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살 딸의 '시'... 남편은 울었고 '칼퇴'했다

[그 여자 그 남자의 다.다.다 ⑧] 저녁이 있는 삶

등록 2015.04.01 08:16수정 2015.04.0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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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13년. 서로의 관점에서 이야기 해보려 합니다. '그 여자 그 남자의 다.다.다(다르게 들리지만 다르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입니다. 그 남자 이야기는 남편 지용민 시민기자가, 그 여자 이야기는 아내 박보경 시민기자가 썼습니다. - 기자 말


[그 여자 이야기] 아이들은 오늘 '모험탐험대'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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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라 오버" 어느날 남편이 사 가지고 온 '무전기'. 바로 옆에서 '나와라 나와라' 하는 모습이 귀엽다. 생각보다 활용도가 무척 높다. ⓒ 박보경


남편이 일찍 오는 날이면 우리 가족은 저녁산책을 나간다. 주변에 딱히 갈 만한 곳은 없다.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도는 게 대부분이다. 어느 날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아이들은 그것을 '모험탐험대'라고 불렀다. "아빠 우리 모험탐험대 나가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주고 싶었던지 모험탐험대의 횟수가 늘어나자 남편은 '손전등'을 준비했다. 아이들은 가로등으로 볼 수 없는 단지의 구석구석을 손전등으로 비춰가며 뛰어 다녔다. 그렇게 반년 가량의 시간이 흘렀다. 손전등이 식상해질 무렵 남편은 이번에는 '무전기'를 준비했다.

모험탐험대를 떠날 때, 이제는 손전등 대신 무전기를 들고 나간다. 큰 아이와 남편이 한 팀, 작은 아이와 내가 한 팀을 이룬다.

"어딘가, 어딘가, 어딘가." 작은 아이는 늘 똑같은 말을 세 번씩 한다.


"치직...치직... 우리는 지금 놀이터를 지나고 있다. 오버." 큰 아이는 제법 무전기를 사용할 줄 안다.

"알았다, 알았다, 알았다." 역시 작은 아이다.

무전기 소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낏 쳐다본다. 휴대폰을 사용하는 아이들은 많지만, 무전기를 사용하는 아이들은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보기엔 별것 아닌 이 놀이를 아이들은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저녁 무렵 아빠에게 전화를 걸면 "여보세요?"를 하기 전에 "아빠, 오늘 저녁에 모험탐험대 할 수 있어요?"라고 묻는다.

"아빠를 일찍 퇴근시켜주세요"

안타깝게도 모험탐험대는 자주 할 수 있는 놀이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남편의 귀가가 늦기 때문이다. 남편은 평범한 직장인이다. 위로는 상사가 있고 아래로는 후배들이 있는 지극히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매일 일찍 귀가해서 아이들과 놀아주기를 기대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나는 아빠가 무서웠다. 아빠와 놀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기계 기술자이셨던 아빠는 늘 내가 자고 있을 때 집에 오셨다. 아침에 잠깐 아빠의 얼굴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런 아빠가 낯설고 어려웠다.

아빠가 일찍 유일하게 오시는 날은 노란 월급봉투를 가져오시던 날이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나는 아빠보다 아빠 손에 들려있던 통닭을 더 기다렸다. 그 때 우리 아빠가 일찍 오셔서 가족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셨다면 나는 아빠를 낯설어하지 않았을까?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우리 아이들과 남편의 관계를 보면서 문득 궁금했다.

며칠 전 남편은 저녁 8시께 집에 도착했다. 저녁을 거른 남편이 가장 일찍 올 수 있는 시간이다. 현관 문소리가 나자 작은 아이는 무전기부터 찾았다. 큰 아이는 남편에게 달려가 뽀뽀를 한 후 부지런히 외투를 챙겨 입었다. 아이들 성화에 끓고 있던 김치찌개에 불을 끄고 우리만의 모험탐험대를 떠나야 했다.

남편과 첫째가 먼저 집을 나서고, 둘째와 내가 한 팀이 되어 뒤따르며 무전기로 이야기를 나눴다. 선두가 어디를 지나고 있는지, 가는 길에는 무엇이 있는지 무전기를 통해서 흘러 나오는 첫째의 목소리는 상기돼 있었다. 배가 고팠던 남편은 동네 떡볶이 집으로 방향을 바꿔 우리에게 알려줬다. 그 날 우리 집 저녁메뉴는 떡볶이와 순대였다.

다음 날, 우연히 청소를 하다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메모지를 보고 나는 하던 일을 멈추었다. 그날 오후 늦게 남편에게 메시지로 사진을 보내주었다. 남편은 그 날도 8시에 집에 들어왔다.

나는 우리 딸이 부럽다. 아빠와 스스럼없이 지낼 수 있고, 아빠와 즐겁게 놀 수 있는 우리 딸이 부럽다. 지극히 평범한 노동자였던 우리 아버지의 저녁이 좀 더 여유로웠다면 나도 우리 딸처럼 어렸을 때부터 아빠와 좀 더 친하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다만 그것이 아쉽다.

