그만 나라였다는 것. 세계지도에서도 한국의 위치조차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있을 정도로 한국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때만 해도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한국에 대해서 언급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나처럼 모르는 학생들이 더 많았다. 교회에서 한국에 대해 확실하게 알았는데 반일감정이 심하다는 것을 알고 그럴 수밖에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걸 알고 일본이 사죄하여 그 역사적인 감정이 풀리기를 바라는 사명감도 있었다."

한국에서 산 지 17년째인 미찌꼬씨(44. 창신대 관광일본어과 외래교수)에게 일본에 있을 때 한국에 대해 어떻게 배웠냐고 묻자 돌아온 답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한류 붐을 타고 한국사를 연구하는 모임도 있고, 한국이 많이 알려졌지만, 미찌꼬씨가 학교다닐 때만 해도 한국에 대해 아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고.

그런 사실을 알고 한국에 왔고, 반일감정으로 인해 힘들 수도 있겠다는 각오도 했었다. 자신보다 먼저 한국에 와서 살던 선배로부터 반일감정으로 힘들었다는 얘기도 들었던 터였다. 그런데 1993년도에 처음 왔을 때는 이미 한일동맹 관계였고, 생각보다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힘들지는 않았다. 다만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 언어소통이 안 된다는 게 문제였는데, 일본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한국의 관공서에서는 영어가 통하겠지 싶어서 영어로 말해도 거의 못 알아들었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이 공공장소에서 질서를 지키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힘든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친절한 사람들도 많았다. 지리를 잘 몰라 헤맬 때 직접 그녀의 목적지까지 같이 가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아이를 데리고 차를 타면 자리를 양보해주기도 했다.

     외래교수, 대학원 박사과정, 심리상담 자원봉사, 다섯 자녀 엄마
       임진왜란 때 일본에 잡혀간 도자기공들 묘지 참배하기도

그녀는 하루 24시간이 빠듯하다. 현재 외래교수로 있으면서 경상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일본문학)을 밟고 있다. 일본에서 대학다닐 때의 전공은 영문학이다. 하지만 한국에 와서 한국문화와 일본문화를 더 잘 알고 싶어 방송대에 편입해서 일본학과를 공부하기도 했다.
박사과정에서 전쟁문학을 많이 다루는데, 중국이나 필리핀 사람들에 대해서도 사죄하는 마음이 있다. 일본인으로서 한국에 와서 살고 있는 입장이지만, 일본을 좀 더 정확하게 알고 한국에서 자신의 전문분야를 살리고 그와 동시에 공부를 하면서 한국에 대해서도 보다 심도 있게 알기 위해서다. 그래서 일본과 한국에서 청산하지 못한 역사가 있다면 자신이 조금이라도 마음으로나마 사죄를 하고 싶고, 그래서 한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한(恨)의 정서가 풀어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기쁜 일이다. 창원 문화원에서 주최하는 다물 대학교가 있는데, 역사를 알기위해 공부도 하고 답사도 한다. 그곳에서 학기말에 일본답사를 다녀온 적이 있다. 임진왜란 때 도자기공들이 일본으로 잡혀가 기술을 전수해 주었는데, 사가현에 있는 그들의 묘지에서 참배하기도 했다. 일본에는 다도가 유명한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을 일으키면서도 다도문화를 계승시켰는데 도자기에 공을 들였다. 일본인의 도자기기술은 조선인들의 기술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지금의 일본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도자기는 거의가 그때의 조선인들의 기술이다. 아직도 조선인의 후예가 살고 있는데, 한국말은 못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은 한국인이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에서 한국인의 우수한 기술과 정신을 보니,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다. 진심으로 한국과 한국인들에게 사죄하는 마음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녀는 신월중학교에서 심리상담사 자원봉사도 하고 있다. 아이들 심리상담을 하면서 정말 안타까운 것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사랑을 준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주고 있었다. 즉 따뜻한 관심과 사랑보다는 공부쪽으로만 아이들을 몰아가니 역설적이게도 아이들은 애정결핍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는 아침부터 바쁘다. 다섯 명의 아이들(중2~ 5세까지)을 중학교, 초등학교, 유치원 보내느라 무척 부산스럽다. 그러고 나서 자신의 일을 시작한다. 아이들 키우기 힘들지 않냐고 묻자, 힘든 것도 있지만 기쁨이 더 커단다. 물론 다섯 명을 키우다보니 경제적으로 힘든 것도 있다. 옷은 물려받아 입히기도 하고, 학원은 거의 보내지 않는다. 아이들이 스스로 교재보고 공부하거나 주로 책을 많이 읽어서 어느 정도 자기 주도적으로 하는 편이다.

               임신 및 출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
불임으로 고통받는 이들 위해, 자신의 아이를 양자로 줄까 고민하기도

그녀가 한국에 오게 된 것은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를 통해서 한국남자와 결혼을 하면서부터다. 세계 167개국에서 3만쌍이 합동 결혼을 했는데, 그녀도 그 중의 한 명이었고, 사진 한 장 보고 현재 남편과 결혼을 했다. 모르는 사람이지만 교회에서 주선해주는 사람이라 맞을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 바로 부부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떨어져 살면서 3년 동안 만남을 가졌는데 그때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래도 맞춰살려고 노력했고, 지금은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다.

그녀의 부모님은 불교신자인데, 그녀의 언니가 통일교를 믿으면서 그녀도 전도되었단다. 지금의 가정은 독실한 신자로서 교회의 말씀을 실천하면서 사는 결과다. 지구의 모든 종교를 하나로 묶어서 모든 이들이 행복하자는 것, 또한 남을 위하여 살면 모두가 행복해진다는 것이 교회가 추구하는 진리고 그것을 신념처럼 믿고 산다. 교회에서는 아이를 많이 낳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그녀는 7명까지 낳으려고 했다. 불임으로 고통 받는 부부들에게 자신이 아이를 낳아서 양자로 보낼까도 생각했다.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이기 때문이다. 그 축복을 다른 이에게 나눠 주는 의미이다. 그런데 막상 아이를 낳고 보니 차마 보낼 수가 없었다. 더러 자신에게 아이를 달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그녀의 시누이에게는 아이가 없어서 딸 한 명을 양자로 입양하기를 원했지만 차마 보낼 수가 없었다.

                 아들 낳기 위해 온갖 정성 기울여

결혼 후 시댁에 처음 갔을 때가 95년도 정도 되었는데, 그때 시댁에는 tv와 세탁기도 없었다. 아무리 시골이라지만 너무나 가난한 현실 앞에 아연실색하기도 했다. 그녀의 남편은 전북 진안이 고향으로 장손이다. 그래서 아들은 반드시 있어야했기 때문에 지극정성을 들여서 아들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이를테면 남아만 많이 낳은 여자의 속옷을 얻는다든지, 홀수 날이 좋다고 하여 몸을 정성스럽게 한 뒤 했고, 하고 난 후에도 몸을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방법도 실천하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도 했다. 그런 정성을 기울인 덕분인지 다행히 셋째는 아들이었다.

요즈음 한국은 저출산이라 여러 대책들이 나오는데, 일시적인 대책보다는 장기적으로 대책을 마련해준다면 저출산 문제는 해결되리라 본다. 창원시에 사는 그녀가 다둥이로 혜택보는 것은 유치원비만 보조를 받을 뿐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더러 많은 혜택을 받는 걸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이는 많을수록 좋다는 게 그녀의 지론이다.

덧붙이는 글 | 창원의 지역신문인 중앙신문에 게재


덧붙이는 글 창원의 지역신문인 중앙신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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