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몰락 예고한 'YS 제명 사건' 아십니까?

[정운현의 역사 에세이 37] 통합진보당 이석기·김재연 의원 제명, 말처럼 쉽지 않을 것

등록 2012.06.08 12:38수정 2012.06.0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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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이 1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국회의장 및 부의장 후보자 선출을 위한 의원총회에서 의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 남소연


19대 국회가 채 개원도 하기 전에 '종북 좌파' 국회의원 2명의 제명 건을 놓고 소란스럽습니다. 새누리당은 비례대표 부정경선 의혹과 종북(從北) 논란에 휩싸인 통합진보당의 이석기·김재연 두 의원을 제명키로 방침을 세웠습니다. 황우여 당 대표 등 지도부가 나선데 당의 '주인'격인 박근혜 의원도 이를 못박고 나섰습니다. 박 의원은 지난 1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 참석 후 "지금 국민들이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해 크게 걱정하고 있다"며 이들 두 의원에 대해 "사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고 말해 새누리당의 제명 방침을 뒷받침 해주었습니다.

문제는 제1야당이자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의 한 축인 민주통합당도 이에 가담하고 나섰다는 점입니다. 박지원 비대위원장은 지난달 30일 민주통합당 정책위 기자간담회에서 "이석기·김재연 의원이 국회를 위해서 정치적으로 자진 사퇴해줄 것을 요구한다"고 운을 뗐습니다. 이어 박 위원장은 "(이석기·김재연 의원) 두 분을 법적으로 징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국회 윤리위원회의 자격심사 제도에 의원직을 박탈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새누리당은 민주당에 대해 민간인 불법사찰 국정조사를 미끼로 두 의원에 대한 제명 동참을 유도하고 있습니다.

새누리당이 이석기·김재연 두 의원을 제명하겠다며 이들의 '종북'을 문제삼고 있습니다. 국회법 제138조에 따라 '무자격 결정'을 내리자는 것입니다. 국회법 제138조(자격심사의 청구)는 '의원이 다른 의원의 자격에 대하여 이의가 있을 때에는 30인 이상의 연서로 자격심사를 의장에게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헌법 제64조 2항·3항·4항에 따르면, 국회의원의 자격심사·징계는 국회가 자율적으로 할 수 있으며, 국회의원의 제명은 재적의원 3분의 2이상의 찬성이면 가능합니다. 이 경우 법원에 제소할 수 없다고 규정돼 있어 일반 피해자들과는 달리 별다른 구제책도 없는 실정입니다.

우리 헌법과 국회법에 국회의원을 제명할 수 있는 법적 근거는 분명히 있습니다. 게다가 '주민소환제'처럼 특정 사유가 명문화 돼 있지 않기 때문에 국회의원 2/3의 동의만 있으면 어떤 국회의원도 제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석기·김재연 두 의원 제명이 실제 가능할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선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을 얻어내기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19대 국회에서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의석수는 각각 150석, 127석입니다. 민주당이 당론으로 정하고 무소속을 전부 동원한다고 해도 '재적의원 3분의 2이상'인 200석 이상을 채우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다음은 제명의 근거인 '징계 사유'입니다. 국회법 제155조(징계)는 징계 사유로 12가지를 규정하고 있는데, 직권남용 금지 및 청렴의무 위반, 국회법상의 의무 위반,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과 공직자윤리법에서 정하고 있는 징계사유에 해당하는 경우 등입니다. 또 국회법에서 정하고 있는 징계사유는 국회의원 신분으로 활동 중 헌법이나 법률에 위반하는 경우를 말하는데 그렇다면 이석기·김재연 의원처럼 국회의원이 되기 이전의 일로 문제가 된 경우는 어찌 될까요? 법적으로만 따진다면 국회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징계사유에는 해당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물론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처벌받아 의원직을 상실하는 경우는 얘기가 다릅니다.

우리 의정사에서 현직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제명된 경우가 있을까요? 네, 꼭 한 번 있었습니다. 1979년 10월 4일 당시 김영삼(YS) 신민당 총재가 공화당과 유정회 주도의 단독국회에서 날치기 통과로 제명된 바 있습니다. 그런 뼈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 YS이건만 그는 최근 인사차 상도동 자택을 방문한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에게 "친북세력이 국회에 있어서 되겠냐. 어떤 경우에도 용납할 수가 없다. 민주통합당과 협의해 (이석기·김재연 두 의원을)쫓아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됐습니다. 철저한 반북주의자인 YS는 자신의 경우와 이 건은 별개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김영삼 의원 제명사건'은 어떤 것일까요?

