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여, <채식의 배신>에 배신당하지 말라

식물의 고통에 공감한다면 식물도 먹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검토 완료

조세형(unchi)등록 2013.06.17 16:06
보통 TV나 광고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듯이, 책의 내용은 당연히 검증을 거쳤을 거라고 믿는 사람들을 배신하는 책이 바로 <채식의 배신>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자신의 주관적인 채식주의를 보편적인 채식주의로 둔갑시켜 공격하는 오류를 저질렀기 때문에, 채식주의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는 독자에게 왜곡된 생각을 심어줄 수 있다.  동물권과 윤리적 채식주의에 대한 대중의 인식이 오래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의 원서가 출판된 미국과 달리 책 내용에 대한 비판이 활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점이 아쉽다.   

이 책의 독자는 동물해방론과 윤리적 채식주의의 논리적 근거의 정수가 담긴 피터 싱어의 <동물해방>도 반드시 읽었으면 한다. 흔히 채식주의는 동물이 불쌍해서  육식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윤리적 채식주의는 왠만한 철학자들도 논박하지 못한 탄탄한 논리적, 철학적 근거에 기초하고 있다. 채식주의를 비판하려는 분들은 채식주의가 어떠한 이론에 기초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이 책의 저자가 저지른 것과 같은 오류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채식은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며, 인간에게 먹히는 당사자는 아무런 항변을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다음은 이 책의 서평과 감상이다.

* * * 

한국에서는 채식주의가 소수 문화이며, 이 책이 다루는 도덕적, 정치적, 영양학적 채식주의의 역사가 오래되었다고도 할 수 없다. 채식주의가 국내에 제대로 자리잡기 전에 <채식주의의 신화(The Vegetarian Myth)>라는 책이 <채식의 배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것이 시기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매우 의문이다.

채식주의 운동에 동참하여 동물과 사람 모두 잘사는 세상을 만들고 싶은 사람의 입장에서 이 책이 채식주의에 대한 발전적 비판이나 대안보다는 기존의 편견과 오해를 강화시키기 쉬운 내용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아쉽다. 이런 점에서 이 책에 대한 반론을 통해 일반의 오해를 바로잡고 채식주의자로서 나 자신을 반성하는 기회를 갖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다음의 사실을 바탕으로 읽혀지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1) 현대인의 육식이 대부분 공장식 밀집 사육 시스템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
2) 공장식 밀집 사육 시스템은 동물의 비인도적인 사육과 도살, 환경오염, 제3세계의 기아 양산으로 비판 받는다는 사실.
3) 현대 곡물의 대부분은 식용 가축에게 먹이기 위해 재배되기 때문에 육식하는 사람들이 채식하는 사람보다 결과적으로 곡물을 더 많이 소비한다는 사실.

채식주의는 아주 간단히 정의하면 "육식을 하지 않고 식물로부터 양분을 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양한 생활 양식이 존재하는 현대에 채식주의가 일상에서 구현되는 모습은 무엇을 먹는가,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허용하는가 등의 측면에서 개인의 생활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20년 동안 비건(완전 채식주의자)으로 살았다고 했을 뿐, 비건 채식주의를 어떻게 실천했는가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책을 읽고 이해한 바에 따르면 저자는 채식주의를 "일체의 살생을 피하는 것"으로 생각하여 일탈이나 융통성을 불허하는 극단적인 채식주의를 지향한 것 같다. 저자는 이 책에서 20년의 비건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육식을 하게 된 경험에 기초하여 도덕적, 정치적, 영양학적 채식주의의 무지와 신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지금부터 이 책의 주요 내용에 대한 반론을 펴고, 채식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해 볼 문제를 살펴보겠다.

