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서기에 끌려간 아버지, 영영 이별이었다

[강제동원의 현장 사할린①] 66년만에 부르는 류연상씨의 사망부가(思亡父歌)

등록 2011.10.12 17:33수정 2011.10.13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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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년 만에 아버지의 묘를 찾은 류연상씨. ⓒ 권기봉


풀로 무성한 봉분 앞에 선 한 남자의 볼을 따라 뜨거운 눈물이 하염 없이 흘러 내렸다. 비석을 부여잡은 채 연방 "아버지! 아버지!"를 부르며 흐느끼던 69세 노인의 거친 손은 오랜 시간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통곡한 지 30여 분... 힘겹게 마음을 가다듬은 그와 처, 그리고 그의 어머니이자 묘주의 아내는 준비해온 제물을 차리고 절을 올렸다. 66년 만의 만남이었다.

두살배기 아들 두고 사할린 간 아버지, 영영 이별이었다

류연상씨가 아버지 고 류흥준씨와 작별한 것은 그의 나이 고작 2살 때였다. 해방 6개월여 전인 지난 1945년 2월, 사흘 뒤 돌아온다던 아버지는 그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그땐 집이 전북 완주군에 있었어요. 어머니 말씀이, 명절끝이라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면서기가 찾아왔다고 그래요. 신체검사를 받아야 한다며 데리고 갔다는데, 어머니는 그때 옷이라도 따뜻하게 입혀 보내지 못한 걸 지금까지도 안타까워 하세요."

당시 24살이던 고 류흥준씨가 처와 2살배기 외아들을 남기고 끌려간 곳은 일본인들이 가라후토(樺太)라 부르던 지금의 러시아 사할린 섬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섬의 절반, 즉 북위 50도선 이남 지역을 지배하게 된 일본은 석탄 채굴과 벌목 등에 필요한 노동력을 연인원 15만 명에 이르는 '조선인 강제동원'을 통해 충원하고 있었다.

너무 어린 시절이었기에 아버지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류연상씨에게 가장이 없는 어린 시절은 그야말로 기억하기 싫은 순간이었다.

"나도 우리 아버지만 한 번 찾아 봐라... 나도 아버지 찾으면 너희들처럼... 지금은 너무 늦게 찾아 어린 시절 친구들에게 보여줄 수는 없는데, 어릴 때 아버지가 옆에 계시지 않는다는 게 한처럼 가슴 한복판에 응어리져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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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으로 살다 세상을 뜬 아버지의 묘를 만들고 보살펴준 이들 역시 일제에 의해 사할린으로 끌려온 조선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이었다. ⓒ 권기봉


그러나 오랜 기간... 망자와는 관련이 없는 미소 대결의 시대, 소련에 속한 사할린은 오고 싶어도 쉽게 올 수 없는 곳이었다. 결국 류씨 가족이 아버지를 찾아 사할린을 처음 찾은 것은 지난 2007년. 그러나 아버지는커녕 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사할린 현지에는 물론 재외국민을 보듬어야 할 우리 정부도 변변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코르사코프 공동묘지를 막무가내식일지언정 헤집고 다니는 방법 밖에 없었다.

"2007년 8월 14일에 처음 사할린에 올 수 있었어요. 정보라곤 아무 것도 없었지만 아버지 묘가 코르사코프 공동묘지에 있다는 소식은 들어 알고 있었는데 묘지가 워낙 넓어서... 그렇게 나흘을 헤맸지만 결국엔 찾지 못했어요. 자식된 도리도 제대로 못하니 이런 자식 있으면 뭐하나 싶을 정도로 얼마나 서럽고 허망하던지..."

그러던 차에 희망 섞인 소식이 들려왔다. 코르사코프에 적을 두고 활동하는, 역시 강제동원 피해자의 후손인 이태준 한인디아스포라협회 회장이 류씨의 사연을 듣고 코르사코프 공동묘지 전체를 일일이 조사하던 차에 류흥준씨의 묘를 발견한 것이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고 필연이라면 필연이지만, 망자에게든 유족에게든 야속하기만한 세월임에는 틀림 없다.

죽도록 고생만 했는데... 나라는 무엇합니까

결국 그런 우여곡절 끝에 4년 만에 다시 사할린을 찾은 류씨는 자신은 기적을 만났지만, 그 자신만 이렇게 개인적으로 아버지의 묘를 찾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고 말한다.

"제 아버지가 비록 독립운동을 한 국가유공자는 아니지만, 나라가 없어 고생하던 시절 억울하게 끌려와 죽도록 고생만 한 분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 하더라도 지금이라도 정부가 나서서 당시에 강제로 끌려온 이들을 위한 유골 봉환이나 위령사업 등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우리 정부의 최소한의 책임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머니도 벌써 여든 일곱이셔서 언제고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니 너무 안타까울 뿐이에요."

류흥준씨의 처이자 류연상씨의 어머니인 라준금(1925년생)씨 역시 "살아 생전엔 함께 한 시간은 거의 없었다고 할 정도지만, 죽어서라도 함께 묻히는 게 꿈이라면 꿈이에요. 이거 보려고 아흔 가까이 살았나 싶어요"라며, 굳게 오무렸던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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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으로 끌려온 조선 젊은이들이 해방 뒤 조선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몰려들었다는 코르사코프 항구. 그러나 그들을 데려다 줄 배는 오지 않았다. ⓒ 권기봉


66년 만에 남편이자 아버지, 그리고 시아버지의 묘를 벌초한 류씨 가족이 '망향의 언덕' 위에 섰다. 코르사코프는 사할린 남부에 위치한 도시로 제국주의 시절에는 일본과의 연락항으로 기능했던 도시이다. 그 항구는 또한 일제 패망 직후 조선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귀향선을 타기 위해 몰려 들었던 곳이기도 한데, 배라는 배는 일본인만 태울 뿐 조선인은 버려두고 떠날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류흥준씨를 비롯한 조선인들은 일말의 희망을 안고 이 항구를 찾았지만, 귀향선은 결코 오지 않았다.

고 류흥준씨의 묘에서 차량으로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망향의 언덕... 남편의 묘 앞에서조차 전혀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던 망자의 처 라준금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진 것은 바로 이 언덕에 이르러서였다. 언뜻 아득하기만 한 저 바다, 그 건너에는 바로 '고향'이 있었다.

덧붙이는 글 | 권기봉 기자는 지난 8월 13일부터 9월 7일까지 26일 동안 러시아 사할린에 다녀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권기봉 기자는 지난 8월 13일부터 9월 7일까지 26일 동안 러시아 사할린에 다녀왔습니다.
#사할린 #강제동원 #강제징용 #화태 #류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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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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