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냥한 폭력의 시대

무지와 성찰없음이라는 상냥함에서 벗어나 타자들을 곁에 두는 상냥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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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자(thecla1110)등록 2016.10.31 16:17
<상냥한 폭력의 시대>(2016년 10월, 문학과지성사)는 정이현의 세 번째 소설집이다. 나이가 들면서 작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같이 나이를 먹었다. 정이현의 소설들에는 언제나 나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내 또래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래서 정이현의 소설은 남일 같지가 않다.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는 무수한 내 이야기들이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사는 사회가 "누구에게나 무차별적으로" 닫혔으면서도 "최소한의 평정을 가장할 수 있는" 곳임을 드러낸다(백지은 해설, 245쪽).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특별히 악하거나 못된 사람들은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상냥한 방법으로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인 세계를 재현해낸다.

소설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지원은 고등학생인 자신의 딸이 낳은, 인큐베이터 안에서 겨우 숨을 붙이고 있는 갓난아기가 사라지기를 바랐다. 지원은 자신의 딸을 지키기 위해서 딸의 뱃속에서 자라는 아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수술이 필요하다며 수술 동의서를 내미는 레지던트에게 "나중에요, 나중에 할게요(p61)"라고 계속해서 미룬다.

지원은 수술을 하지 않음으로써 끊어진 길 끝, "바로 그곳에서 희미하게 다시 연결(p60)"되리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아기가 인큐베이터 안에서 15일째 머물러 있지만 수술은 계속 유보 중이었다. 인큐베이터 안의 작은 생명이 적어도 지원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소설 '우리 안의 천사'에서도 상냥한 폭력은 계속된다. 남우와 미지는 생활비를 절반씩 부담하면서 철처하게 계산적으로 동거를 시작했지만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렇게 경계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 남우에게 어느날 다가온 동우라는 배다른 형. 형은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면서 남우에게 아버지의 비자발적 자살에 관한 일을 함께 하자고 한다. 남우가 실제로 그 일에 가담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사건 이후 동우에게서 더이상의 연락은 없었다.

'영영, 여름'과 '서랍 속의 집'에서는 개인에게 내재된 상냥한 폭력성이라기보다는 사회구조에 내재된 폭력의 상냥함을 드러낸다. '영영, 여름'에 등장하는 리에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삶을 산다. 전학을 갈 때마다 돼지라는 이름으로 놀림을 당한다. 소설 첫머리에 돼지에 대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알고보면 돼지만큼 깔끔하고 예민한 짐승도 없다는 내용의 그림책을 오래전에 읽었다. 돼지는 먹고싶지 않은 것은 절대로 먹지 않고, 낮고 습기 찬 곳으로 배변 장소를 지정해둔다 똥오줌은 가릴 줄 안다는 뜻이다. 또 돼지는 더없이 유순하다. 상대가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아무도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돼지에게는 죄가 없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돼지는 다른 돼지와 구별되는 않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는 구절이었다. 그것은 나에게 몹시 슬프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각인되어 있었다."(p101)

늘 돼지로 불리는 자신을 위로하는 그림책이었을까. 특히 '돼지에게는 죄가 없었다'라는 대목이 그랬다. 괜시리 짠해졌다. 그리고 리에의 엄마가 자신의 광대뼈가 도드라지는 것 때문에 탤런트를 포기한 것처럼, 리에도 자신에게 폭력적인 상황을 돌파하려 한다거나 고통으로 받아들인다거나 하지 않는다. 그냥 적당히 숨어버린다.

"문제가 분명해 보일 때 어떤 사람은 원인을 제거하는 쪽을 택한다. 그러나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방 안으로 종용히 숨어들어 문을 걸어 잠근다. 인생이 반드시 순간순간의 암흑을 돌파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고단할 여정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는 측면에서 나는 그녀의 딸이 맞았다."(p110-111)

그러다 겨우 K도시에서 리에가 겨우 숨어있던 자신의 굴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매희덕분에. 그런데 매희와 함께하는 시간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영영, 여름'에서 구조의 피해자인듯 한 리에는 피해자이지만 어는 장면에선 그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그러니까 '상냥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상냥함'이란 친철함이 아니라 아무 죄책감없는, 혹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성찰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상냥한 폭력이 극대화된 작품이 '서랍속의 집'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나 우리는 서로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처럼 살아간다. 유원과 진은 전세계약이 만료될 때마다 이사를 했다.

처음에는 집의 크기가 조금 커졌고, 그 다음에는 집의 크기가 작아졌다. 그리고 그것과 상관없이 대출금은 많아졌다. 유원과 진은 점점 편리한 도시로부터 멀어져갔다. 밀려난 사람들은 밀려서 도달한 곳을 사람들을 밀어내고, 거기서 밀려난 사람들은 또 다른 곳으로 밀려나 그곳의 사람들을 밀어낸다. 진은 이런 상황을 도미노에 비유했다.

