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프린터 사업부 해외이전... 협력업체는 '휘청'

[나는 고졸사원이다 32] 프린트 사업 철수

등록 2015.12.18 09:40수정 2016.05.24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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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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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직 대기업 프린트 사업부가 해외 이전을 결정하자 협력업체였던 우리 회사의 생산직 사원들도 줄줄히 실직을 하게 되었다. ⓒ pixabay


산업기능요원으로 내가 근무하고 있던 회사는 모 대기업의 협력업체였다. 그 대기업의 프린터와 TV, CCTV를 임가공으로 생산하는 회사였는데 내가 입사했을 당시 생산라인은 매일 잔업 스케줄이 있을만큼 바빴다.

자재과에서 그 대기업에 들어가 프린터 자재를 받아오던 '납품사원' 업무를 끝내고 CCTV 라인의 수리사가 된 뒤 바쁘던 우리 회사에도 조금씩 변화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바로 그 대기업의 국내 프린터 생산 라인 철수 결정 때문이었다. 단가가 낮은 프린터의 경우 인건비가 비싼 국내에서 생산해서는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는 판단에서였다.

우리 회사는 매출중 상당 부분이 프린터 생산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당연히 생산직 사원들중에는 프린터 생산 라인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 중에는 부산에서 산업기능요원이 되기 위해 올라온 내 친구들도 있었다. 윗 사람들에게는 일찌기 이야기들이 오갔겠지만 현장에는 프린터 생산 라인이 철수된다는 말이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아 생산 라인은 중단됐다.

프린터 생산이 중단되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회사에서는 인건비가 싸고 막 부릴수 있는 산업기능요원들과 외국인 근로자들만 추려 TV 생산 라인으로 보냈다. 그들로 인해 TV 생산 라인에 근무하던 일반 근로자들 역시 일자리를 잃었다.


같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지만 부서가 달라서 얼굴도 잘 못보던 친구들과 그렇게 한 현장에서 근무를 하게 됐다. 친구들은 TV 조립 라인에 투입됐는데, 그때는 CCTV도 생산 물량이 줄어들어 TV 라인과 통합 관리를 하던 시절이라 매일 같이 얼굴보고 일할 수 있었다.

프린터 생산 라인에서 일하다 TV 라인으로 넘어온 사람들은 한동안 적응을 하는 데 힘들어 했다. 하지만 이내 적응을 했고 생산 라인은 빠르게 안정돼 갔다. 프린터 3개 라인이 중단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은 것 밖에는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그렇게 우리 회사 생산 라인에는 산업기능요원, 외국인 노동자, 40대 이상 주부사원이 주를 이루게 됐다. 아주 싼 인력들만 남은 셈이다. 회사에서는 어떻게든 인건비를 줄여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에 선택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사 브랜드를 출시한 유통사업부의 홈쇼핑 '완판'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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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통사업부 프린트 사업이 끝난 뒤 전무님의 완강한 의지로 중국산 저가 제품을 수입해 자사 브랜드를 달고 국내에 유통시키는 '유통사업부'가 출범되었다. ⓒ pixabay


우리 회사에는 3명의 경영진이 있었다. 상무, 전무, 사장으로 구성된 임원분들이었는데 3명은 모두 각기 다른 생각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었다. 사장님은 당시 연세가 많으셨고 아주 검소한 분이셨다. 얼마전까지만해도 20년 넘은 고물차를 타고 출퇴근을 하셨다는데 사원들 사이에서는 '자린고비'로 불렸다. 그런 검소함으로 회사를 지금껏 키워 오셨다고 한다.

그리고 사장님 밑으로 전무님과 상무님이 계셨는데 전무님은 아주 욕심이 많으셨다. 어떻게든 자린고비 사장님을 밀어내고 사업을 확장하려는 의지가 강한 분이었다. 전무님의 완강한 사업확장 의지로 내가 입사한 다음해에는 회사에 자체 브랜드를 가진 '유통사업부'가 출범 되기도 했다.

그리고 상무님은 관리형 임원이었다. 매일 같이 뒷짐지고 현장을 순찰하시는데 지나갈 때마다 관리자분들을 불러세워놓고 설교를 하시곤 했다. 당시 상무님의 아내분이 완제품 조립 라인의 앞 공정인 수삽 라인에서 검사 작업자로 근무를 하셨는데 상무님께 '깨진' 관리자들은 상무님의 아내분이 불량 검출력이 떨어진다며 찾아가 괜스레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프린터 생산 라인이 멈추고 사원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을 때 사장님과 전무님의 권력 싸움이 시작됐다. 있는 것을 지키려는 사장님과 더 큰 사업을 해야 한다는 전무님의 의견 대립이었는데 결국 전무님의 뜻대로 자사 브랜드를 내건 '유통사업부'가 출범했다.

우리 회사 유통사업부는 당시 중국 시장에서 싸게 물건을 들여와 국내에 판매하는 '무역'사업부였다. 차량용 냉장고, 미니스쿠터, 홈시어터, 어린이 장난감등을 가져와 국내 시장에 판매를 했다. 마진율은 괜찮다고 들었지만 TV 홈쇼핑에 출연해 '완판'을 기록했던 어린이 장난감에서 품질 문제가 발생해 50%의 반품율을 기록하는 바람에 또 한 번 회사는 휘청거렸다.
덧붙이는 글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
#협력업체 #프린터 #유통사업부 #홈쇼핑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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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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