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회] 가족을 위해 유품을 내놓다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92회]

등록 2016.08.26 18:17수정 2016.08.26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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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장>

관조운과 혁련지는 소림사 일주문을 빠져나온 후 사하촌을 거쳐 자실봉 향적암으로 향했다. 부지런히 경공술을 발휘해 쉬지 않고 왔으나 정오 무렵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려 제 속력을 내지 못하였다. 남녀는 자실봉으로 가는 계곡 초입에 들어서면서 너른 바위에서 잠시 쉬었다. 관조운이 혁련지에게 대나무통을 달라고 한 다음 자신이 차고 있는 나무통을 허리춤에서 풀었다. 그는 나무통에서 부채를 꺼내 펼쳐 일별했다.


부채 폭에는 신선이 구름 속에서 노니는 그림과 함께 양쪽 여백에 세로로 글씨가 써져 있다. 왼쪽에는 '화정위기(化精爲氣) 기달심개(氣達心開)'라 쓰여 있고, 오른쪽에는 '행운만월 심야춘(行雲滿月 深夜春) 사제고정 세마찬(四弟故情 歲磨燦)'이라 쓰여 있다. 관조운은 이어 대나무통의 마개를 열어 그림을 꺼냈다. 화폭에는 낮은 산과 굽이를 도는 강, 낚시를 하는 독조옹(獨釣翁)의 풍경이 고즈넉하게 그려져 있다. 이 역시 여백에 일련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왼쪽에는 '무극유묘(無極有妙) 묘광시도(妙光是道)'라 쓰여 있고, 오른쪽에는 '태생춘앵 비화우(太生春櫻 飛花雨) 환향표연 도살수(還鄕慓燕 跳撒水)'라 쓰여 있다.

관조운이 그림을 말아 통에 넣고는 가운데 빈 공간에 부채를 넣었다. 마침맞게 쏙 들어갔다. 남녀는 일어나 발길을 재촉하니 신시가 될 무렵에야 겨우 향적암에 도착했다. 그들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채 탑림의 팔괘진을 두 번이나 통과하고 소림승과 드잡이질까지 했으니 밀려드는 피곤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숙 기승모에게 경과를 알려드린 후 빨리 쉬고 싶었다. 내일은 아침 일찍 낙양으로 출발해 사숙 담곤과 함께 네 개의 유품을 모아놓고 진경의 향방을 상의해야 한다.

향적암 입구로 들어서자 묘한 정적감이 마당에 가득찼다. 관조운의 신경이 팽팽히 당져졌다. 정운수좌는 산에 나무하러 갔다 치더라도 기사숙이라도 마당 한켠을 지키고 있어야 했다. 혁련지 역시 정체를 알 수 없는 적막감이 암자를 싸고도는 것 같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허리에서 심운검을 뽑았다. 스릉, 검신이 빠져나오는 소리가 정적을 베었다. 비는 그쳤지만 물안개가 대웅전 뒤쪽 숲속에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관조운도 요운검을 조심스레 뽑았다. 두 사람은 요사채를 향해 신중하게 발걸음을 떼었다.

그때 요사채 거실의 쌍여닫이문이 벌컥 열렸다.

"핫하하하, 진인의 유품을 구해 오느라 수고가 많았네."


웬 거한이 나타나며 마당이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관조운과 혁련지는 깜짝 놀랐다. 거한은 금의위 관헌으로 그들과 사숙 담곤을 자운헌에서 납치했던 자 아닌가. 혁련지의 기습으로 겨우 빠져나오긴 했지만 당시 사숙을 남겨놓고 오는 바람에 몹시 마음에 걸렸었다. 저자는 결박된 채 은화사에 넘겨지거나 제 동료를 죽인 죄로 금의위에 압송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느닷없이 숭산에 나타나 유품을 내놓으라니 관조운으로선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더욱 놀라운 건 거한의 갑작스런 등장도 등장이려니와 그자 뒤에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비갑을 입은 젊은 부인이 칠팔 세 정도 된 동자의 손을 잡고 서 있고, 그 뒤로 흑의 사내가 팔짱을 끼고 서 있다. 자세히 보니 거실 안에는 누군가 쓰러져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구석에서 머리를 감싼 채 쪼그려 앉아 있다. 쓰러진 사람은 민머리와 잿빛 승복으로 보아 정운수좌일 것이고 쪼그려 앉은 사람은 이숙 기승모임에 틀림없다. 저들은 기사숙을 광인으로 취급하여 해치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저 분은…."