'김영삼 의원 제명사건'의 시작, 이렇습니다


1979년 8월 10일 가발업체인 YH무역의 여공들이 사측의 부당 폐업조치에 반발하며 신민당사에서 농성중인 모습 ⓒ 연합뉴스


1960~70년대 우리나라 수출품 가운데 하나는 '가발'이었는데 서울 중랑구 면목동에 'YH무역'이라는 가발제조업체가 있었습니다. 이 회사는 1966년 자본금 100만 원, 종업원 10명으로 설립되었는데 가발 수출경기 호황과 정부의 지원책에 힘입어 1970년대초 종업원이 최대 4000여 명에 이르는 대기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회사 창립자인 장용호는 미국에서 백화점 사업체를 설립해 외화를 빼돌리는 한편 은행 빚을 얻어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였는데 1978년 제2차 석유파동 이후 가발산업 퇴조로 회사 운영이 어려워졌습니다. 그러자 장용호는 노동자를 500여 명으로 줄이고 이듬해 4월 폐업을 선언한 뒤 8월 6일 2차 폐업을 공고하였습니다.

졸지에 직장을 잃게 된 YH무역의 여성노동자 172명은 8월 9일 서울 마포구에 있던 신민당 당사를 찾아와 당사에서 농성에 돌입했습니다.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 YH무역의 여공들과 면담한 후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으니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켰습니다. 이후 경찰들이 신민당 당사 주변에서 감시활동을 벌이자 김영삼 총재와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이들에게 발길질을 하고 따귀를 치며 경고를 하였습니다. 이에 분노한 경찰이 8월 11일 2000여 명의 경찰이 신민당사에 투입돼 작전개시 23분 만에 YH무역 노동자들은 모두 강제 연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건물옥상으로 올라갔던 노동자 김경숙이 추락하여 사망하였고, 김영삼 총재는 상도동 자택으로 강제로 끌려 나갔습니다.

한편, 1978년부터 눈엣가시 같던 김영삼을 벼르고 있던 박정희 정권은 'YH무역 사건'을 기회로 김영삼마저 처리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던 중 김영삼 총재가 1979년 9월 16일자 <뉴욕타임스>와의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원조제공을 중단하고 한국정부에 대해 민주화 조치를 취하도록 압력을 가하라"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화근이 되었습니다. 당시 여당인 공화당과 유정회는 김영삼 총재의 기자회견을 두고 '헌정을 부정하고 사대주의 발언을 했다'고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9월 22일,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소속 국회의원 160명 전원의 이름으로 국회에 김영삼 신민당 총재에 대한 '징계동의안'을 제출했습니다. 징계 사유는 "국회법 제26조에 의한 국회의원으로서의 신분을 일탈하여 국헌을 위배하고 국가안위와 국리민복을 현저히 저해하는 허위사실을 유포하는 등 반국가적 언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주권을 모독하여 국회의 위신을 실추시키고 국회의원으로서의 품위를 손상시켰으므로 국회법 제157조에 의해 징계를 요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는 이날 통합 당무회의를 열어 징계 종류는 '제명'으로, 징계 시기는 정기국회 회기 중에 처리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D-데이는 10월 4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에 신민당 의원들은 본회의장을 점거한 채 의사진행을 원천봉쇄하였습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날치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당시 백두진 국회의장은 구두로 법사위에 징계동의안을 회부하였고 이후 3분 후에 소집된 법사위에서 야당 의원에게는 알리지도 않은 채 40초 만에 전격으로 날치기 통과시켰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본회의 통과뿐이었습니다. 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지키고 있자 장소를 바꾸기로 결정한 후 야당의원들을 묶어두기 위해 국회의장이 국회법 제140조에 따라 내무부에 연락하여 경찰권을 발동하고 국회법 141조에 따라 경찰 파견을 요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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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의정사상 처음으로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외신과의 인터뷰가 문제가 돼 국회에서 제명됐다. ⓒ 경향신문


여당 의원들은 평소 여당의원 의총 장소로 사용돼 온 의사당 내 146호실로 본회의장을 변경하였습니다. 이날 오후 4시 7분 여당은 사복경찰 300여 명이 146호 진입로를 봉쇄하여 야당의원들의 진입을 차단시킨 후 여당 의원들은 비공개회의를 열어 표결을 강행하였으며, 4시 20분 백두진 의장은 "출석의원 159명 중 159표로 가결되었다"고 김영삼 의원의 제명을 선포했습니다.