I. 도덕적 이유의 채식주의가 놓치는 것들

1) 동물 권리 옹호주의는 동물이 아닌 인간의 행복과 고통을 앞세우기 때문에 인간 중심적이고 감상적이다.
"엄마가 있거나 얼굴이 있는 건 먹지 않겠다"는 주장이 동물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런 특징이 동물에게도 통증, 공포, 염려를 느끼는 능력이 있음을 증명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의 고통에 대해 신경 쓰는 사람들은 감상적이라는 비난을 듣는데, 그런 비난에는 맞는 구석이 있다. 동물 권리 옹호론은 인간의 필요와 욕구를 동물에 투사한 것이지 동물의 필요와 욕구를 반영한 것이 아니다. (p.135-136)
아무리 객관적인 입장을 취한다 해도 인간은 인간의 입장에서 동물을 이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순수하게 동물의 입장에서 행복과 고통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우리가 인간의 입장에서 동물의 행복과 고통을 가늠하는 인도주의적 시선을 완전히 걷어낸다면 내 앞에 있는 강아지와 책상이 다를 바가 무엇일까? 인간이 동물을 윤리적으로 대우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며,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동물 학대를 주저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동물을 인간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잘못이라면, 저자의 "식물도 감각과 감정을 느낀다"는 주장이나 "우리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자"는 주장 역시 같은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2)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은 동물의 동물적 본성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세렝게티 한가운데에 담을 세워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을 갈라놓는 담장을 쌓자고 제안한 비건처럼 동물 권리 옹호론자들은 동물의 동물적 본성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한다. (p.137)
폴런의 동물권 옹호 철학에 대한 비판: "동물 권리옹호자들은 인간의 동물성 뿐만 아니라 동물의 동물성마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이 싸우는 대상은 바로 자연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p.141)  
저자는 일부 괴상한 채식주의자의 생각을 보편적인 동물 권리 옹호론으로 간주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다. 나는 동물보호단체가 자연의 포식관계를 부정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환경 운동가인 저자의 동물권 운동에 대한 몰이해가 놀랍다.

3) 도덕적 이유의 채식주의는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일년생 곡물을 기본으로 한 식단이 "아무 것도 죽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들의 무지를 드러낸다.(p.140) 동물 권리 옹호자들은 다른 생명을 죽이지 않고도 먹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죽음이 생명의 일부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부정한다. (p.142)
이렇게 생각하는 채식주의자가 아예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날 채식주의 운동의 정론은 모든 살생을 부정하는 교조주의가 아니라 동물이라도 소비하지 말자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 때문에 죽는 동물이 식용동물이 전부는 아니며, 아무리 극단적인 채식주의자라도 살아가는 동안 일체의 살생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육식을 완전히 끊지 못할 바에는 결국 마찬가지다"라는 생각이나, 모피를 입지 않는 사람에게 "당신이 먹는 동물은 불쌍하지 않냐?"고 따지는 것은 개인이 가능한 선에서 행하는 윤리적 실천의 본질을 흐리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맥락에서 "먹을거리는 윤리 문제이지만 광신도는 필요 없다"는 철학자 피터 싱어의 말은 매우 중요하다. 저자는 자신의 극단적, 교조적인 채식주의를 채식주의 전체로 투사한 것 같다.

4) 식물도 감각(고통)을 느낀다.
저자는 식물도 '생명 활동'을 하는데 인간의 척도로 가늠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알지 못할 뿐(p.154)이라며, 우리는 식물에게 감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들을 인간과 DNA의 50%를 공유하는 '우리'의 하나로 인정해야 한다(p.159)고 주장한다. 저자가 식물의 '감각'에 고통도 포함시키는지는 명확하게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식물은 먹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식물을 "살아있고, 영예를 돌릴 가치가 있으며, 존중하고 감사할 대상이지만 감각은 없는 생물"의 범주로 규정했지만 식물을 접하면 접할 수록 그런 범주가 말이 안돼 보였다(p.151-153)고 한 것으로 비추어보아 식물도 고통을 느낀다고 믿는 것 같다.

그런데 식물의 감각을 운운하며 채식주의자의 세계관에는 이것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p.151)고 비판한 저자의 결론이 황당하다. 저자는 식물도 감각을 느낀다는 전제 하에 생명의 범위를 정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어디서 선을 그어야 할까?"란 질문을 던진 후, 생명과 죽음을 가르는 것은 밤낮의 경계를 가르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신은 선을 긋지 않고 원을 그리겠다고 말한다.  