"그 여자의 태연한 설명을 듣다보니 이것은 커다란 도미노 게임이며, 자신들은 멋모르고 중간에 끼어 서 있는 도미노 칩이 된 것 같았다. 종내는 모두 함께, 뒷사람의 어깨에 밀려 앞사람의 어깨를 짚고 넘어질 것이다. 스르르 포개지며 쓰러질 것이다. 금 실장이 이 집의 정확한 가격을 말해주지 않은 사실이 떠올랐다."(p179)

유원과 진은 왜 도미노 게임의 한가운데에 자신들이 끼어들게 되었는지 모른다. 아니 그것을 캐내는데 시간을 쏟을 만큼 여유가 없다.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벅찬 이들은 도미노의 한가운데서 자신을 밀어낸 것이 누구인지도 모른채 다른 누군가를 밀어내고 있었다. 유원과 진은 집을 사기로 했다. 집을 사기로 한 순간 진은 앞으로 20년 동안 절대 일을 그만둘 수가 없게 되었다.

"집을 산다는 것은 한 겹 더 질긴 끈으로 삶과 엮인다는 뜻이었다. 부동산은, 신이든 정부든 절대 권력이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고안해낸 효과적인 장치가 분명했다. 돌이킬 수 없는 트랙에 들어서버렸다고 진은 실감했다. 결혼식장에 들어설 때보다 훨씬 더 선명했다."(p184)

유원과 진이 앞으로의 삶을 저당잡히면서까지 산 집이 동화처럼 아름답고 예쁘면 좋으련만, 그렇지가 못했다. 집을 계약하기까지 사람들-집주인, 부동산 중개인-은 그 집이 가진 이야기를 숨기고 유원과 진에게 집을 보여주지 않았다.

집주인은 "나이가 들면 저희가 들어가서 살려던 집인데......(185)" 왜 그러지 못하는지에 대해선 말을 삼켰다.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자신에게서 떼내고 싶은 그 집을 유원과 진에게 팔아넘겼다. 결국 유원과 진은 쓰레기 더미로 가득찬, 사연 많은 그 집을 새로운 터전으로 삼아야만 했다.

그렇다고 이 소설집의 소설 속 인물들이 계속되는 폭력 속에서 무기력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소설집의 처음과 마지막 소설에서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고 지키고싶은 무언가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도 되는 그런 사람들로 가득찬, 세계가 온통 상냥한 폭력으로 만연해 있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상냥함' 그러니까 여기서 상냥함은 친철함이며 타자성이 전제된 성찰이 희미하게 빛을 낸다.

소설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에서 나는 아버지의 옛여인인 미스조에게 그녀의 여동생 다음으로 "제일 자주 연락하는", "제일 친한 친구"였다. 그리고 미스조가 유산으로 남긴 거북이 바위와 기꺼이 동거한다.

"샥샥과 나 사이에, 바위와 나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줄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갈 것이고 천천히 소멸해갈 것이다. 샥샥은 샥샥의 속도로, 나는 나의 속도로, 바위는 바위의 속도로(p33)." 

사람들은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성이 전제된 성찰은 애초에 성립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희준(나)은 애초에 연결된 줄 같은 것이 없는 듯 할지라도 그 속에서 그들과 연결되어 함께 살아간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모양으로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소설 안나에서 안나는 알면알수록 마음이 아프다. 우리 시대의 힘겨운 청춘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토록 최선을 다해서 자신의 삶을 붙잡고 있는 안나지만 안나를 둘러싼 사람들은 안나를 호의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온갖 이상한 소문으로 둘러쌓여 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산다.

십수년이 지나고 경이 다시 만난 안나는 여전히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나는 또 한번 구설수에 올랐고, 결국 학부모들 앞에서 부원장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p225)."

경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던 말들을 안나에게 털어놓고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으면서도, 학부모들의 채팅방에서 보조교사인 안나를 아이들의 식중독의 원인 제공자로 몰아가는데도 "대화에 낄 타이밍을 찾지 못한(p223)" 경은 상황을 지켜보면서, 아니 방관하면서 안나가 쫒겨나는 일에 동조했다. 그런 경과 상관없이 안나는 영어유치원에서 말을 잃어버린 경의 딸을 지켜줬다.

"엄마, 애나는 어디 있어요?"
"응"
"애나가 나를 지켜줬어요."
"누구?"
"애나. 엄마, 애나 말이에요."
"그렇구나. 애나, 안나" (p227)

안나는 상냥한 폭력의 시대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로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소설 속 대부분의 인물들이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채 상냥한 폭력을 반복적으로 재현하는 것과는 달리 안나는 폭력적인 세계, 곧 상냥함을 가장한 무지와 성찰없음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방법과 속도로, 그러니까 샥샥과 바위처럼 묵묵히 그녀의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유지시키는 것은 다름아닌 우리들이다. 상냥함이라는 가면을 쓰고 숨어서 누군가에게 폭력이 되는 일들을 일삼는 우리들. 그렇게 우리는 구조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로 살아간다. 살아갈수록 더 질기게 이 무차별적인 폭력의 사회에 엮이고 엉켜서 무엇이 나를 이끄는 줄도 모른채 질질 끌려가듯 살고있다. 무지와 성찰없음이라는 상냥함에서 벗어나 사회 밖으로 밀려나는 수많은 타자들을 곁에 두는 상냥함으로 '폭력의 시대'를 이겼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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