이로써 의정사상 최초로 국회에서 현직 국회의원을 제명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뒤늦게 달려온 신민당 의원들이 회의장으로 몰려 들어가려다가 무술경관들과 충돌을 빚었으며, 야당의원들의 통곡과 욕설, 그리고 멱살잡이로 뒤범벅이 됐습니다다. 이로써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직과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되었고 이어 가택연금 조치를 받았습니다.

의정사상 최초로 국회에서 현직 국회의원, 그것도 야당 총재를 제명시켰으니 후유증이 없을 리 없었습니다. 사태 후 신민당 소속 의원 전원은 무기한 등원거부 결정을 내렸고, 당시 박권흠 신민당 대변인 "민주주의는 조종(弔鐘)을 울렸다"며 전국 각 지구당에 당기(黨旗)를 조기(弔旗) 형태로 달 것을 하달했습니다. 또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 "김 총재 제명은 유감"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로부터 9일 뒤인 10월 13일 신민당 의원 66명과 민주통일당 의원들은 집단사퇴서를 제출하면서 박 정권과 정면으로 맞섰습니다. 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공화당과 유정회 합동조정회의에서 '사퇴서 선별수리론'을 거론하면서 부산 및 마산 출신 국회의원들과 그 지역의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습니다.   

마침내 사태는 정치권 담장을 넘어 대학가로 확산됐는데 시작은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인 '야도(野都)' 부산이었습니다. 10월 15일 부산대 학생들의 '민주선언문' 배포를 시작으로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대학생들과 시민 등 5000명이 가담하여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들은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경찰서·도청·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18일 0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습니다. 이로써 시위는 진정되었으나 6일 뒤 '10·26사건'이 발생해 박정희 유신정권은 종말을 고했습니다. 

'10·26사건' 발생, 유신정권의 종말 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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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김옥선의원 발언 파동'으로 김 의원에 대한 제명 징계안이 국회 법사위 통과를 보도한 1975면 10월 10일자 <경향신문> 기사 ⓒ 경향신문


국회의원 제명이 국회 차원에서 결정된 경우는 김영삼이 유일하나 제명 논의는 그 후에도 몇 번 있었습니다. '남장의원'으로 유명한 김옥선 의원과 '공업용 미싱발언' 파문으로 물의를 빚은 김홍신 의원이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9대 국회 시절인 1975년 10월 8일 신민당 소속 김옥선 의원은 대정부질문을 통해 박정희 정권의 공포정치를 비판했습니다. 유신헌법 공포 후 박 정권이 대학가의 반발을 막기 위해 긴급조치 제7호 등을 통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자 김 의원은 "전쟁심리 조성은 영구집권으로 가는 방편"이라며 이를 비판한 것입니다. 그러자 당시 정일권 국회의장은 "김 의원의 발언은 안보를 위태롭게 하고 국회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이적행위"라며 징계안을 회부해 제명 건을 법사위에 통과시켰습니다. 이를 계기로 여야 대치가 계속되자 김 의원은 자진해서 의원직 사퇴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로 김 의원은 공민권 정지를 당해 이후 10년간 정계에 복귀하지 못했습니다.  

소설가 출신의 김홍신 의원은 '거친 입' 때문에 제명 대상이 됐던 적이 있습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인 1998년 6·4지방선거 때의 일입니다. 그해 5월 26일 경기도 시흥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한나라당 손학규 후보 정당연설회 지원유세에 참석했던 김 의원은 유세 도중 임창열 경기지사 후보의 전력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느닷없이 '염라대왕의 바늘뜸' 얘기를 꺼내며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인신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김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김대중 대통령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옛말에 염라대왕이 거짓말을 많이 한 사람의 입을 봉한다고 했는데, 김 대통령과 임창열 후보는 공업용 미싱으로 더럭더럭 박아야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후보도 아닌 고령의 현직 대통령을 두고 한 비판치고는 과도한 것이었습니다. 국민회의 선대위는 대책회의를 열고 조순 당시 한나라당 총재에게 공식사과와 김 의원 제명 및 의원직 사퇴를 요구키로 결정했습니다. 김 의원은 즉각 "김 대통령의 말바꾸기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다소 과장된 표현이 있었던 것 같다"며 사과했지만 사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국회의원 제명 건은 결국 유야무야됐지만 김 대통령 명예훼손 및 모욕·비방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으며, 2000년 3월 1심에서 형법상 모욕죄와 공직선거 및 선거부정방지법 위반(후보자 비방)혐의로 벌금 100만 원, 80만 원을 각각 선고받았습니다. 2002년 6월 대법원이 원심을 확정함으로써 김 의원은 최종적으로 유죄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국회의원 #이석기 #김영삼 #YH무역 #김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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