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원수는 아버지"... 이게 다 반공 때문이다

[공모-가족이야기]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은 자식들의 '화해'

등록 2013.09.20 12:19수정 2013.09.23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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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함께 맑은 공기 쐬러 나간 날, 나는 뜻밖에 이야기를 듣게 됐다. ⓒ sxc


구순에 접어드는 아버지가 야윈 몸을 휠체어에 싣고 산책을 나서던 날이었다. 아버지는 가벼웠다. 휠체어는 힘들어하지도 않고 스르르 굴러갔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통발 지게에 흙더미를 가득 지고 지리산 자락 작은 골짜기를 메우며 밭을 개간하던, 그 누구보다 강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렸다. 노동의 고됨에도 스스로에 대해 항상 엄격했던 당신이었지만, 세월 이길 장사는 없다는 말을 증명하듯 뼈마디가 앙상한 노인이 됐다. 아버지는 아들의 보살핌이 부담스럽다면서도 모든 것을 내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날, 아버지는 상념에 젖어 휠체어를 밀고 있던 나를 깨우듯 말했다.

"참, 고약한 놈들이야!" 

마치 뒤주 깊숙이 꼭 감춰둔 쌈지를 꺼내는 것 같았다. 나는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물었지만 아버지는 '내가 무슨 말을 했냐'는 표정으로 반응 없이 입을 닫으셨다.

폐결핵과 함께 치매 초기라는 진단을 받은 날부터 시작된 우리 부자(父子)의 대화법이다. 병증은 초기라고 했다. 의사는 결핵이 문제지 치매는 걱정할 정도가 아니라고 했다. 의사는 "자칫 과거와 현재를 혼돈할 때가 있으니 주변에서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며 보호자의 세심한 주의를 요구했다. 믿기지 않았다. 정신력이 강한 아버지가 치매라니.

그 후 난 아버지의 말 한 마디에 촉각을 세우고 과거와 현재를 분리시키기에 바빴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내 염려를 무시하고 싶다는 듯 하루에도 몇 번씩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와 과거를 배회했다.


의외의 이야기... "네 형은 참 불쌍한 아이야"


입원 10일째 되는 날이었다. 병상 위에서 매일 퇴원하자고 조르는 아버지를 달래기 위해 매연 가득한 도시 속 맑은 공기(?)를 찾아 주변 공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아버지는 휠체어를 밀고 있는 나보다 더 힘들어 했다. 아버지는 힘겹게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더니 입을 뗐다.

"얘야, 네 형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야겠다. 내가 정신이 온전할 때 해야지…. 사실 네가 네 형 성효(가명)를 남보다 더 싫어하는 것을 나도 알고 있지만 너희들은 형제가 아니냐?"

아버지는 형과 나의 소원함을 탓하며 지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네가 형을 많이 미워하긴 하지만, 성효는 참 불쌍한 아이다. 네가 얼마나 미웠으면 형이 닭띠라고 해서 닭고기마저 먹지 않겠느냐. 나도 알고 있다. 넌 어려서 닭고기를 참 좋아했었는데…. 도랑에 옻나무가 있었던 거 너도 기억나지? 가을이면 너희들 먹이려고 옻껍질을 벗겨 닭과 함께 푹 고았지. 그때마다 넌 닭 반 마리를 게눈 감추듯 다 먹어치웠으니까 말이야. 네 형이 아프기 전까지는…. 그리고 너, 이번에 내가 이렇게 아파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도 성효한테 연락 안 했지? 그럼 안 된다. 아무리 미워도 네 형이고 내 아들이다."

아버지의 병환으로 우리 부자는 생전 처음으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는 당신이 살아온 과거와 현재가 혼합된 이야기를 매일 말했다. 일제강점기 말에 가담했던 항일운동에 대한 이야기, 건국준비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일어났던 이야기, 박정희의 5·16 군사쿠데타 당시 민주인사 검거령을 피해 걸어서 부산까지 피해 갔던 이야기, 계엄이 해제되면서 남원에 돌아왔으나 직장이 없어 궁여지책으로 외국서적을 번역한 이야기 등등. 아버지는 자신의 겪은 삶을 실타래 풀 듯 이야기했다.

아버지와 나는 약속처럼 형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이날은 달랐다. 아버지가 형과 나와의 관계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이야기. 아버지는 말을 이어갔다.

"너희들이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보고 죽는 게 이 못난 아비의 소원이다. 오래전부터 네게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아비가 못나서 너희들에게 고생만 죽도록 시켰는데…, 내가 뻔뻔한 것 같아 여직 말을 못하고 있었다."

부침 많았던 삶의 마감을 앞둔 아버지의 유언이었다. '생에 마지막 소원'이란 표현으로 자식들의 화해를 바라는 모습은 며칠 동안 과거와 현재를 오가던 치매 환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신동이었던 형은 신경쇠약증에 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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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집에 온 형은 저녁을 먹던 중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내 원수는 아버지다"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몽둥이를 허공에 휘둘렀다. ⓒ 김지현

우리 형제의 불화는 형이 고등학교 2학년일 때 시작됐다. 그때 내 나이가 초등학교 5학년. 형은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고 자랐다. 항상 남을 배려했고, 형제들 중 맏이로 그 역할을 다했다. 내게는 언제나 자랑스러웠던 형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든든했던 형은 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닌 뒤 사라졌다.

어느 주말이었다. 집에 온 형이 저녁을 먹던 중 갑자기 고함을 지르며 "내 원수는 아버지다"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허공을 향해 몽둥이를 휘둘러댔다. 그 뒤로 형은 농약병을 들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는 등 이상한 행동을 반복했다. 또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서 과도를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했다. 사람들은 형이 신경쇠약증에 걸렸다고 했다.

