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블랴나, 사랑에 빠지기 좋겠구나

[불혹 배낭여행기 21] 슬로베니아, 동화 속 공간 같은 나라

등록 2013.02.28 11:07수정 2013.03.22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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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한적한 매력이 있는 도시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 서지은 제공


'수도'라고 하면 떠오르는 고착된 이미지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시끌벅적함과 고층빌딩 탓에 높아만 가는 스카이라인, 탁한 공기와 자동차로 가득 찬 교통체증의 도로 등.

그런데 묘하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는 우리 인식 속에 자리한 수도의 이미지를 보기 좋게 전복시킨다. 빵빵거리는 승용차도, 스피커에서 울려나오는 장사치들의 소음도,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도 없다. 도심을 관통하는 강물의 소리가 들릴 정도로 고요하다.


거리 곳곳엔 용을 형상화한 자그마한 조형물이 들어서 있고, 여름날 더위를 식혀줄 예쁜 분수들이 즐비해 어떻게 보면 동화 속 공간 같다. 당장이라도 드레스를 입은 공주와 용으로부터 공주를 구해낼 왕자가 나타날 것 같은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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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블랴나를 상징하는 동물은 아마도 용인듯. 도시 곳곳에 용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흔하다. ⓒ 서지은 제공


거대 예술의 도시에서 아기자기한 예술품의 도시로

2011년 여름. 류블랴나에 도착하기 전 일주일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머물렀다. 장엄하고 웅장한 슈테판성당과 오페라극장. 공무원의 직장이라기보다는 예술품에 가까운 국회의사당과 시청사, 지난날 황제와 여제가 사용했다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들. 비엔나의 건축물은 그 크기에서부터 사람을 압도한다.

규모와 인구에서는 세계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살아왔기 때문일까? 가져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열망 탓일까? 나는 조그맣고, 조용한 도시에 더 매력을 느낀다. 관광객과 취객으로 불야성을 이루는 태국의 수도 방콕보단 이웃나라 라오스의 한적한 수도 비엔티안이 좋았고, 아이스크림 하나 사먹으려 30분씩 줄을 서는 이탈리아의 로마보단 적요하기까지 한 알바니아의 티라나가 좋았다.

비엔나에서 류블랴나까지의 거리는 급행열차로 3시간 남짓. 그러나, 풍광과 사람들의 표정은 마치 다른 대륙으로 건너온 것처럼 달라졌다. 비엔나가 광역화된 거대 도시라면, 류블랴나는 시내 중심가를 조금만 벗어나도 커다란 나무 아래 꼬마아이가 그네를 타는 시골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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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이런 시골스런(?) 풍경을 볼 수 있는 게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다. ⓒ 서지은 제공


슬로베니아의 인구는 한국의 1/25 수준인 200만 명. 1990년대 초반 옛 유고슬라비아연방에서 독립한 이 나라의 명칭이 우리 귀에 익숙해진 건 그 계기가 독특하다. 2000년대 초중반 '이상 현상'으로까지 불리던 파울로 코엘료 열풍. <연금술사> 이후 이어진 이 브라질 소설가에 대한 한국 독자들의 애정은 작품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동반했다.

그즈음 제목부터가 흥미를 끄는 코엘료의 소설이 번역·출간된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이 소설의 무대가 되는 공간이 바로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다. 아주 간단히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직장도 있고, 가족도 있으며, 애인도 있고, 친구도 있는 지극히 평범한 여성 베로니카. 그러나 그녀는 생이 권태롭다. 어느 날 '슬로베니아의 위치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는 온당치 못한 국제적 무관심'이란 다소 황당한 이유의 유서를 쓰고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죽지 못한 베로니카. 정신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한다. 정상과 비정상의 모호한 경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녀. 정신병자로 낙인찍힌 한 사내와 사랑을 시작하는데….

