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헤이온와이'- 삼례여행

"먼 곳에서 벗이 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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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안나(arabianna)등록 2017.04.18 17:38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유붕자원방래 불역락호)
                                  -먼 곳에서 벗이 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서울에서 손님들이 오셨어요. 망우리공원 인문학 가이드 선생님들 8분이 내려오셨어요. 인문학 가이드는 망우리공원의 근현대 역사인물을 매개로 과거와 현재, 사람과 사람의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하는 한국엔티(한국내셔널트러스트) 선생님들의 모임이에요. 선생님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우고 삶의 깨달음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이 분들과의 인연이 소중하여 귀농을 했음에도 모임이 있을 때마다 서울행을 감행하며 빠지지 않고 참석 하려고 노력하고 있답니다. 이 분들이 제가 살고 있는 삼례로 답사를 오신다 하여 -사실은 집들이라는 미명하에 답사를 강요했지만요- 기쁜 마음으로 선생님들께 삼례를 소개 하였어요.

금요일 아침 8시 성북동 내셔널트러스트 사무실을 출발한 선생님들은 군산답사를 마치고 6시쯤 삼례에 도착하셨어요. 제일 먼저 모시고 간 곳은 저희 마을 이장님 댁 딸기 하우스에요. 모두 서울 분들이라 딸기 하우스는 처음이라고 하시네요. 딸기도 따보고 맛도 보고 즐거운 한 때를 보내셨어요. 막 딴 딸기의 싱싱함과 달달함을 직접 경험 하셨어요. 살아있는 딸기가 정말 맛있다고 하던 제 말이 빈 말이 아니란 걸 입증해 드렸지요.

넉넉한 마음의 이장님은 손님들 드리라며 막 딴 딸기를 두 상자나 내어 주셨어요. 사실은 사가지고 갈려고 했는데 안 파신다며 주시니 거절 못하고 받아 가지고 왔어요. 매번 이장님께 신세만 지고 있네요. 선생님들은 당신들이 진 신세를 제가 갚아야 한다며 걱정이시구요. 열심히 마을일을 도와  드리는 게 신세를 갚는 방법이겠지요. 더 '잘해야겠다.' 다짐해 봅니다.

<역사 그리고 문화, 그 삶의 흔적을 거닐다>의 저자이신 김수종 선생님은 아예 딸기 박스를 무릎에 올려놓고 씻지도 않은 채 정말 맛있게 드셨어요. 역시 딸기는 하우스에서 방금 딴 것을 씻지 않고 먹어야 제 맛입니다.

애피타이저로 딸기를 드신 선생님들을 모시고 집에 왔어요. 마당에서 자연산 장어와 돼지갈비를 구워 서울에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가든파티를 했어요. 지는 저녁놀과 감나무에 걸린 하얀 달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대화들... 그렇게 기분 좋은 밤은 익어갑니다.

다음 날, 새벽안개가 자욱하게 끼인 신천습지를 걸었어요. 안개가 습지를 환타지의 세상으로 만들었네요. 반지의 제왕이나 혹은 해리포터의 한 장면이 떠오를법한 풍광이 펼쳐졌어요. 비 때문에 피지 못하고 있던 벚꽃들이 팝콘처럼 꽃을 피우고, 목련은 서러운 꽃잎을 뚝뚝 떨어뜨리고, 이름 모를 들꽃과 강태공들의 치열한 기다림을 즐기는 산책이었어요. 갓 피어난 꽃들과 여린 연둣빛이 사랑스러운 아침입니다.

하리교에서 일행은 차를 타고 삼례문화예술촌으로 이동 하였어요. 삼례문화예술촌은 삼례로 귀농하겠다고 결심하게 한 원인이었지요. 고향인 익산으로 귀농하기 위해 여러 곳을 알아보고 있었지만 '이거다!'라는 강력한 끌어당김이 없어 지지부진 진행이 안 되고 있었는데 이곳에 와 보고 '삼례'에 정착하기로 결정하였어요. 그래서 이곳은 제게 아주 특별한 곳입니다.

삼례문화예술촌은 1920년대 일제가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하여 보관하기 위해 지은 양곡창고 6개동을 보수하여 만든 예술단지예요. 비주얼미디어아트미술관, 책공방북아트센터, 책박물관, 김상림목공소, 디자인뮤지엄 그리고 문화카페로 이루어져 있어요. 나름 독특한 구성이지만 딱히 콕 집어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딱 2%가 부족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너무 재미있는 공간이에요.

'미디어아트'라 하면 일단 백남준 선생님이 생각이 나고 왠지 복잡하고 난해하고 어려울 것이라는 선입관이 있어요. 그러나 이곳은 문화를 생산, 소비하고 공유하는 예술 촌답게 어렵지 않은 편안한 미디어아트를 만날 수 있어요. 예술작품을 감상하며 감동을 얻는 것은 감상자의 몫이겠지요.