마을 사람들이 형이 무섭다며 정신요양소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아버지는 그들의 요구를 의식적으로 외면했다. 대신 '감마론'이란 정신치료제를 복용시켰다. 그리고 아버지는 매일 프로이드의 심리학·의학 서적을 읽으며 "내가 성효를 다시 사람으로 만들어 놓겠다"고 주문을 외웠다. 형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지리산 자락 작은 암자로 보내졌다. 아버지는 돈을 벌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인 외국서적 번역도 그만뒀다. 형의 '신경쇠약증'은 아버지의 치료 덕분에 완치될 수 있었다.

나는 형이 장남이라는 부담감과 바위처럼 무거운 가난을 회피하기 위해 그런다고 생각했다. 형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전교 1등을 놓치면 어쩔 줄 몰라 했다. 일종의 병이었다. 형이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원서를 쓸 때의 일이었다. 주변에서는 어린 동생들을 책임져야 하니 취업을 위해 전주상고를 가야 한다고 했다. 형은 주변 환경을 강하게 원망했다. 아니, 부담스러워했다.

얼마 전이었다. 보수 성향의 한 잡지에서 낯익은 목사의 기고문을 봤다. 형이었다. 그는 목회활동을 시작하면서 어느 길에 서야 하는지를 놓고 갈등하다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는 길을 택했다고 했다. 형은 요즘도 소년기의 광기어린 행동을 간혹 한다고 한다. 주어진 환경을 회피하기 위한 형의 행동이 현재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쩔 수 없이 형을 만나게 되면 나는 그를 외면해왔다.

"날 잡아서 안 되니 결국 네 형을 괴롭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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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시대 반공표어 중 하나. ⓒ 민족문제연구소

형에 대한 나의 감정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긴 숨을 고르더니 이런 나의 감정을 알고 있는 아버지가 긴 숨을 고르더니 작심한 듯 형이 신경쇠약증에 걸린 동기를 말했다. 아주 조심스럽게.

"1972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던 그해 10월. 유신헌법이 선포됐다. 세상이 많이 시끄러웠어. 다음 해 늦가을이었다. 내가 웃골짝에서 밭일을 하고 있는데 양복 입은 젊은 사람들이 왔어. 그들은 영장도 없이 다짜고짜 내 손목에 수갑을 채우더라. 난 그들에게 애들이 하교할 시간인데 수갑을 풀어 달라고 했지. 작업복 차림이니 옷이나 갈아입고 가자고 했고. 그런데, 그들은 막무가내였어. '지금 차림이 산 사람으로 제격'이라며 마구잡이로 나를 관용차에 태우고 전주 중앙정보부분실로 끌고 갔어.

오랜 시간 조사를 받았어. 증거라고 제시하는 게 번역 작업하다 버린 원고지 파지였다. 네가 그것으로 딱지를 접어 동네 애들과 딱지치기를 했었는데…. 그걸 잘도 주워 모았더라. 생활비에 보태려고, 외국 잡지를 통해 바깥 세상 이야기를 알 수 있어서 번역했던 건데….

너 기억나니? 그때 네 어미와 크게 부부싸움을 했던 걸 말이야. 너희들이 학교 등교 준비에 바쁜 이른 아침 시간에 뒷산에서 거지 하나가 내려와 입을 옷을 달라고 했었지. 네 어미는 안 된다고 했는데 내가 내줬다. 그때 상강(霜降·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이 막 지나서 외면하기 좀 그랬다. 니 어미 생각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었지. 좋은 옷을 준 것도 아니고 겨울 헌 솜옷을 줬는데 네 어미는 '어떤 놈인 줄 알고 옷을 줬냐'며 난리를 쳤지. 네 어미가 그렇게 사납게 언성을 높이는 것은 처음이었어. 고래고래 소리 지르다 울기도 하고…. 

근데 네 어미의 생각이 옳았지 뭐냐. 놈들이 나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준비한 것이었어. 집안에서 나오는 파지 한 장까지 조사해도 안 되니까 가짜 산 사람을 보내 날 옭아매려고 했어. 이도 저도 안 되니 결국엔 내게 몽혼주사(夢魂注射)를 놓더라. 그리고 환각상태에서 북한 공작원과 접촉했다는 거짓 자백을 받으려고 했지. 참 힘들었다. 정말 거짓 자백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너희가 떠오르더라. 애비가 간첩이 된다면 어린 너희들이 어찌 됐겠냐. 정말 잔인한 놈들이었어. 근데 그런 것도 먹히지 않으니 결국 네 형을 괴롭히더라. 네 형이 전주상고 2학년 때 일이었지. 내가 조사받고 돌아오니 네 형도 하숙집에서 쫓겨나 집에 와 있었다. 학교에서 린치를 당했다고 하더라고. 교련 선생한테 당하고 정보과 형사들이 다그치고…. 아비를 간첩으로 만들려는 것이었지. 그때는 애가 정상이었어. 그러나 그 이후로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모르지 않겠냐? 나이가 60이 다 됐는데도 말이야.

상처가 컸겠지. 놈들이 어린아이에게 얼마나 못되게 굴었으면 평생 두려운 눈을 갖게 했을까 싶다. 네 형은 불쌍한 아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네 형이 못나고 심지가 약한 탓이다. 세상에 그보다 더 잔인한 게 얼마나 많은데…. 그것 하나 버티지 못한다면 세상 사람들 중 안 미칠 놈! 하나도 없다." 

아버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는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물기 어린 눈으로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그러더니 "야, 네 형 온다고 했다, 빨리 병원으로 가자"며 나를 재촉했다. 아버지는 간호사를 통해 어렵게 형에게 전화를 했단다. 여름 더위를 몰아낸 가을 햇살이 높고 청청한 하늘 한가운데서 아버지와 나를 포근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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