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 누진제보다 생활의 패러다임을 바꿀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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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호(cirang)등록 2016.08.24 10:57
요즘은 교수나 성직자 등의 훈계와 진리의 말씀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나쁜 말 없고 내 인생에 해 될 게 없는 말씀들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내 인생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아서다. 뭐, 어차피 그 고귀한 말대로는 살 수 없기도 하고 말이다.

대신 드라마에서 주옥같은 말을 길어 올릴 때가 있다. 얼마 전에 종영된 <38사기동대>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IMF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 마인드가 개조됐다. 돈이 종교고 돈이 부모고 돈이 친구란다. (중략) 못 먹어도 돈 무조건 돈이란다."

공감한다. 돈에 집착하기로 따지면 조선시대 이서방은 안 그랬겠는가마는 1997년 국가부도 사태를 겪은 뒤로는 이게 너무 심해졌다. 심해지기만 한 게 아니라 돈보다 중요했던 가치가 조금은 있었는데 싹 사라졌다. 체면, 공동체의식, 시대정신, 안전 등등 돈은 안 되지만 사람들에게 안정감과 희망의 근간이 되어 주었던 의미들이 폄훼되고 멸절되었다.

나는 최근에 화제가 되었던 전기요금 누진제 논란에서 다시 한 번 그것을 느꼈다.

전력산업과 전기 요금 체계의 불합리성을 공격하고 한국전력(아래 한전)의 과욕을 지적하고 그게 문제라고 말하지만 누진제 논란에서 가장 핵심은 한전이 내 통장에서 빼가는 돈이다. 그래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요금 폭탄', '전기요금 폭탄'이었다. 그렇게 에어컨은 실컷 돌리되 돈은 아꼈으면 하는 욕망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왔다.

전 국민이 에어컨을 끼고 사는 것도 아니고 1~2만 원 전기료로 여름을 이겨내는 세대도 많을 테지만 누군가 대신 나서서 전기료를 낮춰준다는데 굳이 반대하는 국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하는 호구가 되는 첫 걸음일지도 모른다.

전기 원료는 대부분 수입품이다. 수도 없이 들었다. 대한민국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고. 2016년에도 대한민국에서 기름이 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전기는 여전히 수입품인 셈이다. 그런 사정에 비해 우리는 전기를 아끼려고 하지 않는다. 돈만 있다면 걱정없이 펑펑 쓰는 편이다.

이번의 논란에서도 '아껴쓰자'라는 구호는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마음껏 쓰고 돈은 적게 내고 싶다는 게 핵심이었다. 이상하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우리나라에서 수입품을 이만큼 펑펑 쓸 수 있는 게 또 있었던가.

이게 가능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아직 한전이 민영화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는 핵발전소가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공기업 민영화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이번 논란 중에 한전은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요금 체계의 불합리성부터 검침의 비일관성까지. 무엇보다 국민의 요구를 무시했고 거기에 국민은 답답했다. 전기 요금 개편은 절대 없을 거라고 한 어제의 말을 오늘 바꾸었다. 국민이 아닌 어딘가의 눈치를 보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러다보니 한전은 국민들 사이에서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다.

이 와중에 박근혜 정부는 MB 정권과 같이 공기업 민영화를 늘 노리고 있으며 한전도 그 대상이다. 최근에는 공공기관 상장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기도 했다. 미운털 한전이 민영화 되어 탈을 바꾸고 싹싹한 대기업이 되면 기분은 좋을지 모른다. 하지만 전기요금은 훨씬 더 많이 내야 한다. 그때는 누진제를 제 아무리 고쳐도 전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비싸진다. 소탐대실에 주의해야 할 대목이다.

하지만 이건 핵발전소의 폭발력에 비하면 사소하다.

전기 요금을 개편해서 전기를 마음껏 쓰게 되면? 그 다음 수순은 뭐겠는가? 수요가 늘었으니 공급도 늘리자고 할 것이다. 설사 실제로는 전기 소비가 크게 늘지 않았다고 해도 통계 운운하며 다음 여름의 정전사태 위험을 말하는 게 수순이다. 그런 식으로 기존 핵발전소 증설 계획을 막는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게 된다. 핵발전소를 없애야 할 판에 증설에 힘을 실어준 꼴이 된다.

핵발전소는 없애야 한다. 그래야 우리와 우리 자식이 마음 편히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다. 일본 후쿠시마의 참극을 생생히 봤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핵발전소를 용인하고 있다. 정말 부산, 울산, 대전, 영광에서 핵발전소가 통제 불능이 되어야지 정신을 차릴 것인가? 못말리는 만성 위험불감증 탓일까?

아니다. 사람들이 핵발전소를 묵인하는 건 방사능이 무섭지 않거나 정부를 지극히 신뢰해서가 아니다. 그건 생활에 파묻혀 자신을 속이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인지부조화 이론으로 이걸 설명할 수 있다. 즉,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으로 몇 천 원 혹은 몇 만 원의 이득을 보게 되겠지만 그 액수에 비해 핵발전소를 유지하면서 안고 가야하는 위험은 너무나 크다. 증설을 하면 그 위험이 훨씬 더 커지는데 그 위험의 대가라고 보기에는 할인금액은 너무나 하찮고 스스로 안전대신 푼돈을 선택했다는 걸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다. 사실 전기요금을 얼마쯤 깎아야 민족 종말을 불러올 수 있는 위험을 받아들여야 할지 알 길은 없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핵발전소가 얼마나 노후가 되었든 얼마나 많든 대대손손 안전할 거라고 자신을 속여야 생활을 할 수 있는 거다. 그렇게 하면 당장 핵발전소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우리가 평소에 정부와 공기업을 불신하는 태도를 생각해본다면 이게 얼마나 큰 모순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자,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전기료 요금 체계가 부당하더라도 참고 더위도 부채로 이겨내고 핵발전소 반대 피켓을 들고 분연히 직장을 뛰쳐나와야 하는가? 뭐, 가능하고 실효성 있다면 해 볼 만한 일이겠지만 괜한 공상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돈에 목이 매여 나와 내 자식의 삶을 볼모로 끌려가는 건 더 못마땅하다.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지는 각자의 몫이지만 내 경우에는 일단 생활 패러다임을 바꾸기로 했다. 돈이 우리 생활에서 중요하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선에서 돈보다는 전기 절약을, 돈보다는 안전을, 돈보다는 자식에게 체면을 차리고 공동체에 힘을 보태는 쪽을 선택했다.

그 첫 번째 실천은 아마도 20년 된 냉장고를 에너지 효율 1등급의 새 제품으로 교체하는 일이 될 것이고 압력밥솥으로 밥하기는 그 두 번째가 될 것이다. 돈을 생각하면 20년 된 냉장고를 계속 쓰는 건 미덕이다. 하지만 전기 효율이 떨어지는 구형 냉장고를 몇 년 더 써서 돈을 아끼기보다는 전기를 더 절약할 수 있는 새 냉장고로 바꾸기로 했다. 또, 하루에 먹을 양만 압력밥솥에다 밥을 하면서 보온밥솥은 최소한으로 사용해 그 만큼 전기 에너지를 아끼기로 했다.

전기요금 할인이라는 사탕이 관연 달기만 할 것인지 한 번쯤 생각해 봤으면 한다. 큰 집에서 큰 차를 타기를 소망하며 온갖 가전제품의 수혜 속에서 에너지를 마음껏 소비한다는 게 과연 좋기만 한 일인지 가을의 문턱에서는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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