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만 쓰고 행동은 하지 않는 것 경계해요"

[찜! e시민기자] 충남 태안의 지요하 시민기자

등록 2013.09.27 18:02수정 2013.09.27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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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찜! e시민기자'는 한 주간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린 시민기자 중 인상적인 사람을 찾아 짧게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인상적'이라는 게 무슨 말이냐고요? 편집부를 울리거나 웃기거나 열 받게(?) 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편집부의 뇌리에 '쏘옥' 들어오는 게 인상적인 겁니다. 꼭 기사를 잘 써야 하는 건 아닙니다. 경력이 독특하거나 열정이 있거나... 여하튼 뭐든 눈에 들면 편집부는 바로 '찜' 합니다. 올해부터 '찜! e시민기자'로 선정된 시민기자에게는 오마이북에서 나온 책 한 권을 선물로 드립니다. [편집자말]
"언제 한 번 태안에서 만나요. ㅎㅎ"


9월 마지막 주 '찜e시민기자' 지요하 시민기자에게 받은 이메일 답변서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고민이 시작된다. 그냥 인사말인가, 진심인가? "정말 가도 될까?" 글로 통해 만난 인연이지만 왠지 코드가 잘 맞아 오래 이야기할 것 같기도 하고.

<오마이뉴스> 사는이야기를 읽다보면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민기자들이 궁금해진다. 제주도, 지리산, 거제도, 대구, 광주 등등 글로 통해 본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경험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그래서 전국투어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 본다.

서설이 길었다. 이번 주 소개할 시민기자는 앞서 '왠지 코드가 맞을 것 같다'고 한, 대전충정 지역에서 활동하는 지요하 시민기자다. 65세 나이로 매주 서울에서 여는 시국미사를 다니는 그. 그의 기사에서도 뚝심과 소신이 그대로 전해진다. 이미 지역에서도 기성작가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그가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는 이유가 궁금했다. 다음은 이메일 인터뷰 전문이다.

☞ 지요하 시민기자가 쓴 기사 보러 가기

"틈틈이 꾸준히 쓴 글 '정식기사' 누적 1천 편을 눈앞에"


2009년에 찍은 지요하 시민기자.


- <오마이뉴스> 독자에게 간단한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1948년생이고, 충남 태안 토박이입니다. '고향을 지키는 작가'라는 별칭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추상의 늪>이, <소설문학> 신인상에 단편소설 <정려문>이 당선되어 15년의 낙방 고투 끝에 작가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줄곧 고향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지역문예지 <흙빛문학>과 <태안문학>, 소설전문지 <소설충청>을 창간했습니다. 총 15권의 저서가 있으며, 한국문인협회 태안지부와 한국예총 태안지회를 창립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고, 태안성당 총회장 시절에 태안 앞바다 원유유출 사고를 당해 '기름과의 전쟁'에 몰두한 나머지 과로 누적으로 중병을 치른 경험도 있습니다. 베트남 전쟁 고엽제 후유증에 의한 국가유공자(상이등급 5급)이기도 하고요."

- 최근 시집 <그리운 천수만>을 출간했으며, <태안문학회>에서 활동하시는데…. 지역 활동에 대한 매력은 무엇인가요?
"올해 출간한 시집 <그리운 천수만>에는 '목적시집'이라는 꼬리표가 달렸습니다. 특별한 목적에 의해 지은 시들(축시·헌시·추모시·기념시 등)과 동일 주제의 연작시들만을 묶은 시집이기 때문이지요. 지난해 출간한 시집 <불씨>도 마찬가지이고요. <불씨>는 민주주의의 작은 불쏘시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또 <그리운 천수만>은 조력발전소 건설로 가로림만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가로림만을 지키기 위한 의지의 일환으로, 즉 잃어버린 바다 천수만을 상기하자는 뜻으로 출간한 시집입니다. '그리운 가로림만'이라는 시를 짓지 않기 위해서, 다시 말해 '가로림만의 노래 - 생명의 노래'만을 부르기 위한 내 염원이 시집 <그리운 천수만> 안에 농축되어 있습니다.

1998년 <태안문학회>를 창립하고 <태안문학>을 창간하여 매년 두 번씩 발간하고 있습니다. 태안이 서산군에 속했던 1981년에는 <흙빛문학회>를 창립하고 <흙빛문학>을 창간하여 황무지와 같은 궁벽한 지역에서 눈물겨운 고생으로 '흙빛'을 키우고 가꾸었습니다. 그러다가 1989년 태안군이 '복군(復郡)'되면서 '태안'이라는 지명을 제호로 사용하는 지역문예지의 창간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998년 <태안문학>을 창간했지요.

우리 고장에도 문예지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일종의 사명감이기도 할 것입니다. 지역에서 사는 문인으로서의 책무와 자부심을 안고, 지역의 정신문화와 문예마당을 가꾸고 풍미한다는 일념으로 '고생'을 하는데, 현실적인 보람 같은 건 거의 없습니다. 어느 모로는 악전고투를 하는 셈이지요. 때로는 그것 자체가 보람이요, 즐거움일 수도 있지만…. 인문학이 경시되고 전파매체와 스마트 폰이 사람의 사유를 강제하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전망이 다소 비관적이기도 합니다. 젊은 피의 수혈이 용이치 않아서 더욱 걱정이고요." 
       
