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같다"는 놀림, 나는 가면을 썼다

[공모 - 나는 나대로 산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긍정하는 사회를 꿈꾸며

등록 2016.11.16 15:57수정 2016.11.25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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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나는 유독 성격이나 행동이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놀림을 많이 받았다. ⓒ pixabay


어린 시절, 나는 유독 성격이나 행동이 여성스럽다는 이유로 놀림을 많이 받았다. 한창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이 인기를 끌던 무렵 나의 별명은 '쁘아송'(홍석천이 연기했던 디자이너 캐릭터로 여성스러운 말투와 제스처로 주목을 받았다)이었으며, 이후 하리수가 화제에 오르자 나는 '젠더'(나를 놀리던 아이들은 '트랜스젠더'라는 단어를 완벽하게 기억할 정도로 똑똑하진 않았다)라고 놀림을 받았다. 두 사람의 인기가 조금은 사그라든 무렵 나는 드디어 안심했지만 아이들은 나를 그냥 '아줌마'라고 놀렸다. 무리에서 눈에 잘 띄던 나는 따돌림과 언어적·물리적 폭력의 대상으로 쉽게 전락했다.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나는 문제의 원인을 내부에서 찾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내가 떠올린 것은 나의 유아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집안에서 보내던 아주 어린 시절, 나는 거의 매일을 엄마와 이모들과 함께했다.(심지어 형처럼 집 밖에 나가 또래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당시 아빠는 일 때문에 집에 자주 오지 못했고, 한동네에 살던 이모들은 종종 우리 집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리고 나는 엄마 품에 안겨 조용히 오가는 대화를 들었다. 물론 그 시간이 나쁜 건 아니었다. 나는 지금도 이상적인 공동체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할 때면, 한겨울 엄마와 이모들이 모여 귤을 까먹던 그 시간을 생각하곤 한다.

나의 행동에 '변명'이 필요했던 이유

그렇다면 나의 말하기 방식은 그때 엄마와 이모들의 영향을 받은 것일까? 사실 이 같은 추측이 아주 근거가 없지는 않은 것이, 나는 그 이후로도 유년 시절을 엄마와 이모들과 함께했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컴퓨터 게임에 재미를 붙인 형은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았고, 엄마는 장을 보러 시장에 갈 때면 당연한 듯 내 손을 잡고 문밖에 나서곤 했다. 엄마는 덤으로 받은 과일이 너무 많다며 자연스럽게 이모집을 들렀고, 어릴 적의 나는 그사이에 앉아 우유를, 나이가 조금 더 든 다음에는 엄마처럼 커피를 마셨다. 때로 엄마와 나 사이에 갈등이 있을 때는 이모들이 나서서 중재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나는 대부분의 사회 생활 기술을 엄마와 이모들에게 배운 셈이다.

물론 내가 이런 식의 깔끔한 서사를 만들어 낸 이유는 또 있다. 지옥 같던 초·중학교 시절과, 긴장 속의 고등학교 시절을 지난 후에도 나의 말투나 제스처에 대한 말들은 계속해서 마주쳐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들은 조롱의 의미로 그런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고, 심지어 내가 지닌 '여성성'은 칭찬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나의 일부를 부정과 놀림, 심지어 폭력의 대상으로 경험했던 역사가 있었다. 때문에 나는 긍정적인 의도로 그런 말이 전해진 순간에도, 캄캄한 밤에 전조등 앞에 선 고라니 마냥 얼어붙었다. 무언가 대단한 약점을 잡힌듯한 느낌을 받았고,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계속해서 변명해야 할것만 같았다. 그래서 나는 상술한 나름대로 '원인'을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말하고 다녔다.

우연히 마주친 다르게 생각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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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지치고 말았다. 그리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안해냈다. 내 몸에 배인 소위 '여성스러운' 모습들을 철저히 숨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회가 말하는 남자다운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 pixabay


하지만 변명을 반복하던 나는 결국 지치고 말았다. 그리고 근본적인 해결책을 고안해냈다. 내 몸에 배인 소위 '여성스러운' 모습들을 철저히 숨기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회가 말하는 남자다운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었다. 다소간의 주의가 필요했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일단 대화에서 말을 줄이면 된다. 특별히 해야 할 말이 있다면 목소리를 톤을 낮게 하며, 웃을 때는 깔깔거리는 대신 가볍게 '하하'라고 소리 내면 되었다. 그렇게 이중생활은 시작되었다. 나는 나를 잘 아는 친구들 앞에선 편하게 나를 드러냈지만, 처음 사람을 만나거나 모임에 참석할 때는 '보통의 20대 남자' 가면을 쓰고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참석한 술자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과 독대를 하게 되었다. 나와 그 사람은 비슷한 관심사와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무리와 떨어진 우리의 대화는 점차 길어졌다.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중, 우리의 대화 주제는 '도대체 남자들은 왜 그렇게 지하철에서 다리를 벌리는가'로 옮겨졌다. 나도 평소에 너무나 짜증 나 하던 일이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오래간만에 비슷한 사람을 만나 기분이 너무 좋았던 탓이었을까, 아니면 술이 문제였을까.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한껏 톤이 올라간 목소리로 약간의 비음을 섞어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 사람들, 도대체 왜 그렇게 다른 사람 생각 안 하고 사나 몰라?"

