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그녀를 보며, 잠시 상처를 잊었다

[불혹 배낭여행기 ⑤] 2가지 이미지로 남은 크로아티아

등록 2012.12.17 01:15수정 2013.03.2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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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올드타운은 고풍스런 건축물로 넘쳐난다. 세월이 때가 묻은 석조건물은 그 도시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하다.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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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스플리트. 하늘빛이 아드리아해의 바다 색깔과 닮았다. ⓒ 홍성식


두브로브니크를 떠나던 날. 민박집 주인여자와 사내는 날 배웅하며 한 번 더 "미안하다"고 했다. "꼭 다시 여기로 돌아와 우리 집에서 묵어가라"는 작별인사를 전하는 그들에게 "그래요. 꼭 그럴게요"라는 대답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저 그 부부가 서로에 대한 믿음과 애정으로 내전의 상처를 이겨내고 행복지기를 마음속으로 빌었을 뿐.

두브로브니크를 벗어나 도착한 다음 여행지 스플리트 역시 짙푸른 바다와 고대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한 로마 황제의 별궁이 조화를 이루는 매력 가득한 곳이었다. 해변과 잇닿아 있는 광장에선 수백 명의 관광객이 시끌벅적 몰려나와 아이스크림을 핥고, 과일주스를 마시고, 생선과 새우 바비큐를 먹고 있었다.


아드리아해와의 이별, 사라예보행을 결정하다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답게 표정은 밝았고, 목소리는 즐거움에 들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나는 그들처럼 즐거워지지 못했다. 부지불식간에 내부로 틈입한 비극의 정서가 내 표정을 바꿔놓았다. 크로아티아 내전과 죽음의 이미지가 머릿속을 어지럽게 떠다녔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잠시라도 피해 있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인근의 섬으로 들어가는 것.

배를 타고 지금은 이름을 잊어버린 섬으로 가서 사흘을 지냈다. 외출해봐야 별 게 없으니 거기서 얻은 숙소 발코니에서 멍하니 앉아 아드리아 바다만을 바라보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신(神)을 믿지도 않으면서 해가 저물면 동네 조그만 성당으로 가 나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와 벽화 속 마리아를 올려다보곤 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발칸반도 비극의 현대사를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그때다. 그러자 갑자기 크로아티아보다 더 큰 내전의 상처를 앓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라는 무슬림이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그랬기에 세르비아군의 노골적인 '무슬림 학살'이 자행된 곳이다. 현재까지도 전범재판이 진행되고 있을 정도로 크나큰 상처를 받은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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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 같은 날 학살 당한 무슬림들이 묻힌 묘지가 도시를 빙 둘러싸고 있다. 흰색 비석의 도시. 내가 떠올리는 사라예보의 첫 이미지다. ⓒ 홍성식


원래 이전 내 계획은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까지 쭉 올라가 슬로베니아로 간다는 것이었지만 변경한들 무슨 문제가 있을까. 혼자서 여행하는 게 이럴 때는 편하다. 바뀐 계획과 일정을 동행자에게 설명하고 이해를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 마음이 내키는 곳으로 가자'고 결정하니, 섬에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아드리아해와는 잠시 이별하기로 했다. 어차피 슬로베니아에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아드리아해는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모두에 걸쳐있다. 건너편은 이탈리아). 다음 날 오후에 출발하는 배를 타고 스플리트로 돌아왔다.

항구 인근에 있는 국제버스터미널로 가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로 향하는 버스표를 예매했다. 차편은 하루에 한 번, 밤 9시에 출발하는 게 유일했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까지 남는 시간에 저녁을 먹기 위해 로마 황제의 별궁 근처에 줄줄이 늘어선 식당 중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옆 테이블에 앉은 여자 하나가 눈에 띄었다. 치렁치렁한 짙은 갈색 머리칼과 늘씬한 체형. 그녀 역시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난 숙소 여주인처럼 아드리아해의 빛깔을 닮은 파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함께 온 친구들과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그녀가 거리에 놓인 야외 스피커에서 라틴 음악이 흘러나오자 광장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동석한 남자들의 손을 번갈아 잡아가며 밟는 스텝이 춤에는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보통은 아니었다.

병아리 같은 노란색 티셔츠에 빨간색 땡땡이스커트가 근사하게 어울리는 미인의 춤은 나뿐만 아니라, 인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던 관광객과 산책하던 동네 주민들의 눈길까지 사로잡았다. 한 곡을 마칠 때마다 환호와 박수가 터졌고, 춤의 상대가 되겠다는 사내들이 이곳저곳에서 줄지어 나섰다.

