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날, 나를 찾아서.

인간이란. 천국에 들어가기엔 너무 민망하고, 지옥에 떨어지기엔 너무 억울한 존재들이다

검토 완료

허관(hkw0210)등록 2011.05.10 11:10
5월의 날들은 빠르다.꽃이 피는가 싶으면 지고, 어린이날인가 싶으면 어버이날이다. 5월에 오신 부처님 반갑고 화려하게 맞이해야 하고, 결혼식도 한두 군데는 다녀야한다.(선생님 안부는? 글쎄 오래전에 잊은 듯.)  한껏 멋을 부린 꽃을 여유롭게 쳐다볼 시간초자 없어, 꽃에게 미안한 계절이다. 나를 잃어버리기에 딱 알맞은 계절이다. 특히 필자처럼 40대 남자라면 말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진정 나인가. 나는 내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5월의 밤이다. 가족, 직장, 친구 등 주변은 나의 몸뚱이를 내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내 머릿속에 든 지식은 나의 본성을 누르고 있다.

어린이날도 지나고, 어버이날도 지났다. 내일(5월 10일)이면 부처님오신날이다. 불교는 신앙이 아니다. 즉 우러러 모시는 상이 없다. 절대자가 없다. 진리를 찾는 종교라서 그렇다고 한다. 진리는 깨달음으로도 해석된다. 모두가 부처라고 했다. 다만, 인간의 이성에 가려 그 부처를 찾지 못할 뿐. 이따금 천진난만한 갓난아기의 얼굴이 부처님의 얼굴과 매칭 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갓난아기가 되고자 성철스님은 8년 동안 눕지 않고, 화두참선을 한 것일까. 그럴 수 도. 필자는 불교에 대한 문외한이니 잘 모르겠다.

나는 누구인가란 씨줄을 다시 잡아보자. 불교에서는 부처라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다윈은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은 짐승이라 하고, 리처드 도킨슨은 인간이란 물건은 유전자들이 자신의 편리를 위해 지은 구조물에 불과하다고 정의했다. 모두 옳은 것 같다.

쇼펜하우어는 칠십 평생 자신의 주변 사람들의 슬픔을 하느님에게 낱낱이 보고했다. 그리고 행복을 달라고 간청했건만, 하느님이 한마디도 없자. 자신의 아들을 어떻게 그렇게 방치할 수 있냐고 반문하면서, 니체는 찬란한 지적 언변으로, 신을 죽였다.

르네상스 이후 인류는 신으로부터의 도망가기에 바빴다. 너무나 암울했던 중세의 기억들로부터 도망하고자 인류는 찬란한 지적 문화를 꽃피웠다. 인간이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박테리아에서 진화한 동물임을 끈질긴 탐구 끝에 밝혀냈고,(즉 인류의 친 부모인 박테리아를 찾았다.) 예수보다 더 똑똑하고 앞선, 선지자인 자라투스트라가 탄생하자, 예수를 자신의 고향인 하늘나라로 돌려보내려고 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잠재의식을 해석하여, 불안은 각자가 간직한 것이지 결코 신이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했고, 토인비는 수 천 년의 역사를 되돌아가 신앙의 미명하에 만들어진 문화유산을,  신에게서 빼앗아 인류에게 돌려주었다.

중생을 구원하고자. "無限靑山行慾盡(끝없는 청산은 끝나가려 하는데) 白雲深處老僧多(흰구름 깊은 곳에 노승도 많더라)"라고 읊은 어느 스님처럼 산골짜기마다 불경소리 끊이지 않았지만, 오히려 점점 중생의 불행은 깊어지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외쳐대지만, 이승에 있는 사람 어느 누구도 지옥에 다녀온 사람이 없으니 이 또한 공염불에 불과했다.

하지만, 인간의 지적 탐구는 우주탄생의 순간까지, 생물의 기초단계인 염색체까지 모두 밝혀냈음에도, 아직도 도시의 밤풍경에는 십자가가 제일 많고, 산 좋고 물 맑은 명당자리마다 욕심을 비워라 비워라 하던 부처가 떡하니 앉아있으니, 이 또한 무슨 조화던가.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발칙한 소설가 박민규에 의하면 "인간이란. 천국에 들어가기엔 너무 민망하고, 지옥에 떨어지기엔 너무 억울한 존재들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이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신과 악마 사이에 끼어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보잘것없는 존재 인 것이다.

르네상스이후 400여 년 동안 신으로부터 도망했지만, 인류는 아직 부처님 손바닥에 있다. '구원의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지 선악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외치며 악마인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고 온갖 악행을 저지른 파우스트에게도, 인간이 만든 정의의 틀에서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파우스트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내민 신이 아니던가.

니체도 신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인류사에 있어 신이란 니체가 죽일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죽음은 삶의 전제로 한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듯이 말이다. 신은 삶과 죽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또한, 다윈으로부터 시작하여 도킨스를 거쳐 생명의 근원을 완벽하게 해석한, 즉 유전자 지도를 작성한 프랜시스 S, 콜린스는 신의 언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유전자는 누가 만들었나."

그렇다면 빅뱅 이전의 우주는 누가 만들었나와 맥락을 같이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다시 이천년 전, 머나먼 과거로 돌아간다. 실존주의 시대를 지나 르네상스를 지나 암흑의 중세를 지나, 하느님의 아들이 탄생한 그 순간으로.

그렇다. 이천년 세월도 의미 없다. 절대 되돌아 보지마라. 5월의 시간은 빠르고, 인생은 유한하다. 그렇다고 하여 인생이란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알렉산드로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처럼 거친 노동을 하면서, 때론 사뮈엘 베케트처럼 누군가를 끝없이 기다리며,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거친 노동을 하면서, 누군가를 끝없이 기다리며 그렇게 살다가, 가끔은 아주 가끔은 한번 쯤 나를 찾으면, 그때 인생을 느끼는 것이다. 인생을 느끼는 그 가끔의 기회가 왔다. 인류의 어른이신 부처님이 탄생한 날. "너 자신이 부처다."는 곧 "너 자신이 인류의 어른이시다"와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내일 하루만이라도 모든 종파를 떠나 "나"를 한번쯤 생각해 보는 날이 되었으면, 그리하여,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나의 소중함을 깨달아, 가끔 삶이 자신을 속일지라도, 휘둘리지 말고, 의연해 질수 있는 힘을 얻었으면,

부처님 오신날을 맞이하여 모든 것을 용서하고, 하루 쯤은 모두가 부처가 되기를 빌어본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