나는 아차 싶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내 말을 들은 그녀는 갑자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고, 나는 당혹감에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이미 머릿속으로 수십번을 이야기해온, '왜 나는 이런 말투를 가지게 되었는가' 이야기를 복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물었다. 갑자기 왜 웃냐고. 하지만 그녀에게서 돌아온 답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른 것이었다.

"부러워서요. 저는 짜증이나 화를 정말 우악스럽게 내거든요. 근데 필규씨는 화도 되게 부드럽고 차분하게 내는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성격이 부러워요. 화도 나긋나긋하게 낼 수 있는 성격."

젠더 규범은 왜 탄생했을까?

그녀의 말을 들은 나는 또 다른 혼란에 빠졌다. 부드러움, 차분함, 나긋나긋함. 나는 이런 식으로 내 행동들을 평가 받은 적이 없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의 말투나 제스쳐는 항상 성별화된 어떤 것, 그러니까 '여성적'이거나 '남성적'이지 않은 것으로 평가 받곤 했다. 내 행동을 그 자체로서 표현할 언어를 들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번 나의 모습이 성별에서 떨어져 나오는 경험을 하자 질문은 이어졌다. 왜 나의 부드러움은, 나의 경쾌한 웃음 소리는 곧바로 '여성적인 것'으로 평가되었을까. 그리고 그것이 윤리적으로 나쁜 것이 아님에도, 왜 남성인 내가 '여성스러운' 모습을 보였을 때 그것은 비난과 차별의 대상이 되었을까.

책 <여자 다운게 어딨어>는 이런 질문에 대한 간결하고 명확한 답을 던져준다. 사실 우리가 여성적이거나 남성적이라 부르는 것들이 그렇게 분류될 필요는 없다. 이 같은 구분은 임의적이다. 하지만 이 구분은 규범이 되고 여기에서 이탈하는 사람은 비정상이 된다. 왜? 사회는 이 같은 젠더 규범을 통해 불평등한 성별 관계를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유지하도록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친절함이 여성의 특징이 된다면, 반대편에는 거의 모든 순간에 자신에게 고분고분한 여성들을 마주하는 남성들이 존재한다. 물론 이 난국을 알아챈다고 해도 규범의 바깥으로 나가는 것에는 항상 출혈이 뒤따른다.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의 여성성과 남성성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악순환이 펼쳐지는 것이다.

하지만 책이 말하는 것처럼 이 같은 젠더 규범은 절대적인 것도 아니며 정당한 것도 아니다.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방식의 수행을 통해 젠더 체계의 다른 각본을 작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보통의 여자다움과 남자다움이 사라지는 때, 우리는 그만큼의 자유를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엄마와 이모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은 나에게 무척이나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나는 인간 관계에서 지켜야 할 예의와 지혜를 배울 수 있었다. 내 몸에 밴 '여성적'이라는 것들은, 그 시간들이 남긴 흔적이자 엄마와 이모들이 나에게 물려준 선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나는 그 시간을, 그 흔적을, 그 선물을,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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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성별에 따른 다양한 행위의 각본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풍부해지는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 pixabay


책 <젠더 트러블>에서 주디스 버틀러는 자신이 탈자연화를 추구하는 글쓰기 방식을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살기 위한 욕망, 삶이 가능해지도록 만들려는 욕망, 그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욕망에서 행해진 것이다'라고. 자기 스스로를, 자신의 행복했던 시간들을, 그리고 경험들을 긍정할 수 없는 삶은 위태로울 수밖에 없다. '계집애' 같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맞고 돌아온 날이면, 나는 가만히 방에 앉아 '나는 살아갈 가치가 없는 사람인가' 질문하곤 했다.

하지만 젠더 규범을 벗어난 모든 삶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필요는 없다. 우리가 성별에 따른 다양한 행위의 각본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그리고 젠더를 대치된 두 쌍이 아닌 풍부한 스펙트럼으로 상상할 수 있다면, 삶의 양식을 두 개 중 하나의 성별에만 적합한 것으로 분류하지 않고 그런 식의 생각과 결별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삶이 풍부해지는 것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긍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 그 과정은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 '소녀' 같다는 이유로 놀림받는 '소년'들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들이 나보다는 수월하게 자기 스스로로 살아가길 바란다. 그것이 가능한 사회를 원한다.
덧붙이는 글 <나는 나대로 산다> 응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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