결국 저자의 주장은 동식물이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에 있고 감각을 느낀다는 점에서 서로 다르지 않으니까 동물, 식물을 구분하지 말고 전부 먹자는 것인데, 이것이 한 때 동물의 고통에 반대하여 채식을 했던 사람이 다시 육식을 하게 된 근거로 내세울 수 있는 주장일까? 동물의 고통에 반대하는 자신의 입장이 변치 않았다는 전제 하에 "식물이 감각을 느낀다"는 주장에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저자는 동식물 모두 먹지 않는 것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뭐든 먹어야 하는 현실에서 윤리적인 태도를 고수하려면, 현대 과학의 테두리 안에서 감각을 느낀다고 밝혀진 동물은 먹지 말고, 식물의 감각은 그것이 실제로 밝혀진 후에 고민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나는 저자가 똑같은 심정으로 살아있는 당근과 닭에게 칼을 들이대는지 궁금하다. 

식물의 고통을 거론하며 밥상의 윤리를 추상화시키는 것은 실존하는 고통을 줄이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동물과 식물 모두가 감각을 느낀다고 믿는다면, 둘 중 어느 하나라도 먹지 않음으로써 고통을 줄이는 것이 옳을까, 둘 다 먹는 것이 옳을까? 게다가 육식은 채식보다 더 많은 식물의 죽음을 야기하는데? 만약 저자가 이 책에서 언급한 호흡주의자로 살아가기로 했다면 나는 심정적으로나마 저자에게 동의했을 것이다(물론 호흡주의가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5) 동물 사육에서 인간은 주도권을 쥐고 있지 않으며, 실은 그들을 키우기 위해 중노동을 하고 있다.
닭이 마실 물을 나르느라 겨울에 얼어붙은 문을 여는 과정에서 손바닥에 화상을 입고 목덜미에 눈 한 덩이가 떨어지는 것을 맞으면서 든 생각이 있다.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모든 걸 거꾸로 봐 왔구나. 내가 닭을 착취하는 게 아니었어. 모두 따뜻하고 안전하고 배부르고 행복하잖아. 고생하는 것은 나뿐이야. 닭이 나한테 물을 가져다주기는 커녕 눈 위에 발끝 하나 내밀지 않아도 되니까." 마치 나를 찌르는 냉정한 현실의 칼처럼 느껴졌다. 닭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들을 위해 일하도록 만든 것이다.(p.58-59)
살면서 더 나은 대우를 받고 고통과 스트레스 없이 도살된 동물을 먹는 것이 그렇지 않은 동물을 먹는 것보다 윤리적인 육식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자처럼 가축을 직접 키울 여건이 안 되기 때문에 자신이 먹는 동물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기 어렵고, 동물 복지 농장의 고기가 아직까지는 소수의 수요만 충족시켜 준다는 현실에서 저자의 이런 주장이 현대의 육식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내가 닭을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닭들은 행복하고 고생하는 것은 나뿐"이라고 말하는 저자가 이기적이라고 느껴지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저자는 닭들을 자신이 먹기 위해 사육한다는 것과, 닭을 기르느라 어떤 고생을 하든 결국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본질을 망각하고 있다.

닭과 인간은 동반자로 지내 왔고, 공장형 축산법이 나오기 전까지 이 관계는 건강하게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야생 가금류는 유전적으로 인간을 상대로 도박을 했고 그 도박은 성공이었다. 인간은 온 세계에 닭을 퍼뜨렸다. 정글에 사는 모성애 강한 어미 닭이 자식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하더라도 못다 이뤘을 원대한 꿈을 현실이 되도록 만든 것이다. (p.59)
저자는 현대 농장 동물의 번식이 대부분 인공 수정으로 이루어진다는 현실을 간과하고 있다. 인간의 필요를 위해 인간에 의해 번식되어 지옥같은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을 '동물이 인간을 상대로 벌인 도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저자의 논리에 따르면 충동구매에 따른 동물 유기를 양산하거나 말거나 인간에 의한 개, 고양이 대량번식과 판매도 정당화되어야 할 것이다.  