- 2000년 가입 후 지금껏 꾸준히 '사는 이야기' 기사를 쓰셨습니다.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쓰게 된 계기가 있다면.
"1995년 지방지 <중도일보>에 장편소설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를 연재하면서(2000년 세 권의 책으로 출간함) 육필작업과 결별하고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99년부터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2000년부터 당시 중1이었던 딸아이가 이메일 주소와 홈페이지를 만들어준 덕에 인터넷 세상에 뛰어들었지요.

처음에는 '안티조선' 사이트인 <우리모두>에 참여하여 언론개혁에 관한 글을 많이 썼습니다. 그 글들 몇 개를 <오마이뉴스> '자유게시판'에도 올렸는데, 내 글을 읽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분들이 내게 '시민기자' 참여를 권유하고 안내를 해주어서 2001년부터 정식으로 <오마이뉴스>와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처음 2~3년 동안은 '지요하의 참된 세상 꿈꾸기'라는 이름의 고정 코너에 글을 올리는 영광도 누렸지요. 벌써 12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세월 속에서 틈틈이 꾸준히 글을 써서 '정식기사' 누적 1천 편을 눈앞에 두게 됐습니다."     

- 오랫동안 '사는 이야기' 분야에서 기사를 쓰고 계시는데요. 어려운 점이 있다면.
"나는 천주교 신자로서 신앙과 삶을 일체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으며, 또 시도 짓고 소설도 쓰는 문인으로서 내 문학과 삶이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런 분명한 가치지향과 추구의지로 글을 씁니다.

'사는 이야기'는 내 일상생활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고, 내 삶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는 이야기' 속에는 정치적인 이야기. 이념적인 얘기들도 포함되기 마련입니다. 내 생활이나 삶에서 정치문제와 사회문제들을 분리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나는 정치문제와 사회문제를 다루는 내용의 글들도 '사는 이야기' 형식으로 진술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공감과 설득력을 배가시킨다는 생각도 합니다.

또 나는 책상 앞에 앉아 글만 쓰고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을 경계하고 혐오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는 어려움들을 무릅쓰고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시간 쓰고 돈 쓰고 고생하는 일도 많이 합니다. 2010년 11월부터 2011년 11월까지 매주 월요일 서울 여의도에 가서 4대강 파괴사업 중단을 촉구하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거리미사'에 참례한 것도, 2012년 7월부터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대한문미사'에 매주 참례하는 것도, 그리고 전국 곳곳의 '생명·평화미사'에 참례하는 것도 실천과 행동을 중요시하는 내 성품으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실천과 행동 속에서 나는 '생동하는 글'을 쓰고자 합니다."

- 기억에 남는 독자가 있다면 소개해 주세요. 또, 기사 댓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요?
"기억에 남는 독자도 많은 편입니다. 2005년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제수씨를 추억하는 글들을 썼을 때는(2006년) 한 분 독자로부터 내 글 때문에 <오마이뉴스>에 들어온다는 댓글을 접하기도 했지요(관련기사: 회한의 슬픔 속에서 이제는 그리움이... ).

몇 해 전 대북지원을 옹호하는 글과 2005년 평양과 묘향산을 보고 와서 '방북여행기'를  썼을 때는 어느 독자 분들이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내 노친에게 빨갱이라는 욕을 했다가 도리어 내 노친으로부터 "우리 집이 천주교신자 집인데 어떻게 빨갱이일 수 있느냐, 얼빠진 소리 말라!"고 호통을 당한 일도 기억이 납니다.

수많은 댓글들을 보노라면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전문 댓글꾼'도 많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댓글꾼들 가운데는 '알바'들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왔지요. 오늘의 국정원 사태와 관련하여 모종의 의심과 확신도 하게 됩니다."  

시국미사, 올해 아흔이신 노친을 모시는 일과 내 건강 때문에 고심

지요하 시민기자.


- 시민기자를 하면서 특별한 경험이 있다면.
"군부대에서 의문사한 가족(오빠)의 사연을 내게 토로하면서 취재기사를 부탁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그 요청을 거부할 수 없어 그 여성과 만나 강원도 전방부대를 간 적이 있었지요. 그 부대 수사관계자의 브리핑을 듣고 질의도 하고 돌아와서 기사를 써서 <오마이뉴스> 지면에 올렸는데, 가족들로부터 감사 인사를 접하고 국방장관의 답변서도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 쓴 기사('교수 부부가 7년째 천막농성하는 이유는?')는 기사 작성과 송고를 가장 오래 끈 글이었습니다. 취재와 인터뷰는 5월 말에 했는데, 8월 말에 송고를 했으니…. 기사의 주인공들인 김영곤 교수와 부인 김동애 교수를 2011년 11월 여의도 '거리미사'에 참례하면서 만났습니다.

그분들은 내가 소설가이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라는 것을 알고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으로 내게 자료들을 보내왔지만 미안해서인지 명확하게 기사를 부탁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도 모른 척하기는 미안한 일이어서 취재를 결심하고 지난 5월 인터뷰를 했지요. 그런데 걱정이 앞섰습니다.

