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장의 태극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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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민(ho089)등록 2017.03.17 12:43
시청역에서 후다닥 내렸다. 탄핵 후 첫 토요일 시청 광장이 어찌 되었는지 궁금하다. 개찰구를 나와서 양쪽 통로 중 어디로 가야 하나 두리번거렸다. 앞서 가던 허리 굽은 할머니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이리저리 둘러본다. 할머니가 내게 묻는다. 12번 출구가 어디냐는 거다. 둘러보니 12번 출구를 알려 주는 종이가 벽에 부착되어 있다. 방향을 알려주니 고맙다 하신다. 친정엄마랑 비슷한 체형을 가지셨다. 할머니는 태극기 집회에 오신 거 같다.

나도 시청 광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출구가 가까워질수록 쿵작쿵작 스피커 소리가 요란해진다. 서울 광장 출구 계단에도 태극기를 든 사람이 많다. 그 사이를 오르려니 왠지 몸이 움츠러든다. 대한문 쪽으로 연단이 보인다. 스피커 소리 완전히 빵빵하다.  태극기를 들고 막 광장으로 들어서는 대열과 그들을 환영하는 환호성이 광장을 메웠다. 그래도 광장은 전 주와는 달리 빈 공간이 보인다. 마이크 속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린다.

"여러분 입당 원서를 주변에서 받아 주셔야 합니다. 전번 주에 받았던 입당원서와는 다릅니다. 이번엔 새누리당 입당원서입니다."

새누리당 해체되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새 다시 만들었는가 보다. 탄핵당한 대통령과 그의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사람들 얼굴에 가득가득하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다. 우리 담임선생님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김일성에 대해서 비교하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김일성은 뚱뚱하지만, 우리 박정희 대통령 각하는 국민 걱정에 밤잠을 못 주무셔서 이렇게 마르셨어요. 이것만 봐도 우리 박정희 대통령 각하가 훌륭한 대통령임을 알 수 있어요."

어린 마음이지만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깊이 공감을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말이 35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내 귀에 똑똑히 남아 있을 리 없을 테니까. 방과 후엔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했다. 고무줄 노래 중 "고마우신 우리 대통령 박정희 대통령으로......"으로 시작하는 게 있었다. 그 노래를 부르면서 애국심이 고취되었다. 그런데 그 고무줄 노래는 누가 만들어 배포한 것일까? 아이들이 만들어 저절로 유행했을까? 알 수 없다. 그뿐일까 학교 놀이터에 놀다가 저녁 6시 국기 하강식 시간이 되면 손을 가슴에 얹고 태극기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느 날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들었다. 한 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 대통령이 돌아가셨다는 말의 의미가 파악되지 않았다. 그럼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없는 국가가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수업시간에 같은 학년 친구들과 단체로 구립 도서관으로 조문하러 갔었다. 대여섯 명씩 일렬로 줄을 서서 조문을 했지 싶다. 가는 내내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 울지도 않고 까부는 남학생도 몇몇 있었다. 내 눈엔 그 아이들이 다 역적이고 매국노였다. 지나고 생각해 보니 좀 황당하고 이해 안 되는 일들이지만 그때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내 애국심도 우리들의 고무줄놀이도.

예전의 나를 생각하면 태극기 집회에 나오시는 분들 이해 안 될 것도 없다. 어릴 적 내 주변의 사람들이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말을 나에게 했으니까 나도 당연히 같은 생각을 했다. 사회시간에 배운 '준거집단'이 그런 의미일 거 같다. 어떤 준거집단을 갖느냐가 한 사람의 생각을 결정한다. 여기에 또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안타깝게도 이분들 주변에는 가짜뉴스가 판을 친다.

서울 광장 곳곳에도 처음 보는 신문이 쌓여 있었다. 기사 내용도 모두 처음 듣는 것들뿐이다. 종이 신문뿐 아니다. 지하철 타보면 태극기 들고 있는 분들이 주로 보는 인터넷뉴스 사이트도 있더라. 옆에서 힐끔힐끔 보면 자막 뒤에는 무슨 불타는 모양의 CG가 현란하더라. 불타는 CG를 보면 섬뜩한 마음이 든다.

교보 서점이라도 가 볼까 하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길이 경찰차로 막혀있다. 태극기 집회를 벗어나려고 지하로 들어갔다. 걷다 보니 화장실에 가고 싶어졌다. 200m를 걸어서 화장실에 들어가려니까 태극기 들은 사람들로 화장실이 꽉 차 있다. 태극기 가득한 화장실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저 소음으로 들어가서 줄을 서서 기다리다 볼일을 볼 자신이 없다. 걸음을 돌려 반대편 통로로 쭉 걸었다. 아주머니 네 분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게 되었다. 아주머니들은 한참 대화 중이시다.

"좌익들이 문제야. 아주 노조하는 걔들 다 좌익이야!"
"중요한 건 앞으로 대선이야. 우리가 끝까지 집회에 나와야 해. 그 뉴스 봤지? 지가 뭔데 사드에 대해 왈가왈부야!"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에 대해서 하는 말인듯싶다. 탄핵 이후가 중요하고 내가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것에 대한 걱정이 묻어난다. 당연히 그런 걱정이 있을 수 있다. 우리 모두 누구나 정치적 자유가 있다. 정치 성향의 차이도 있고 다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정치인이든 누구든 큰 잘못을 했다면 응당 벌을 받아야 한다. 그가 누군가의 딸이기 때문에 가슴 아픈 가족사를 가졌기 때문에 더 안타까울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벌이 없어질 수는 없다. 이로 인해서 내가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다음에 권력을 잡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죄를 덮고 넘어갈 수는 없다. 그러면 앞으로 국민은 더 큰 도둑을 용인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더는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정치인이 되는 사람은 없었으면 좋겠다. 후광은 자신이 만들어낸 빛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누군가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건 왕좌일 경우에나 가능하다. 왜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서 왕 대접을 받으려 하는가? 우리나라는 왕이 필요한 왕정국가도 아니고 우리 국민은 왕을 모시는 신민도 아니다. 우리는 시계를 다시 되돌릴 마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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