관조운이 다시 한 번 놀란 이유는 형수 필진진과 조카 섭월의 뒤에서 팔짱 끼고 선 사내 때문였다. 그는 얼마 전 은화사 은가(隱家)에서 자기를 구해 준 흑의인 아닌가. 각진 얼굴형과 관자놀이께의 흉터로 볼 때 당시의 은인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흑의인은 그때처럼 무표정하게 서 있다. 아니 관조운을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것처럼 그 어떤 감정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조운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했다. 모양새로 보아하니 거한과 흑의인은 일행인 듯싶었다. 그들이 형수와 조카를 위협하는 형국인데, 자기를 구해준 은인 또한 갑자기 대면하게 되니 대거리를 해야 할지 인사를 해야 할지 구분이 가지 않았다. 조운은 일단 형수 진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혀, 형수님께서…, 여기 웬일로?"
"관조운, 네 형수와 조카가 무사하고 싶으면 진인의 유품을 본관에게 넘겨라."

조복이 싸늘하게 말했다.

"도련님, 이 자는 관인(官人)이 아닌 무뢰한이올시다. 속사정은 모르겠으나 이 자의 말에 고분고분하지 마십시오." 

뒤에 있던 형수 진진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오?"

관조운은 영문을 몰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른 채 입을 열었다.

"도련님, 섭월이와 저는 친정아버님의 배려로 소림사 암자에 피신하여 왔다가 관을 칭한 이 자에게 피랍된 것입니다. 어서 빨리 소림에 알려 이 자들을 치죄하게 하세요."

필진진이 말했다.

관조운은 어리둥절하다가 형수의 말을 듣고서야 갈피를 잡았다. 자신이 동창과 금의위에 쫓기는 몸이 되자 관은 분명 관가장을 핍박했을 것이고, 이에 섭월의 외가 필대감이 모자를 안전한 소림사로 피신시킨 모양이었다. 그런데 형수의 말을 들으니 이자들은 관의 끄나풀이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자신과 혁련지가 이곳에서 스승님의 유품을 구해오리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이자들이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구해온 유품을 내놓으란다. 자신의 고생은 둘째치고, 이들이 내놓으라는 유품은 강호인이라면 누구나 눈에 핏발을 세우는 기물이다. 자칫하면 강호에 피바람을 몰고 올 수 있는 비급의 단서인 것이다. 그러나 무림의 장래가 어찌될지언정 자신의 가족인 형수와 조카가 당장 인질로 잡혀 있다. 함부로 속단할 계제는 아니었다. 관조운의 머릿속이 실뭉치처럼 엉켰다.  

관조운이 혁련지를 쳐다보았다. 혁련지는 그동안의 여정이 머릿속에 퍼뜩 떠올랐다. 소주에서 정주 비룡표국, 운부산 자운헌, 운부산 산중의 사냥꾼 초막, 그리고 소림사 탑림,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온 유품인데 괴한들에게 넘기자니 선뜻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사정을 보아하니 인질로 잡혀 있는 모자는 사형 관조운의 형수와 조카이다. 제아무리 무림의 대의에 관한 것이라 한들 한 가족의 목숨만큼만 하랴. 게다가 연랑(戀郞)의 가족 아닌가.

"사형, 건네주시죠."

혁련지가 조용히 속삭였다. 관조운이 잠시 침묵을 하다가 마침내 품에서 대나무통을 꺼내며 말했다.

"부인과 아이를 보내주시오."
"크흐흐, 그 통을 먼저 우리에게 주면 너희 가족을 풀어주지."

조복이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관조운이 성큼성큼 걸어가 마당 한 가운데에 대나무통을 세워 놓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자 필진진의 뒤에 있던 무영객이 짧게 외쳤다. 가시오! 진진이 아들 섭월의 손을 꼭 잡고 마당을 향해 움직였고 그 뒤를 조복이 따랐다.

이때였다!

법당 뒤쪽에서 두 개의 신영이 쏜살같이 튀어나왔다. 신영들은 대나무통을 향해 무섭게 달려 나왔다. 이를 본 조복과 무영객도 마당 한가운데를 향해 몸을 날렸다. 네 개의 신영이 마당 한가운데서 마악 부딪치려는 순간 간발의 차로 신영 하나가 대나무통을 먼저 잡았다.

그 찰나 무영객이 신영의 손목을 왼발로 차버리자 대나무통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동시에 무영객도 표흘탄영(豹仡彈影) 수법으로 공중으로 치솟아 통을 쥔 후 몸을 둥굴게 말아 두 바퀴 반을 굴러 무릎자세로 섰다. 그새 조복은 검을 뽑아 다가오는 나머지 신영을 향해 휘둘렀다. 챙, 챙, 챙. 다른 신영도 어느새 발검(拔劍)하여 조복의 검을 맞받아쳤다. 무영객은 조용히 일어나 조복의 뒤로 갔다.

갑자기 나타난 자들은 한명은 중년으로 평범한 생김새였으나 눈빛에 날이 서 있고, 다른 한명은 키가 껑충하며 바싹 말랐다. 중년인은 검과 도의 중간 정도인 두자 길이의 쌍검을 허리에 교차하여 차고 있는데 그중 하나를 뽑아들었고, 마른 사내는 날이 넓은 파풍도를 가슴 앞에 겨누고 있다.
덧붙이는 글 월, 수, 금 연재합니다.
#무위도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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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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