II. 정치적 이유의 채식주의가 놓치는 것들

정치적 채식주의자들은 일년생 곡물을 키우는 농사가 생태계를 통째로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곡물은 또 다른 화석 연료이다. 풍요로운 곡물은 사실은 진짜 풍요가 아니다. 화석 연료로 만든 비료로 대량 생산된 곡물은 결국 '줄기에 달린 화석 연료'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 곡물 시장을 지배하는 몬샌토, 카길 등의 거대 곡물 카르텔은 곡물 가격을 생산 비용보다 낮게 형성시켰다. 그리고 낮은 가격과 생산 비용의 차액은 납세자의 돈으로 메우게 되었으며, 이것은 전 세계 소규모 농장과 지역 경제를 망쳤다. 이러한 기업의 공급 장악과 과공급, 덤핑 가격대 형성의 순환구조는 지역 생존 경제를 파괴하고 전 세계 극빈민의 생계를 위협한다. 따라서 미국 곡물은 기아의 원인이지 해결책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몰랐던 사실이다. 정의롭고 지속 가능하며 지역 경제를 살리는 방법을 모색하다 보면 지구에 인간이 너무 많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저자의 주장에는 깊이 공감한다.

그런데 저자가 농업의 해악을 근거로 채식주의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에는 동의할 수 없다. 곡물 생산의 수혜자가 오직 채식주의자뿐인가? 대부분의 곡물이 식용 가축을 위해 재배된다는 것은 오늘날 상식이 되어 가고 있다. 결국 육식하는 사람들이 채식주의자보다 곡물을 더 많이 소비하는 셈이다. 이 책에서 제기된 현대 농업과 곡물 카르텔의 문제점, 윤리적 소비는 채식주의자/비채식주의자 모두가 고민할 문제이지 채식주의자를 탓할 일이 아니다.

III. 영양학적 이유의 채식주의가 놓치는 것들

육, 채식을 가리지 않는 소화 능력은 인류가 멸종하지 않고 살아남게 한 유리한 습성이다. 인간은 오래 전부터 육식을 해왔고 육식을 통한 영양소를 통해 오늘날의 인간이 되었다.(p.236-7) 인간의 뇌가 지금의 크기로 성장한 것은 고기 덕분에 소화 기관의 크기가 줄어든 결과 남은 에너지를 뇌에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p.238) 인류의 조상이 육식을 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p.241) 
인류가 고대부터 육식을 했다는 주장은 현대에도 육식을 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과거에 식인 문화가 존재했다는 사실이 그것을 부활시키는 근거가 될 수 없듯이, 과거에 어떤 것을 먹었다는 사실은 오늘날 그것을 먹는 것의 타당성과 아무 상관이 없다. 게다가 현대 인류는 생존 조건에서 고대 인류와 비교 불가능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인류 진보의 과정에서 여러 문화가 폐기되었듯이, 육식 문화도 이롭지 않다고 판단되면 폐기될 수 있는 것이다. 혹시 아는가? 인간 정신이 진보하고 기술이 발전해서 인류가 살생 자체를 야기하지 않는 음식으로 살게 될 날이 오게 될지?

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채식 때문에 앓게 되었다는 병에 대해서는 자세히 기술했으면서도 채식하던 시절 어떤 음식을 먹었는가는 거의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 의아하다. 저자가 어떤 식으로 채식을 했는가에 대해 내가 이 책에서 찾아낸 문장은 물론 다른 것은 전혀 입에 대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니 그렇게 먹은 것은 모두 탄수화물이었고... 고기에 대한 금기가 너무 엄격해, 단백질을 먹고 싶은 감정마저도 거의 동족 살해와 맞먹는 끔찍한 범죄처럼 느껴졌다.(p.288) 뿐이다. 물론 20년동안 채식 라면만 먹고도 채식을 했다고 우길 수 있겠지만, 전부 탄수화물로 이루어진 식단이 건강에 좋을 리는 당연히 없다. 탄수화물만 먹는 것이 채식이라고 믿는다면 저자는 한참 착각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황당하면서도 저자가 애처롭게 느껴진 부분이 있다. 채식의 영양학적 문제점을 기술한 후 저자는 이제 기름진 음식을 찾아 나설 때라며 지난 20년 동안 굶주려 온 바로 그 음식을 당장 먹자. 그게 무엇이든 지금 당장(p.335)이라고 외치는데, 생태계를 살리는 음식만 먹겠다는 초반의 비장한 결심은 온데간데 없다. 또한 저자는 자, 이 정도면 뭔가 기름진 음식을 찾아 수렵, 채집에 나설 때가 아닌가?(p.288)라고 말하는데, <잡식동물의 딜레마>의 마이클 폴란처럼 멧돼지 사냥이라도 떠날 기세이다. 이러한 히스테리는 참치를 먹고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고동치고, 마침내 먹을 것이 공급되는 환희를 느꼈다(p.379)에서 절정에 달하는데, 참치는 저자가 이 책에서 먹자고 주장하는 지역 생산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저자의 나라인 미국에서 채식으로 병을 치료하고 올바른 채식에 대한 강연, 저술을 통해 채식을 과학으로 확립시키고 있는 닐 버나드, 존 맥두걸, 콜린 캠벨, 조엘 펄먼, 칼드웰 에셀스틴을 비롯한 의학 전문가에 대한 언급을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의아하다. 건강한 채식주의자와 채식으로 병을 고친 사람들은 저자에게 전부 투명 인간일까? 게다가 현대인이 먹는 고기의 지방질에는 수렵, 채집 시대의 고기와 달리 각종 환경 오염 물질이 축적되어 있고 이것이 인체에서 암을 비롯한 문제를 일으킨다는 건 상식인데 이 책에는 일언반구의 언급도 없다.