이 소설은 슬로베니아와 류블랴나라는 이름을 한국에 알리는 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이후에는 원작을 재료로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란 동명의 영화가 에밀리 영의 연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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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고요하고 적요한 한낮의 류블랴나. ⓒ 서지은 제공


한적한 거리, 여행자를 반겨주는 건 꼬리가 긴 용

어쨌건 한여름 땡볕이 쏟아지는 류블랴나역 광장에서 여행자안내소를 찾았다. 푸른 눈동자의 아가씨 둘이 차가운 커피를 앞에 두고 오후의 심심함을 견디고 있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관광객이 반가웠던 것일까. 무료지도에 가격이 저렴하고 깨끗한 숙소를 동그라미 쳐 표시해주고는 가는 길까지 친절하게 일러준다. 둘 다 웃는 모습이 시원스러웠다.

뚫어져라 지도를 보지 않아도 너끈히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조그맣고 잘 정돈된 도시. 그녀들이 손짓으로 일러준 길을 걸어 유스호스텔로 향했다.

그런데, 이게 뭐냐.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없다. 떠돌이 개나 길고양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나무그늘 아래 온통 정적에 빠진 류블랴나. 그 조용함에 질려 불량스런 고교생 서너 명이 나타나 처음 보는 동양인을 위협하며 담배라도 몇 개비 강탈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숙소에 도착할 무렵 사람을 대신해 나를 반겨준 건 청동으로 조각했음직한 용(龍)이었다. 조그만 교량 입구에 버티고 선 그 녀석은 긴장감이나 공포감을 주기는커녕 반가움을 불렀다. 오죽했으면 용의 따귀를 한 번 쓰다듬어주고 다리를 건넜겠는가. 물줄기를 뿜어 올리는 분수조차도 숨을 죽인 듯 고요하게 작동하는 도시 류블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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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 무렵이 돼야 류블랴나는 낭만의 등불을 켤 준비를 한다. ⓒ 서지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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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고 친절한 슬로베니아 사람들. ⓒ 서지은 제공


밤이 내린 류블랴나, 낭만 속을 걷다

짐을 내려두고 샤워를 한 후 해가 질 때까지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숙소로 정한 유스호스텔에도 그다지 손님이 많지 않았다. 숙소 정원에선 한국과 꼭 같이 고목에서 매미가 울어댔다. 정겨운 여름풍경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유럽을 여행했던 4개월 기간 중 가장 평화로운 장면이기도 하다.

어둠이 류블랴나를 온전히 장악한 이후에야 다시 거리로 나섰다. 불어오는 밤바람에 떨어진 기온 때문인지 낮보단 지나다니는 사람이 늘었다.

오렌지색 등을 밝히고 손님을 기다리는 조그맣고 예쁜 레스토랑과 카페들. 중세 이전부터 사람이 살아온 도시인지라 이끼 낀 건물 하나하나가 고풍스럽기 그지없다. 광장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작은 공간에선 아코디언 연주와 민속춤 공연이 펼쳐지고. 가로등이 비치지 않는 어둑한 강변에선 키스하는 연인들. 저 멀리 산 위엔 공주가 살 듯한 고성(古城)까지. 낮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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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신 안에 상대를 혹은, 상대 안에 자신을 가두는 것인가? 변치 않을 애정을 약속한 듯 보이는 류블랴나의 자물쇠들. 한국과 다를 바 없다. ⓒ 서지은 제공


적요과 정적이 지배하는 낮의 거리와 달리, 밤의 류블랴나를 통치하는 왕의 이름은 '낭만'이었다. 열정에 들떠 입 맞추는 청춘들을 보고 있자니, '여기라면 나도 사랑에 빠질 수 있겠구나'란 근거 없는 생각이 찾아들었다.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엔 늦어버린 마흔 살 사내의 심장이 일순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낮과 밤. 아주 드물게 찾아온 냉소주의자 사내의 가슴 두근거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류블랴나의 첫날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밤, 그들을 만났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용의 도시 #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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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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