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모래시계를 뒤집기 전에

등록 2010.12.30 11:55수정 2010.12.30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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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다 빠져나갔네!"

 

시계 속의 모래. 1년 전에 키가 큰 모래시계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내 키만하게 만들어 위, 아래 부분의 크기, 중간의 잘록한 허리와 모래의 크기, 그리고 모래의 양을 잘 조절하여8,760시간 동안 모래가 흘러내리도록 세워두었는데 벌써 다 빠져나갔습니다.

 

해시계, 물시계, 아날로그, 디지털. 시대에 따라 시계의 모습이 달라지고 인간의 수명이 줄어들었다 길어지긴 했지만 그것이 삶과 죽음이라는 인생의 대 명제까지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17세기의 이탈리아 시인 조반 레오네 셈프로니오가 "시계 전시회"에서 읊었던 내용은 오늘도 유효하여 뱀처럼 똬리를 틀고 앉았던 시간은 죽음의 시간을 기록하고 인간의 머리카락을 은빛으로 물들이고 그 얼굴에 골을 파 놓습니다.

 

그러나 모래들이 빠져나간 그 텅 빈 모래시계의 윗부분에 그 시간의 열매로 무엇인가 채워져 있다면 은빛 머리와 골 깊은 얼굴에도 미소가 내려앉을 것입니다.

 

돈과 명예가 중요한 이들은 그 돈과 명예로, 가족과 친구가 중요한 이들은 그들의 이름으로, 예술가들은 자신의 만족스런 작품으로, 선행이 중요한 이들은 나눔과 돌봄의 열매로, 도덕적이고 내적인 만족을 찾는 이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가 모래가 빠져나간 바로 그 공간에 두 다리를 척 걸치고 앉아 당신을 바라보는 시간. 지금은 바로 한 해의 그 마지막 시간입니다.

 

만약 단 열매로 가득해야 할 그 곳이 텅 빈 채로 당신을 노려보고 있다면 당신은 지금 아마 이렇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바퀴처럼 굴러가는 시간이란 그저 끼니를 얻기 위해 밤낮없이 사람을 몰아가고 지혜의 나날들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모른 채 허비한 고단한 나날일 뿐이라고. 이제서야 또 하나의 작은 부분을 전부인 것처럼 자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 때를 위해 나의 모래 시계를 만들었습니다. 불행을 느끼게 하는 내가 다 알 수 없는 그 큰 괴물에게 잡아 먹히지 않기 위해, 나의 의지나 나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이 굴러가는 바퀴 같은 시계가 아니라 내가 뒤집어야 다시 흘러가는 나의 모래 시계를.

이제 곧 그 시계를 척, 뒤집어 세워놓아야 합니다. 그러면 모래 시간으로 가득 찬 새 시계가 나를 미소 짓게 할 것입니다.

 

그 모래 시계를 다시 세우기 전에 흘러내리는 모래 속으로 보내고 싶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바로 지난해 이즈음에 써 놓았던 기록을 찾아 읽습니다.

 

찔리면 여전히 짜릿하게 아픈 양심과 찌르고 돌아서 더러 후회스러운 칼, 바로 오늘 뜨겁게 발열하는 몸살, 섣불리 다가서지 않는 지혜, 멀리서도 껴안을 수 있는 품, 미소가 눈물보다 서러운 우주.

 

올해는 여기에 하나를 더합니다. 초롱 하니 맑은 어린아이의 눈빛. 나이 든다는 것은 천진과 순수를 잃어가는 자리에 지혜와 용납을 배워가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세월에 얹혀 노인의 혜안을 얻고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아이의 눈빛을 잃고 싶지도 않습니다. 지겹도록 입어도 남루해지지 않는 스웨터와 낡았다고 버리지 않아도 되는 신발처럼 간직하고 싶은 창세의 별. 반짝이는 그 눈빛을.

 

벽에 새 달력을 걸어야 하는 번거로움은 시간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 의미가 있습니다. 시간을 만든 분이 있고 시간의 중심에 서 보고자 하는 사람이 있고 시간을 초월하고 싶은 사람이 있고 시간에 매인 사람이 있고 시간을 붙들려는 사람이 있고 시간에게 외면 당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시간 속에 있는 사람이건 내가 시간을 갖고 있는 한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과 더불어 살아가는 겸손함으로 내가 다시 뒤집어 세울 수 있는 작은 모래 시계가 적어도 내 손안에 있는 한 인간은 복잡하게 얽힌 관계와 시계 바퀴들 속에서도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시간은 백 년 만에 애틀랜타에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만들었습니다. 모든 허물을 덮고 모든 경계를 허물며. 이제는 나의 모래 시계가 그 위에 봄을 만들 차례입니다.

댓싱 뜨루 더 스프링!(Dashing through the spring!) 징글벨을 울리며 척!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중앙일보 애틀랜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12.30 11:55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중앙일보 애틀랜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모래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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