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체 없는 살인사건'...1심, 징역 7년→항소심, 무죄

대구고법 "유죄 의심가도, 증거 부족하면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판단해야'

등록 2011.02.17 12:03수정 2011.02.17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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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이 이례적인 '시체 없는 살인사건'에 대해 동거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30대에게 1심은 유죄로 판단해 징역 7년을 선고했으나, 항소심은 이를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이번 판결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명확한 증거가 없다면 설령 피고인에게 유죄의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는 '의심스러울 때에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라는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을 확인한 사건이다.

A(33)씨는 2004년 12월 커피배달을 하던 B(여,21)씨를 만나 사귀다, 이듬해 1월부터 대구 남구 봉덕동 B씨의 원룸빌라 201호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그런데 A씨는 2005년 1월 22일 친구들과 술을 마시다가 다음날 새벽 1시경 노래방으로 가 B씨와 통화하면서 오라고 했는데, 거절당하자 화가 난 A씨는 새벽 2시30분경 친구들과 헤어진 후 빌라로 귀가해 B씨와 다시 짧게 통화한 뒤 잠을 잤다.

다방을 그만두고 칵테일바에서 일하던 B씨는 술에 취한 탓에 직장동료인 N씨가 1월 23일 새벽 4시경 남자친구가 운전하는 차로 B씨의 빌라 앞까지 데려다 줬는데, B씨가 엉엉 울기에 한동안 달랜 다음 집안까지 들어갔다. 집안에는 술에 취한 A씨가 나체 상태로 자고 있었다.

23일 오후 4시경 A씨는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B씨의 태도에 화가 나 자신의 옷가지를 챙겨 본가로 간 뒤, 다음날 다시 들러 자신의 나머지 짐을 챙겨서 나왔고, 그 이후부터는 본가에서만 살았다.

그런데 B씨와 며칠 동안 연락이 안 되자 N씨는 1월 26일 A씨와 함께 B씨의 집에 찾아갔는데 B씨는 집에 없었고, 이틀 뒤에도 집에 없어 1월 28일 대구남부경찰서에 B씨가 1월 23일 새벽 4시경 집에 들어간 후 연락이 되지 않는 등 소재 불명이라는 이유로 가출신고를 했다.


이에 A씨는 B씨에 대한 실종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부상했고, 1월 31일부터 경찰 수사를 받던 중인 2005년 4월 13일 중국으로 출국했다가 지난해 3월 귀국해 수사기관에 자진 출석해 범행을 부인했다.

B씨는 2005년 1월 23일 이후 6년이 지난 현재까지 가족에게 연락을 하거나 나타난 적이 없고, 국민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진료를 받은 적이 없으며, 은행계좌에서 예금을 입출금한 적도 없다. 또한 B씨의 시체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B씨의 원룸빌라 앞집에 살던 K씨는 수사기관에서 "새벽 4시경 우는 소리에 잠이 깨어 창문을 내다보니 한 여자가 울고 한 여자는 달래고 있다가 두 여자가 201호로 들어가더니 한 여자가 나왔다. 이후 약 2시간 동안 여자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리고, 남자가 욕설을 하며 뺨을 때리는지 찰싹찰싹하는 소리도 나고, 무언가를 벽에다 부딪히는 것처럼 둔탁한 쿵쿵 소리가 들렸다"고 진술했다.

B씨의 옆집에 살던 부부도 "새벽 5시경 201호에서 남자가 여자에게 욕설을 하며 고함을 지르고, 벽에 무언가 쿵쿵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여자의 비명소리와 울음소리가 들렸고, 아침 7시까지 그런 소리가 지속돼 혹시 저러다가 사람 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에 신고를 할지 고민했으나, 괜히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 같아 신고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그러자 검찰은 "B씨가 집에 들어오는 소리에 잠이 깬 A씨가 노래방으로 와줄 것을 요청했음에도 오지 않고 오히려 술에 취해 늦게 들어왔다는 이유로 욕설을 하며 다툼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B씨의 머리를 벽에 찧는 등의 방법으로 살해한 뒤,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사체를 들고나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유기했다"며 기소했다.

◆ 1심 "사체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범행 사실 인정돼 징역 7년"

1심인 대구지법은 지난해 9월 살인과 사체유기 혐의로 기소된 A씨에게 비록 사체를 발견하지 못한 사건이지만 유죄로 판단해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먼저 "피해자 이웃들의 진술 등을 종합하면 피해자가 들어오는 소리에 잠에서 깬 피고인이 피해자가 술에 취해 늦게 들어왔다는 이유로 격분해 욕설을 하고 2시간에 걸쳐 피해자의 신체를 벽에 부딪히는 등의 방법으로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하고, 사체를 알 수 없는 방법과 장소에 유기한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어 "만약 피해자가 살아있다면 새벽에 귀가한 이후 갑작스럽게 연락이 두절되고 그로부터 6년이 넘게 지난 현재까지 행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상태로 지낸다는 것은 경험칙상 있기 어려운 일이고, 피해자가 그와 같이 행동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이런 사정에다가 피고인이 사건 당일 피해자를 폭행해 해를 입혔음이 분명함에도 이를 부인하면서 오히려 새벽에 피해자가 집에 들어온 것을 보지 못했다고 변명하는 점까지 보태 보면, 피해자의 사체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피해자가 자신의 집안에서 사망한 사실은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이 증명됐다고 보는 것이 상당하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연락이 되지 않는 A씨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루 만에 자신의 짐을 챙겨 B씨의 집에서 나가버린 것은 B씨가 이미 사망한 사실을 알고 있기에 자신이 의심받지 않을 방안을 강구하는 와중에 하게 된 행동이라고 판단했고, 또 당시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 수사를 받던 중에 중국으로 도망간 점 등을 종합해 유죄 판단의 근거로 삼았다.