우리 일행이 예술촌에 도착했을 때, 마침 전주대학교 국문학과 학생들이 단체관람을 왔어요. 이 학생들에게 오숙경 해설사님이 해설을 하고 있어서 같이 해설을 들었어요. 네, 다섯 번 온 것 같은데 처음으로 해설을 듣네요. 예술촌 마당에 조성되어 있는 조형물들은 이곳에 살던 맹꽁이를 기억하기 위한 조형물이래요. 예술 혹은 문화는 생태와 함께 발전해야 한다는 깊은 뜻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진리입니다.

디자인뮤지엄에는 2008년부터 2012년까지 Pinup Design Awards 입상작품이 전시되어 있는데 창의적인 디자인 작품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날개가 없는 선풍기, 밀어서 여는 전자레인지, 종이 케이스의 프린터기, 다양한 색깔의 물방울 모양 가습기, 허공 스크린에 개수가 보이는 줄넘기 등 톡톡 튀는 상큼 발랄한 작품들이 눈을 즐겁게 합니다.

김상림 목공소에는 나무냄새가 있어요. 전통기법의 목가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조선 목수들의 철학을 현대에 구현하고 있더군요. 조선시대에도 공간박스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놀라웠어요. 지금까지 공간박스는 현대에 만들어진 공간을 잘 활용하기 위한 아이디어라고 생각했거든요. 조선의 목수들은 이미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나름의 성과물을 가지고 있더군요. 더구나 공간박스의 두겁문은 너무도 창의적이네요.

제가 알고 있는 문은 앞으로 열고 닫는 여닫이, 옆으로 밀어서 여는 미닫이, 문을 들어 올려 걸개에 걸어 놓는 들어열개 문이 전부였어요. 처음으로 들어보는 두겁문에 호기심이 발동 했어요. 두겁문은 공간박스의 뚜껑이라 이해했는데요. 문을 위로 살짝 들어 올리면 문이 상자에서 분리가 됩니다. 문 때문에 버리는 공간을 최소화한 삶의 지혜에요.

책 박물관에는 랜돌프 칼데콧(Randolph Caldecott, 1846-1886)의 그림책을 전시하고 있어요. 그는 영국의 전래동화를 그림으로 그려서 책을 만들었고 일반 대중에게 폭발적 인기를 모았어요. 그래서 그를 근대 그림책의 아버지라 불러요. 미국 어린이 도서관 협회에서는 뛰어난 그림책을 만든 작가(일러스트레이터)에게 그의 이름을 붙인 '칼데콧 상'을 수여하고 있어요.
이곳에서는 천경자씨와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책표지도 볼 수 있어요. 제 눈길을 사로잡았던 책은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시집이었습니다. 요즘 동주에 빠져 매일 "당신의 밤'을 듣고 있는데 그의 시집을 만나니 많이 반갑더군요.

문화예술촌에서 가장 특색 있는 공간은 책공방북아트센터입니다. 10년 가까이 북아트를 하였고 2013년부터는 '나만의 책만들기'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입장에서 예술촌에 책공방이 있다는 것이 가슴을 뛰게 하는데요. 여기에는 정말 굉장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바로 아날로그 시대의 책을 만들던 활판 인쇄기계들입니다. 한 예술가의 관심이 잊혀 가는 우리 문화의 한 부분을 지켜내고 있는 의미 있는 곳이에요. 삼례문화예술촌에 오시면 이곳만은 꼭 방문하시라 권해 드려요.

"물성도 문화다. 문화는 반드시 물성이 뒷받침해야 한다."는 책공방 김진섭 대표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해요. 지금은 책을 디지털 편집으로 하기에 활판 인쇄기를 사용하지 않아요. 활판 인쇄기를 다룰 수 있는 기술자는 이미 연세가 7,80세가 넘으신 분들이고 젊은 사람은 없어요. 이 분들이 돌아가시면 이 기계들은 그저 고물일 뿐이라는 말씀이 마음에 남았어요.

친정아버지가 인쇄소를 하셨어요. 이곳에서 만나는 활자들, 인쇄기, 재단기, 명함 찍는 기계는 어렸을 적 친정집에 있던 그 기계들이예요. 마치 친정아버지 공장에 온 듯 추억에 잠기게 해요. 어릴 적 부모님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인쇄소에서 일을 하셨고 그렇게 4남매를 키우셨지만 단 한 번도 인쇄소를 자식들에게 물려주시겠다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당연히 기술을 가르치지 않으셨지요. 장인 공(工)이라 쓰시지만 공돌이 '공'으로 읽으셨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엄마는 미련 없이 기계들을 헐값에 고물상에 팔아 치우셨어요.