인스턴트, 정크푸드, 가공식품을 즐겨 먹던 사람이 건강이 나빠진 원인을 육식으로 돌릴 수 없듯이, 저자도 채식을 탓하기 전에 자신이 먹는 것에 문제가 없었는지 점검해 보았어야 할 것이다. 동물성이든 식물성이든 건강에 해로운 음식은 존재하며, 해로운 식품을 즐겨 먹던 사람이 건강 악화의 원인을 육식이나 채식 전반으로 돌리는 건 온당하지 못하다.   

한편, 채식의 영양학적 문제점과 관련해서 이 책의 정보를 신뢰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한 전문가의 리뷰를 링크한다. 

베지닥터 이덕희 경북대 예방의학과 교수의 리뷰:
http://vegedoctor.net/vegedoctor/bbs/board.php?bo_table=column5&wr_id=136

영양 전문가 Ginny Messina의 리뷰:  영어로 된 리뷰인데 이 책의 저자는 영양학 자체에 대한 기본 지식이 부족하고, 책에 인용된 정보 역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며, 저자가 찬양한 지방에 대한 정보도 오류로 가득하다는 내용이다. 
http://www.theveganrd.com/2010/09/review-of-the-vegetarian-myth.html

맺음말: 세상을 구하려면

저자는 총체적 난국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적인 해결책으로 다음을 제시하고 있다.

1. 가능하면 아이를 낳지 말자.
2. 차를 더 이상 몰지 말자.
3. 자기가 먹을 음식을 직접 기르자.

저자는 채식주의자들이 "광신적 추종 심리에 빠져 있다"(p.425)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자신이 한 때 심취했던 광신적 채식주의를 세상의 모든 채식주의에 투사하여 자기 합리화를 이끌어낸 어느 극단주의자의 채식 탈출기이자 사이코 드라마이다. 저자는 '카스리말'이라고 하는 성인의 지식을 얻었다고 하지만, 그녀는 채식 근본주의에서 실천 없는 생태 근본주의로 이동했을 뿐 극단적인 사고 방식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에서 저자가 인류의 현실에 대해 제기한 문제는 채식주의자들이 고민하는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수렵, 채집 시대에 대한 저자의 갈망이나 채식주의나 결국은 같은 고민에서 탄생한 대안이다. 하지만 이 책에 제시된 세 가지 해결책에 동참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저자의 생각에 통렬하게 동의하는 사람들도 대부분은 자기가 먹을 음식을 직접 기를 수 없고 여전히 공장식 축산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는 엄존한 현실에서, 저자의 대안이 오늘 현재 고기를 소비하지 않는 채식주의보다 더 많은 기여를 할 것이라는 생각은 좀처럼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의 비판에서 멈추는 건 별로 의미가 없다. 나는 이 책에 대한 온라인 상의 반응을 검색해 보았다. "뭐든 골고루 먹는 게 좋지," "잘난 척 하더니 고소하다"는 반응들이 보였다. 