◆ 항소심 "무죄…유죄 의심가도, 증거 없다면 피고인 이익으로 판단해야"

하지만 항소심의 판단을 달랐다. 대구고법 제1형사부(재판장 임성근 부장판사)는 16일 '시체 없는 살인사건'의 피의자로 기소된 A(33)씨에 대한 항소심에서 징역 7년을 선고한 1심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먼저 "무릇 형사재판에서 유죄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공소사실이 진실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증거에 의해야 하므로, 피고인의 변소가 불합리해 거짓말 같다고 해도 그것 때문에 피고인을 불리하게 할 수 없고, 이와 같은 증명력을 가진 증거가 없다면 설령 피고인에게 유죄의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이 사건에서 피해자가 6년 넘는 현재까지도 실종 상태에 있다는 점에 비춰 보면, 피해자가 이미 사망했을 개연성이 매우 크기는 하나, 검사가 제출한 모든 증거를 종합해 보더라도 피해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기에는 부족하다"고 덧붙였다.

◆ 혈흔 등 범행 흔적 발견되지 않아…사건 후 피고인 행동도 이해 돼

재판부는 무죄로 판단한 배경을 조목조목 설명했다. 먼저 이웃사람들의 진술에 대해 재판부는 "B씨의 집에서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는 이웃주민들의 진술은 B씨가 혼자서 우는 울음소리와 쿵쿵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과 결합해 B씨의 집에서 남녀가 싸우는 소리를 들었다고 추측하거나 과장해 진술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더구나 201호에 벽이나 바닥에서 피고인이 B씨의 머리를 잡고서 찧었다는 것을 뒷받침할 만한 B씨의 혈흔이나 그 밖의 객관적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만약 피고인이 B씨의 머리를 잡고서 방문 유리에 계속 찧음으로써 B씨를 살해하거나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면, 방문 유리가 깨지거나 금이 가는 등의 흔적이 남았을 가능성이 큰데도, 방문 유리에는 그와 같은 흔적이 없다는 점을 주목했다.

또 "방문 유리와 안방 침대 이불 위에서 발견된 B씨의 혈흔은 지름이 1mm도 안 되는 극히 소량이었고, 피고인의 신발에서 발견된 B씨의 혈흔도 육안으로 확인이 어려울 정도의 극히 소량이어서, 피고인이 B씨의 머리를 잡고서 벽에 계속 찧음으로써 살해하거나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것을 뒷받침하기에는 혈흔의 양이 너무 적을 뿐만 아니라, 사건 당일 B씨가 귀가할 때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으므로 201호나 피고인의 신발에서 발견된 B씨의 혈흔은 그로 인해 생긴 것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피고인이 B씨를 살해한 뒤 자신의 승용차나 어머니의 승용차를 이용해 사체를 운반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두 승용차에 대한 감식을 실시했으나, B씨의 혈흔 등 어떠한 범행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다.

A씨가 자신의 짐을 옮긴 것과 관련해, 재판부는 "피고인은 'B씨가 술자리에 오기로 약속하고도 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연락도 되지 않아 화가 나 짐을 가지고 나온 것'이라고 진술했는데, 피고인이 B씨와 동거한 기간이 2주에 불과한 점, B씨의 직업과 동거 경위 등에 비춰 볼 때 짐을 옮긴 행동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이어 "오히려 범행을 저질렀다면 범행 후 곧바로 201호에서 자신의 물건을 챙겨서 본가로 나오는 행동을 했다는 것은 선뜻 납득하기 어렵고, 공소사실에 의하면 피고인은 사체를 주도면밀하고 완벽하게 유기할 정도로 지능적이고 계획적인데, 그런 피고인이 범행으로 의심받기 쉬운 행동을 섣부르게 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며 1심 판단과 달리 봤다.

A씨는 B씨의 실종사건 용의자로 수사를 받았는데, 수사를 받던 중인 2005년 4월 13일 중국으로 출국했다가 지난해 3월 1일 귀국해 수사기관에 자진 출석한 것에 대해 "범인으로 몰리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이 지나서 실종된 B씨가 나타나면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다고 생각해 중국으로 간 것"이라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피고인이 중형이 예상되는 범행을 저질렀다면, 여권기간이 만료됐더라도 중국에 계속 불법체류할 수도 있었는데, 귀국해 수사기관에 자진출석한 점에 비춰 보면,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음에도 유력한 용의자로 계속 수사 받고 있었고, 자신의 결백을 밝힐 뚜렷한 방법도 없었기 때문에 이를 모면하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는 피고인의 주장도 전혀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므로, 수사 받던 중 중국으로 갔다는 사정이 반드시 공소사실을 뒷받침한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A씨의 주장을 수긍했다.

사체유기와 관련, 재판부는 "피고인과 B씨가 동거했던 빌라는 폭 8.5m의 도로변에 위치해 있고, 1층에는 주차장 시설이 돼 있어 외부에 쉽게 노출돼 있는 곳인 점에 비춰 볼 때 만일 피고인이 B씨의 사체를 온전한 채로 유기했다면 사체의 운반수단이나 다른 사람의 협조 없이는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며 "그런데 피고인이나 어머니의 승용차에 대한 감식결과 아무런 범죄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고, 더구나 피고인이 사체를 훼손해 유기했다고 인정할 만한 아무런 증거도 없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피고인이 피해자를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공소사실과 사체를 유기했다는 공소사실 역시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됐다고 보기에 부족함에도, 원심은 이와 달리 폭행치사와 사체유기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한 것은 사실을 오인해 판결에 영향을 미친 잘못이 있어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시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법률전문 인터넷신문 [로이슈](www.lawissue.co.kr)에도 실렸습니다.
#살인사건 #형사소송법 #대구고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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