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활어'로 쓰이는 일제 잔재 '말'... 해법은?

등록 2015.06.03 16:51수정 2015.06.03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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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라성(綺羅星) 같은 선배의 결혼(結婚)

이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결혼(結婚)'과 '기라성(綺羅星)'이라는 단어는 순수 우리말이 아니고 일제 식민지 치하의 잔재인 일본식 한자어다. 일본식 한자어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자어 중 우리 고유의 한자어나 중국에서 온 한자어가 아닌 일본에서 만들어져 한국과 중국 등의 한자 문화권에서 사용하고 있는 한자어를 말한다.


'결혼(結婚)'은 혼인이나 혼례, '기라성(綺羅星)'은 빛나는 별이라고 해야 순수한 우리말 표현이다. 예로부터 남과 여가 예식을 치르는 것을 혼인이라고 불렀으나 식민지 치하의 조선에서 일본어인 '결혼'이라는 표현이 유식하고 현대적인 표현인 것처럼 유행하면서 점차 '결혼'이 일반적으로 사용됐고 혼인이라는 말은 사어가 됐다고 한다.

방송 등에서는 흔히 우리말을 지키기 위해 "한국어에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자"고 한다. 하지만 이 말 자체에는 모순이 있다. '청산'이라는 단어가 일본식 한자어로 일제강점기 이후 전해진 말이기 때문이다. 일본식 한자어를 사용해 우리말을 지키자고 주장하는 다소 우스운 꼴이다. 이토록 우리 말 속에는 일제 식민 지배의 잔재인 일본어 표현이 생활  깊숙이 침투돼 있다.

누구나 일본어라는 자각 없이 자연스럽게 사용하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일본식 한자어가 25%를 차지하는 국어 사전으로 국어를 공부하고 있다. 국가에 대한 지각도 완벽하지 않은 유치원 시절부터 일본에 대해 부정적으로 학습 받으며 자라 온 한국인은 왜 아직도 한국어에서 일제 시대의 잔재를 지우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일본식 한자어를 쓰는 것이 일제의 잔재라고 할 수 있을까?

현대 정치, 법, 행정, 과학 등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사용되고 있는 한자어 표현의 십중팔구는 일본에서 새로이 만들어 낸 한자어 즉 일본식 한자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적(的)'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영어의 '-tic'을 적절히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 내 탄생했다. 사형(死刑)이라는 말은 일본식 한자로 우리말로 하면 '정형(正刑)'이다.

또 우리말은 원래 단음절 한자가 독립된 단어를 구성하지 못하는데 '부(父)','모(母)','자(子)' 등 아버지, 어머니, 아들을 단음절인 한자로 표현하는 것도 일본식 한자 표현이다. 대한민국의 헌법 조문 중 29%가 일본식 용어고, 국가의 관광지를 홍보하는 곳에 쓰인 '명소', '경관' 등조차 일본식 한자어다. 이외에도 축제, 지하철, 애매, 민주주의 등 일상 생활에서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단어들이 일본식 한자인 경우가 많다. 


언어는 그 나라의 거울이다. 언어에는 한 나라의 역사, 문화 등 모든 것이 비친다. 오랜 시간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아직도 프랑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 당시 국가라기 보다 부족의 개념이 강했던 아프리카의 문화적 특성상 국가로의 발전 과정에서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돼 프랑스어가 자연스럽게 그들의 언어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제 치하의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정치, 문화, 사회 전반적으로 반세기에 가까운 36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제의 영향력 하에 놓였고, 그 시기에 우리의 언어 또한 일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거울에서 일제라는 얼룩을 지울 수 없는 것은 우리의 역사 속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일제에게 36년의 지배를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에 일본식 한자어가 이렇게나 많은 것은 아니다. 20세기 초, 당시 서양 학문을 동양화하는 데 힘을 쓸 수 있었던 나라는 일본이 유일했다. 그 결과 서양의 학술 용어, 경제 용어, 사회 용어 등 근대에 탄생한 단어들을 일본이 일본어로 전부 번역하였고 그 단어들이 그 당시 이러한 작업을 하지 못했던 일제 식민지 치하의 한국과 중국 등에서 쓰이게 되었다. 광복 70주년을 바라보는 2014년 현재도 우리는 그 당시 성립된 단어들을 '우리말'로 학습하고 사용하고 있다.

매년 한글날이 찾아오면 어김없이 행정, 금융계, 법조계 등 할 것 없이 모두 업무에 쓰이는 용어에서 일본식 한자 표현을 우리말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시도들만 꾸준히 있었을 뿐 그들이 주장하는 '순화'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정이다. 여기서 '순화'라는 것도 순우리말로 바꾸는 것이 아닌 '중국식 한자어'로 바꾸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버젓이 같은 의미로 쓰이는 우리말이 있음에도 무분별하게 일선에서 쓰이는 '야마', '마와리' 등의 일본어나  '~해 버렸어', '~되어 버렸어' 등 국어 문법에서는 찾아볼 수도 없는 일본식 피동 표현 등은 고쳐 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살아있는 말로써 사회에서 활발하게 쓰이고 있는 활어인 일본식 한자어를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사어가 된 우리의 고유어로 바꾸는 것이 한글을 바로 세우는 길은 아니다.

약속(約束)이 일본식 한자어라고 하여 약속을 언약(言約)으로 고쳐 써야 한다고 한들 주말마다 하는 약속이 언약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단어가 사회적으로 사용되면서 갖게 된 미묘한 의미나 뉘앙스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일본식 한자어인 장소(場所)와 중국식 고유 한자어인  위치(位置)는 쓰임새도 다르고 의미의 차이도 확연하여 장소를 위치로 바꾸어 사용할 수 없다.

명실상부 20세기의 동북아 패권은 일본이 장악했다. 그리하여 한자 문화권을 공유하는 한국과 중국 등에 그들의 언어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우리는 지금 일본식 한자어 없이는 의사 소통이 힘든 세상에 살고 있다. 그들이 표준으로 만든 단어들을 자의건 타의건 받아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잔재(殘滓)라는 말은 과거의 낡은 사고 방식이나 생활 양식의 찌꺼기를 의미한다. 사회 전반에서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는 일본식 한자어를 생활 양식의 찌꺼기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일본식 한자어는 일본이 만들어 동북아의 한자를 쓰는 문화권에서 공유하고 있는 단어다. 20세기 일본이 한자 문화권에서 일본식 한자어를 표준으로 만든 것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우리가 만든 표준을 제시해 그들과 공유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일제의 잔재가 사라지지 않을까.
#일제강점기 #한글 #일본식한자어 #한국어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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