[그 남자 이야기] 딸의 시 한편을 읽고 '칼퇴'한 아빠 이야기 

오후 5시에 문자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내가 보낸 문자였다.

"오늘 늦어?"

단순히 퇴근시간을 묻는 질문이지만 가끔 짜증이 날 때가 있다. 자신이 없어서다. 내 퇴근시간은 온전히 나에게 달려 있는 문제가 아니다. 상사가 퇴근하지 않으면 "먼저 가보겠습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눈치 O.T(눈치 오버타임)'가 존재한다. 일이 갑자기 주어지는 경우도 있다.

"글쎄, 현재로서는 바로 퇴근할 수 있을 듯. 근데 왜?"
"큰 애가 시를 썼는데... 한 번 봐."

아내는 작은 메모지를 사진 찍어서 문자로 보내왔다. 그리고 그날 나는 '칼퇴'했다. 시(詩)는 8살 아이가 쓸 수 있을 정도로 단순했다. 두 문장뿐이었다. 그런데 묘한 울림이 있었다. 다음날 나는 시를 SNS에 올렸다. 아는 예술인 한 분은 "와 닿는다"는 댓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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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장점" 8살 딸이 지은 시(詩) '밤에 장점'. 남편은 이 시를 보고 '칼퇴'했다. ⓒ 박보경


제목 : "밤에 장점"

사람이 많다
아빠가 온다

평소 좋아하는 두 줄짜리 시가 있다. 정현종 시인의 '섬'이 그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대학교 신입생 때 접했던 '섬'은 20살 감성에 묘하게 와 닿았다. 큰 아이의 시는 '섬'보다 더 짧다. 그런데 더 와 닿았다. 아이의 눈으로 사실을 말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 역시 8살 때에는 그런 시선으로 아빠를 기다렸을 것이고, 세상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어느덧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서 나는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됐다. 세상에 길들여진 것이다. <어린 왕자>에서 작가는 "길들여지다"는 표현을 "사이가 좋아진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그 사이에 나는 세상과 사이가 좋아진 것일까. 

'저녁이 있는 삶'... 과연 우리에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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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안 하는 직장인 거의 없어" 직장인 야근문화를 보도한 기사. <헤럴드경제> 2014년 11월 17일자 ⓒ 헤럴드경제PDF


딸아이의 시를 보다가 문득 지난 2007년 미국에서 본 광경이 떠올랐다. 미국 동부지역을 2주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도로 위로 차들이 시원시원하게 움직였다. 한낮의 태양이 아직 하늘 위에 떠 있는 시간, 갑자기 도로가 막히기 시작했다. 택시기사에서 물어보니 '러시아워'라고 했다. 시계를 봤다. 오후 4시 30분이었다.

미국은 출근이 빠르다. 그리고 퇴근도 빠르다. 오후 4시 전후해서 퇴근하다 보니 '회식문화'가 낯설다. 뉴욕 등 대도시를 제외하면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여는 식당, 술집을 찾기도 어렵다. 일찍 퇴근한 아빠들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그네들은 '저녁이 있는 삶'을 보내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한 취업포털에서 지난 2월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응답자(882명)의 89%가 "야근 때문에 삶의 질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92%가 "야근을 한다"고 답했다. 놀랍게도 "주5회"가 29%로 가장 많았다. 야근사유로는 '일' 때문이 55%로 가장 높았고, 인상적인 대목은 "상사 때문에 한다"'는 답이 31%로 2위를 기록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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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11시간 보내는 한국 직장인의 하루 설문조사 결과 한국 직장인들은 저녁이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이를 보도한 MBC 2015년 3월 29일자 ⓒ MBC갈무리


지난해 말 후배 한 명이 결혼했다. 그의 나이 30대 중반,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결혼이었다. 얼마 전, 그를 만났다. 2세 계획이 있는지를 묻는 내 질문에 허탈하게 웃으며 그가 한 대답이 아직까지 여운으로 남는다.

"행복하려고 결혼한 거잖아요. 맞벌이하는데 지금 상황에서 아이를 낳으면 아이를 볼 사람도 없고, 감당도 안 되고 더 불행해질 거 같아요. 계획이 없습니다."

큰 아이의 두 줄 짜리 시를 보고 나는 눈가가 뜨거워졌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르고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금보다 더 잘 이해하게 되면, 그래도 큰 아이는 "밤에 장점"이란 시에 '아빠'를 등장시킬까. 한국의 밤에 과연 장점이라는 것이 있는지, 딸아이의 글에서 나는 표현하기 어려운 안타까움을 느꼈다.

지난 대선 당시, 모 후보의 캐치프레이즈가 '저녁이 있는 삶'이었다. 운치 있게 들렸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그 말이 지금처럼 절실하게 '와 닿지'는 않았다. 당시 나는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사이에 상황이 변했다. 그가 됐든 누가 됐든 다시 그런 캐치프레이즈를 가지고 나온다면 나는 진지하게 지지를 고려해볼 생각이다.

단, 대통령이 된다면 공약은 지켜라!
#야근 #저녁이 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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