크로아티아, 아름다움의 복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돼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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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 내전과 집단학살의 상처를 털고, 춤추는 장미의 날들을 맞길 빈다. ⓒ 홍성식


유쾌하고 낭만적인 풍경임에 틀림없었다. 분명 꽤 오랫동안 기억될 인상적인 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내 몸 안으로 전이된 전쟁의 상처 그리고, 발칸반도 비극의 역사를 채 다 떨쳐내지 못했음에도 나는 이런 바람을 조용히 혼잣말로 읊조렸던 것 같다.

"크로아티아 내전의 아픔을 모르는 저 해맑은 웃음의 젊은이들에겐 다시 비극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인종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불합리가 지구 위에서 없어지기를. 춤추는 장미와 포도주의 날들을 몇몇 사람만이 아닌 모든 인류가 누리는 날이 오기를."

요즘도 나는 가끔 떠올린다. 두브로브니크에서 만난 민박집 주인여자의 착한 웃음과 그녀 남편의 삶에 아프게 새겨진 전쟁의 상처. 그리고 스플리트 로마 황제의 별궁 앞 광장에서 아무 걱정 없는 듯 정열적인 춤을 추던 아름다운 여자를. 그 기억의 편린들이 불협화음 같기도 하다가, 때론 '세상 어느 곳이건 비극과 희극이 교차하는 게 인간의 삶이지'라는 자조에 빠지기도 한다.

아드리아해의 짙푸른 아름다움 속에 똬리 튼 내전의 비극. 크로아티아는 이 극단의 2가지 이미지로 내게 기억될 것 같다. 아주 오랫동안. 때론 그리워지고, 어느 순간엔 잊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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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기차는 저렴하고, 꽤 낭만적인 운송수단이다. 왼편 기차처럼 객차 바깥에 화려한 그림이 그려진 것도 특징 중 하나. 사진은 동유럽 여행의 출발지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 중앙역이다. 오른편 기차는 이스탄불에서 출발해 동유럽을 달리는 터키 기차. ⓒ 홍성식


크로아티아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팁 몇 가지

1. 크로아티아의 주요 관광지인 두브로브니크, 스플리트, 폴리트비체, 수도인 자그레브는 여름 휴가철이면 한국의 해운대와 경포대 이상으로 붐빈다. 가능하면 6월 말에서 8월을 피해 여행 일정을 잡는 게 그 나라의 진면목을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하지만 시끌벅적한 해변과 클럽에서 청춘을 발산하고 싶은 이들이라면 이때가 좋은 시기다.

2. 정찰제가 자리 잡은 유럽이지만, 호텔이 아닌 민박의 경우 가격 협상을 하면 최고 20~30% 정도는 방값을 깎아주는 인심이 남아있는 게 크로아티아다. 물론,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는다면 인하폭은 더 커질 것이다. 내가 만난 대부분의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호탕하고 착했다.

3. 크로아티아 남쪽에서 시작해 북쪽 방향으로 여행한다면 두브로브니크와 스플리트를 거쳐 자그레브로 갈 때는 기차를 이용하는 것도 낭만을 즐길 수 있는 한 방법이다. 동유럽 기차는 다소 느리고 낡았지만, 나름의 운치가 있다. 알바니아와 세르비아, 보스니아의 기차여행 역시 매력적이다. 운임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독일에 비해 매우 저렴하다.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까지 10시간 가까이 기차를 탔는데, 티켓 가격은 겨우 11유로(약 16500원)였다.

4. 크로아티아 최고의 해변 두브로브니크의 경우 번잡한 메인 비치를 벗어나 시내버스(승차권은 1500원 정도)를 타고 조금만 외곽으로 가면 더 깨끗하고, 조용하고, 근사한 해변을 만날 수 있다. 커피와 레스토랑 음식 가격도 메인 비치의 절반이다. 연인과 함께하는 여행이라면 석양 무렵의 한적한 해변 레스토랑을 권하고 싶다. 아드리아해의 푸른빛과 태양의 붉은빛이 최고의 앙상블로 당신들을 맞아줄 것이다.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이라면 단숨에 서로에게 매료될 것이고, 이미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그 사랑이 더 깊어질 게 분명하다.

5. 가톨릭 신자가 절대적으로 많은 크로아티아지만, 소수의 무슬림과 세르비아 정교회 신자도 엄연히 존재한다. 가능하다면 종교에 관한 이야기는 화제로 올리지 않는 게 좋다. 수만 명이 목숨을 잃은 크로아티아 내전에 관해 대놓고 물어보거나 하는 것도 실례가 될 수 있으니 피해야 할 화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계간문예지 <문학의오늘>에 연재되고 있는 여행기입니다.
#크로아티아 #내전의 상처 #스플리트 #발칸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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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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