사람들이 채식주의에 대해 느끼는 장벽의 원인으로 세 가지를 들자면, 첫째는 "고기를 안 먹기는 어렵다," 둘째는 "채식은 건강에 좋지 않다," 셋째는 "채식주의자에게서 우월감이 느껴져 불편하다"일 것이다.  

첫 번째 "고기를 안 먹기는 어렵다"라는 장벽과 관련하여, 나는 완벽하기 보다는 최선을 다하는데 집중하자고 말하고 싶다. "채식주의자가 되자"는 말보다는 "육식을 최대한 줄이자"는 말이 훨씬 쉽게 느껴질 것 같다. 채식'주의'라는 용어는 많은 사람들에게 완벽에 대한 강박을 심어주어 중도에 포기하게 만들곤 하는데, 완벽을 기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것보다는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오래 지속하여 고통과 희생의 총량을 줄이는 것이 의미있다고 생각한다. 

오로지 비건만이 진정한 채식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채식주의자들이 있는데, 나는 그런 생각이 개인적 만족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채식을 전파하는 데는 역행하는 편협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동물의 고통과 희생을 줄이기 위한 채식 운동은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컨텐츠로 이루어진 '낮고 깊게 흐르는' 전략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육식에서 채식으로 전환하는데 도움이 되는 콩고기를 비롯한 전환기 음식, '고기없는 월요일'과 같이 일상에서 부분적으로라도 채식을 실천하는 방법, 공장식 축산 농장에서 생산된 고기를 피하고 (가격적인 부담 때문에 먹는 횟수를 줄이더라도, 그리고 양껏 먹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동물복지 농장의 고기를 이용하기 등을 홍보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우리가 그리는 세상이 단순히 동물을 먹지 않는 사회는 아니므로 채식 이외의 다양한 실천 방안을 제시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육식 습관은 버리지 못해도 동물의 처우를 개선하는 운동에 동참하는 모든 행동이 동물사랑이다. "나를 반대하지 않으면 다 내편이다"라는 성경 말씀과 같이, 각자 가능한 방식으로 동물사랑을 실천하는 운동의 대열에 설 것을 적극 권장하면, 과거에 어렵게만 느껴졌던 결심도 언젠가는 훨씬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두 번째 "채식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장벽과 관련하여, 채식은 식단에서 단순히 육식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잘못된 채식으로 건강을 해치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올바른 채식에 대한 연구와 홍보가 꾸준히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나라에 채식을 권장하는 의사들의 모임인 베지닥터가 출범한 것은 매우 환영할 일이다. 이와 함께 채식인 스스로가 빛나는 모범이 되어 "채식주의자는 건강하다"는 인식을 일반에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채식주의자에게서 우월감이 느껴져 불편하다"는 장벽과 관련하여, 채식인의 당당함과 윤리의식이 잘난 척으로 비춰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실제로 채식주의에 거부감을 갖게 하는 요인은 "채식주의는 윤리적이다"를 "육식은 야만이다"로 해석하여 채식주의를 철학의 폭력으로 간주하는 태도이다. 이런 거부감 양산에는 육식을 '야만'으로 매도한 일부 채식주의자들의 책임이 크다. 

실제로 나는 "육식은 야만"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몇 번 있다. 채식주의자인 나 자신도 정말 듣기 불편한 말이다. 다행히 채식주의자들의 의식도 발전해서 지금은 듣기 힘들어진 것 같다. 채식을 전하고 싶다면 스스로 자세를 낮춰야 할 것이다. 채식이 윤리적인 선택인 것과 별개로, 채식을 하지 않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채식에 중립적이었던 사람마저 등돌리게 하는 잘못된 태도이다. 이것은 나 자신이 항상 조심했지만 예전부터 저질러왔으며 지금도 고치려고 노력하는 문제이다.  

나 혼자 열 걸음보다는 다 함께 한 걸음씩 나아가면서 옆 사람의 손을 잡아준다면,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초석 삼아 후대가 이어간다면, 언젠가는 인간과 동물 모두 잘 사는 세상이 오지 않을까?

이 분야의 추천 도서와 글:
동물 해방 / 피터 싱어 저 
죽음의 밥상 / 피터 싱어 저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 최훈 저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