기계를 다룰 수 있는 기술자들이 없다면 기계는 문화가 아니라 고물일 뿐이라는 대표님의 말씀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이 기계들이 단순한 물성이나 고물이 아니라 문화로 오래오래 남을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김진섭 대표님과 기념 촬영을 한 우리 일행은 책공방을 나와 삼례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겼어요. 1954년생인 성당은 사람나이로 하면 64세입니다. 서울에 있었다면 진즉 '미래유산'에 이름이 올랐을 법한데요. 외관의 아름다움과 연륜을 생각한다면 등록문화재가 되어도 합당하다는 생각을 하였어요. 날이 맑은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그 자체로 그림이 되는 성당입니다.

예쁜 성당이 자꾸만 말을 걸지만 갈 길이 바쁜 일행이라 서둘러 삼례 5일장으로 안내를 하였어요.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여기까지 오셨는데 삼례장 구경은 해야지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애견샵과 건강원이 나란히 자리하고, 서로 다른 교회에서 전도를 하는 모습이 묘한 대조를 이루어 재미있더군요. 삼례시장 현대화 사업으로 옛 건물들이 헐린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해요. 도시재생으로 겉모습을 유지한 채 내부만 사용하기 편하도록 구조 변경을 하였다면 5일장을 구경하는 재미가 배가되었을 터인데 말이지요.

우체국 건너편 삼례열쇠집이 눈에 확 띄었습니다. 저렇게 잘 관리되고 있는 근대건축물을 만나는 것은 큰 기쁨이지요. 다행히도 삼례역로 주변에는 우리들의 7,80년대를 추억할 수 있는 건물들이 제법 남아 있어서 걸으며 즐길 수 있어 참 좋아요. 걸을 때마다 새롭게 다가오는 건물들이 있어서 지루할 겨를이 없답니다. 7,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찍을 곳이 없어서 중국으로 로케이션을 간다는데 삼례역로 주변을 7,80년대 콘셉트로 잘 정비하면 멋진 명소가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며 걸었어요.

어린왕자가 반기는 책마을 문화센터에서는 10만권의 위용을 만날 수 있어요. 알라딘에서는 구할 수 없는 절판된 책들이 대다수라는 말에 정말 깜짝 놀랐어요. 이렇게 책이 많은 곳이 좋아요. 아무 곳에나 틀어박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실컷 책을 읽을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오래된 희귀본 LP판 음악도 들을 수 있지요. 고서 수집가 10분이 모여 협동조합을 만들어 위탁운영 하고 있어 서가 위쪽에 서로 다른 이름표를 달고 있어요.

삼례가 책과 무슨 관련이 있기에 '삼례는 책이다'인지 궁금해서 여쭈었어요. 책마을 학예사 박대선 선생님은 삼례는 조선시대의 완판본과 호산서원, 완주의 한지 생산, 동학농민혁명 봉기와 초, 중, 고 대학교가 있는 교육도시이기에 책과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삼례는 책이다'라는 슬로건을 걸었다고 하네요.

이런 역사성이 있기 때문인지 삼례는 파주를 비롯한 다른 책의 도시들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요. 삼례에는 10만권의 헌 책과 아직 남아 있는 7,80년대의 거리 분위기 그리고 농협창고의 묘한 어울림이 있어서 한국의 '해이온 와이'라고 불러도 부끄럽지 않아요. 시간적인 여유 있다면 북카페에서 커피와 담소를 즐기고 싶더군요.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그저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될 듯해요.

구 삼례역사에 만들어진 세계막사발 미술관은 전시물도 흥미롭지만 밖에 있는 가마가 정말 최고예요. 이천이나 여주에 가도 가마는 모두 가스 가마인데 이곳에서는 진짜 가마를 볼 수 있어서 횡재한 기분이네요. '사람이 많은 주말만이라도 가마에 불을 지피고 도자기 굽는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면....' 터무니없는 욕심을 내어봅니다.

이 아름다운 매력이 넘치는 예술마을에 부족한 딱 2%는 어쩌면 유구한 역사를 설명할 무엇인가가 없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역사적 배경 설명이 없다면 이곳에 왜 이리도 아름다운 예술마을이 생길 수밖에 없었는지 당위성을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현재의 삼례를 만들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더불어 과거 번영을 누렸던 삼례도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삼례는 보면 볼수록 매력이 있는 도시입니다. 볼 때마다 새로움으로 맞아 주기 때문이지요. 벗기고 벗겨도 늘 새로운 매력이 충만한 이곳을 같은 길을 걷는 동지들과 즐기니 그 행복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덧붙이는 글 http://wanjublog.com/220985660192
완주군 공식블로그 "완주스토리"에 오늘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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