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비로 다 털려... 가족들에게 난 죄인

[작업치료사의 눈으로 바라본 공약] 부양의무제, 장애등급제 폐지 필요

등록 2017.03.28 12:13수정 2017.03.28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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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요양원에, 엄마는 돈 벌기 위해 지방으로 갔어요."

오랜만에 나를 찾아온 아이. 이 아이는 7년 전 쯤 내게 치료를 받던 환자분의 딸이다.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어 인사를 하러 온 것이다. 가족의 안부를 묻던 내게 무심결에 던져진 아이의 인사말.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 뭐라 말을 이어가야할지 몰랐다.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생이기에 말 한마디 잘못했다간 상처가 될 수 있다. 가족의 안부를 얘기하기도 힘들었을 터였다. 그럼에도 자신의 어린 시절, 아빠의 치료사였던 나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그런 대답이 나온 거라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집안에 영구적 장애인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가족 구성원이 뿔뿔이 흩어져 산산조각 나거나, 가정 살림이 힘들어 부동산을 처분하고 월세로 전전하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난다. 난 그런 광경을 너무 많이 봤다. 난 장애인을 치료하는 작업치료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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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사랑 내곁에 영화 내사랑 내곁에의 한장면이다 ⓒ 내사랑내곁에


나의 직업은?

벌써 이 직업으로 일한 지 만 12년이 넘었다. 그간 내 손을 거쳐간 환자만 많게는 수백 명에 이른다. 이 환자들의 대부분은 척수손상, 뇌졸중 등 평생 신체장애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장애인이다. 내 직업을 잘 모르는 지인들은 종종 오해한다.

보통은 동네 물리치료실에서 행하는 치료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환자들의 일상생활을 돕고 사회에 적응시키는 일을 하는 작업치료사다. 환자들이 갖고 있는 신체 여건에 맞게 치료 난이도를 설정하고, 그들의 앞날에 펼쳐질 사회적응을 설계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들과 굉장히 가깝다.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당장 필요한 게 무엇인지, 이젠 그들의 눈빛만 봐도 알 것 같다. 비록 내 능력이 모자라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진 못할지언정 그들의 애환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한다.

기둥뿌리가 흔들리는 그들의 삶

그들의 어려움은 신체적인 것 외에도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만큼 생활 전반에 포진해있다. 당장 돈벌이를 할 수 없는 집안의 가장들은 가족을 걱정하고, 자식에게 밥 한 끼 챙겨줄 수 없는 엄마들은 쓰린 가슴을 안고 잠도 제대로 못 이룬다.

연로한 어르신들은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 눈치 보기 일쑤다. 이미 이들은 병원비, 간병비 등의 지출로 돈이 털털 털린 상태다. 그런데다가 환자들은 어딜 가든 '봉'으로 인식되어, 구입 품목 이름에 '의료' 자만 들어가면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어 항상 울상 짓는다.

오랜 병치레로 기둥뿌리가 흔들린다는 말이 이렇게 실감된다. 자식, 부모, 형제, '가족'이란 이름으로 엮여있는 공동체에 불경을 저지르는 것처럼 죄책감에 시달린다. 소득 상위 1%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돈이 해결해주겠지만,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서민들에게서 이런 질환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크기에 가난의 대물림이 또 발생되는 것이다.

사회 안전망이 갖춰지지 않은 현실에서 중산층의 붕괴는 이런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가난해서 아프고, 아파서 가난하다.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 과연 안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2012년 대선 공약 '4대 중증질환 국가보장'

2012년 대선에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전 대통령)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가 맞붙었다. 그 당시 쟁점은 '복지'였는데, 특히 박근혜 후보가 들고 나온 4대 중증질환의 국가 보장이 눈에 띄었다. 또한 환자가 부담하는 '간병비'까지 국가가 책임지도록 해 환자들의 기대감이 컸다. 필자는 당시에도 경향신문에 '간병비 국가보장'을 주장하는 글을 기고한 바 있었다.

약 4년이 지난 지금, 그 공약이 얼마나 지켜졌는지는 환자들의 개인 생활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개선된 부분도 있겠지만, 그 효과가 미미해서 장애를 입은 환자들에게 큰 도움이 되진 않은 것 같다. 물론 내가 주관적으로 지켜본 모습이다. 여전히 병원비와 간병비에 버거워하고 가족들에게 죄인이 된 것처럼 살아가는 게 그들이다.

2017년 대선 공약 '장애등급제, 의무부양제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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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등급제 폐지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한 집회 중 ⓒ 유성호


2017년 5월 대선을 앞두고, 예비후보들의 공약 대결이 볼 만하다. 특히 며칠 동안 쟁점으로 떠오른 '장애등급제'와 '의무부양제' 폐지가 그렇다. 대다수 후보들이 이 공약을 받아들였는데, 일선에서 일하는 전문가로서 분명 환영할 일이다.

이 구태스런 제도만 폐지된다면 장애인들이 더는 가족 눈치를 보지 않아도, 가족 생계 걱정뿐만 아니라 가족이 헤어질 우려를 하지 않아도, 등급제로 말미암아 벌어지는 억지 질병 증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

장애등급제는 1, 2 등급과 그 외 등급에게 돌아가는 복지 혜택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대부분 1, 2 등급 안에 들어보려 한다. 사람을 등급으로 매긴다는 게 옳지 않을 뿐더러, 자신이 더 아프다고 억지 주장을 펼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치료사인 내게 등급 잘 받는 법을 문의하기도 한다. 암튼 이런 폐단들이 사라진다니, 나와 함께 숨 쉬고 생활하는 이들의 어깨에 짐이 사라질 생각에 절로 기쁘다.

정치에 대한 신뢰?

그런데 걱정된다. 우리나라처럼 복지 제도가 잘 갖춰지지 않은 나라에서 장애등급제, 의무부양제가 폐지된다면, 그에 따른 대안이 있는 것인지. 사전에 이 제도들의 폐지를 염두에 두고 대체 방안을 마련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 말이다.

등급제가 폐지된다면 개개인에 맞는 맞춤형 복지가 가능해야 하고, 그것에 맞는 객관적 툴이 존재해야 한다. 또한 의무부양제 폐지에 따른 복지 예산이 더 필요할 것이며, 그에 맞는 예산안이 각 캠프와 정당별로 제시되어야 할 것이다.

대선 후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폐지'를 내걸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가슴 설레며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다시피 예산 문제를 비롯해 상충되는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대선 후보들은 과연 이 부분을 고려한 걸까. 지난 번 대선처럼 공약을 던져놓고 당선 후엔 나 몰라라 실망시키진 않을까. 나부터가 정치에 대한 신뢰가 이렇다.

그러나 분명한 건, 중요한 의제가 던져졌다는 것이다. 사회에 산적한 여러 이슈 중에, 그간 소외되어 목소리를 높이지 못했던 이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현장에서 일하는 전문가로서, 또한 정치에 관심 많은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이번 공약을 꼭 눈여겨 볼 것이다.

장애인들이 기대하는 것만큼 공약이 지켜지지 않고 또 흐지부지 된다면 그에 따른 견제 역할을 해나갈 것이다. 난 정말 바쁜 사람인데, 정치권에서 공약을 꼭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장애등급제 ##의무부양제 #대선공약 #복지제도 #장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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