편집부에서 작은 기사로 처리해버리지는 않을까, 그러면 나도 체면이 서지 않고 더욱 미안한 일일 터…. 그런 묘한 부담감 때문에 기사 작성이 오래 걸렸습니다. 다행히 중요 추가 사항들도 포함이 되었고, 또 두 번째 글은 '오름' 기사가 되어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지요. 편집부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활동하는 것에 대해 지인들의 반응은 어떤지요?
"고장의 내 또래 친구들 중에는 인터넷 언론매체를 접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정보가 한정되어 있는, 어느 모로는 '까막눈'들이지요. 그런데 팔순 노인 중에 내 글을 열심히 읽어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가끔 격려 전화도 주시는데,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지난해 대선 직후 내 글이 두어 개 '오름' 기사로 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사들을 우리 고장에서도 읽은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내 글에 관한 얘기가 한동안 우리 고장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지요. 성당에서나 거리에서 나를 대하는 눈빛들이 예전과 많이 다르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지요. 내 글에 댓글을 달고 원고료를 보태준 독자들 중에는 고교생 시절 나로부터 특강을 들었음을 적어놓은 내 모교(태안고등학교, 남녀공학)의 여성 후배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고마웠는지…. "
    
- <오마이뉴스> 기사 중 주로 많이 보는 기사는 어떤 것인가요?
"오전과 오후 그리고 밤에(도합 하루 세 번씩) <오마이뉴스> 기사들을 읽습니다. '오름' 기사들은 거의 읽고, 특히 정치면과 언론 관련 기사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블로그 기사들도 빼놓지 않고 읽습니다."   

- 지금껏 쓴 기자님의 기사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기사가 있다면?
"2005년 10월 평양과 묘향산을 보고 와서 여러 번에 걸쳐 연재 형식으로 올린 '방북여행기'가 가장 마음에 들고, 2008년 태안 앞바다 '기름과의 전쟁' 관련 기사들도 기억에 남습니다."

- 요즘은 시국미사를 다니시는 것 같은데 분위기는 어떤가요? (간략히)
"큰 병고를 치르신 올해 연세 아흔이신 노친을 모시는 일과 내 건강문제 때문에 고심을 하는 가운데서도 최근 '천주교 평신도 1만인 시국기도회(11일 저녁 청계광장)'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국정원 철폐와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시국기도회(23일 저녁 서울광장)'에 참가하고 왔습니다.

11일 저녁 청계광장에서는 마지막으로 '자유발언'도 했고 시낭송도 했지요. 분위기는 뜨거웠습니다. 국정원의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공작으로 촛불이 한 풀 꺾이는 것 같은 상황에서 천주교 성직자와 수도자와 평신도들이 민주주의 촛불을 다시 살려내리라고 확신합니다."

- 최근 7년째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부부의 인터뷰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떤 기사를 쓰고 싶나요? 계획이 있다면 간략하게 써 주세요.
"7년째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부부 교수에 대한 인터뷰 기사의 후속으로, 부당한 처우 속에서 착취를 당하며 고통스럽게 대학 강사 생활을 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에 대한 상세한 기사(재판 과정을 포함하여)를 쓰고 싶습니다. 현재 취재 준비 중입니다."

- 활동하시는 곳이 충남 태안이신데 <오마이뉴스>와 관련하여 그곳 정서는 어떤가요?
"전에는 <오마이뉴스> 독자들이 많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근래 들어서는 <오마이뉴스> 독자들이 많아졌다는 것을 피부로 느낍니다. 지난 대선을 전후하여 내 글들이 여러 개 '오름' 기사로 오른 것도 우리 지역의 독자 확충에 다소 기여를 했지 싶습니다."

- 앞으로 시민기자로 활동하게 될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먼저 수구 족벌언론들의 '대항마'라는 인식을 가졌으면 합니다. 종이매체들 중에서도 수구 족벌언론들은 점점 영향력이 줄어들고 종국에는 쇠락의 길을 면치 못하리라 예견합니다. 또 종편 등의 방송 매체들이 더욱 기승을 부리겠지만, 국민의 지적 수준을 높이는 데는 인터넷 매체들이 앞으로 더욱 큰 역할을 하리라고 믿습니다. 올바른 가치관과 국민의 지적 수준 향상을 생각하면서 사명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지속적으로 참여하여 시민기자로서의 자기 몫을 다해주기를 바랍니다."  

- 그밖에 <오마이뉴스>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대한민국 땅에서 세계 최초의 성공적인 인터넷 언론매체로 자리매김을 한 <오마이뉴스>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지니고, <오마이뉴스>가 한국의 양심적이고 중심적인 언론매체로 더욱 성장할 수 있도록 독자 여러분 모두가 음으로 양으로 힘껏 성원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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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자유를 꿈꾸는 철없는 남편과 듬직한 큰아들, 귀요미 막내 아들... 남자 셋과 사는 줌마. 늘, 건강한 감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이 남자들 틈바구니 속에서 수련하는 마음가짐으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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