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스타] 포르투칼의 '파괴자' 파울레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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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예근(byk0930)등록 2017.05.02 18:32
"지금까지 나의 성과를 과소평가하려는 비판에 슬프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나의 투지를 증대시켰다"

포르투칼를 대표하는 공격수를 꼽으라면 으레 '흑표범' 에우제비오와 레알 마드리드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언급된다. 두 선수는 포르투칼은 물론이고 세계 축구의 큰 발자취를 남긴 선수다. 에우제비오는 펠레의 라이벌로 불릴 정도로 초창기 축구사의 큰 별이고, 호날두는 현재 메시와 함께 세계 축구를 양분하는 공격수다.

하지만 이 선수도 있다. 에우제비오의 퇴장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포르투칼의 대형 공격수 등장을 알린 남자. 바로 '파괴자' 파울레타다.

황금세대는 아니였던 황금세대 공격수

파울레타가 후에 세우는 기록들에 비하면 커리어의 시작은 초라했다. 파울레타는 1990년 17세의 나이로 포르투칼 하부리그 소속의 산타 클라나에서 데뷔한다. 어린 나이에 프로 무대에 뛰어들었단 사실은 그의 재능을 어느 정도 방증하는 부분이지만, 당시 포르투칼을 기대케 한 수많은 재능들에 비하면 주목도는 현저히 떨어졌다.

포르투칼은 1989년에 이어 1991년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에서도 우승을 거머쥔 젊은 재능의 보고였다. 포르투칼 '황금세대'의 출발이었다. 루이스 피구, 후이 코스타, 주앙 핀투 등이 이 시점을 시작으로 포르투칼의 핵심 멤버로서 10년 이상을 활약한다. 아쉽게도 그 멤버에 파울레타는 포함되지 못했다.

이미 스타가 된 또래 선수들과 다르게 차근차근 실력을 쌓던 파울레타는 에스토릴 프라이라에서 리그 18골을 성공시키면서 스페인 2부 리그의 UD 살라만카로 이적하게 된다. 스페인 무대에서도 탁월한 득점력을 뽐낸 파울레타는 득점왕까지 차지한다. 결국 1998년 스페인 프리메라리가(라리가)의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에 부름을 받고 이적하게 된다.

지금과는 다르게 탄탄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던 데포르티보에 합류한 파울레타는 두 시즌 동안 모든 대회 77경기에 나서 22골을 터뜨리는 쏠쏠한 활약을 펼치며 데포르티보의 사상 첫 라리가 우승에 힘을 보탰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신성 로이 마카이에 밀려 다시 한번 이적을 선택하게 된다. 또한 파울레타는 유로 2000에 참가했지만 유럽 무대에서 이미 스타 자리에 올랐던 누누 고메스에게 밀려 별다른 활약 없이 대회를 마쳤다. 커리어 초반 파울레타는 도전을 통해 성장했지만, 그때까지는 스타 선수들에게 밀린 공격수였다.

아쉬웠던 국가대표팀 커리어

아쉬움과 기쁨이 공존했던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 ⓒ 위키미디어


데포르티보를 떠난 파울레타는 가족적인 이유를 들어 프리미어리그 팀의 러브콜을 뿌리치고 프랑스의 지롱댕 보르도로 향한다. 결과적으로 매우 적절한 선택이었다. 프랑스 리그로 이적한 2000년부터 파울레타의 득점력이 만개하기 시작한다. 이적 첫 시즌 파울레타는 리그에서만 20골을 잡아내며 득점 2위에 올랐고, 다음 시즌에는 22골을 기록하며 생애 처음으로 1부리그 득점왕 자리에 오른다. 각종 대회를 통틀어 35골을 성공시키며 놀라운 활약을 펼친 파울레타는 프랑스 최우수 선수상에도 뽑힌다.

기세를 몰아 2002 한·일 월드컵 조별예선 2차전 폴란드전에서 해트트릭을 터뜨리는 등 포르투칼의 주포로서 자리매김했지만, 월드컵은 한국과 미국에게 밀려 조별예선에서 탈락하고 만다. 이 때부터 포르투칼의 주전 공격수는 파울레타였다.

그러나 클럽에서의 활약과 별개로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파울레타 활약은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평가전과 지역 예선에서는 골을 펑펑 터뜨렸지만, 정작 메이저 무대의 본선에서는 쉽게 득점포를 가동하지 못했다. 자국에서 열린 유로2004에선 한 골도 성공시키지 못했고,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앙골라와 경기에서 한 골을 넣는데 그쳤다.

메이저 대회에서의 침묵은 아쉬웠지만 국가대표팀에서 47골을 성공시켜 에우제비오가 가지고 있던 최다득점자 자리를 본인의 자리로 만들었다. 훗날 호날두가 기록을 경신하지만 최다득점자 타이틀은 파울레타가 에우제비오와 호날두를 잇는 대형 공격수임을 증명한다.

프랑스 리그의 파괴자

파리의 구세주였던 파울레타 ⓒ 위키미디어


다소 아쉬웠던 국가대표 활약상에 비해 클럽에서는 항상 매서움을 유지했다. 보르도에서 130경기에 나서 91골 퍼부은 파울레타는 2003년 파리 생제르맹(PSG)으로 적을 옮긴다. 현재 PSG는 프랑스 무대의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달랐다. 제이제이 오코차, 호나우지뉴 등 슈퍼스타들이 거쳐간 클럽이지만, 순위는 우승권과 하위권을 오가는 불안정한 전력을 가진 팀이었다.

파울레타는 불안한 전력 속에서도 꾸준한 득점력을 유지하며 PSG를 이끌었다. 적지 않은 나이로 인해 득점 숫자는 다소 줄어들었지만, 마지막 시즌을 제외한 매시즌 리그 두자릿 수 득점에 성공했다. 2005-2006, 2006-2007 시즌 연속 득점왕에 등극했을 정도로 프랑스에서는 최고 공격수로 여전히 위치했다. 리그 뿐만 아니라 특히 컵대회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주며 PSG에게 2번의 구프 드 프랑스 타이틀과 1번의 구프 드 라 리그 우승을 선물했다. 2008년에 은퇴할 때까지 프랑스 리그에서만 141골을 성공시킨 파울레타는 프랑스 리그의 '파괴자'였다.

파울레타의 은퇴는 포르투칼 축구사의 중요한 지점 중 하나다. 파울레타가 떠난 포르투칼은 매번 최전방 공격수 자리에서 문제가 발생하며 국제대회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슈퍼스타 호날두도 플레이 특성상 파울레타의 공백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었다.

세계 축구사적으로도 파울레타의 퇴장은 전통적인 9번 공격수의 퇴장을 의미했다. 레알 마드리드 소속의 반 니스텔로이를 제외하면 2000년대 초반을 주름잡은 정상급 9번 공격수는 파울레타를 마지막으로 대부분 사라졌다. 파울레타는 2000년 후반까지 뛴 몇 안되는 정통파 공격수로 남게 되었다.

파울레타는 빠른 스피드는 보유하고 있지 않지만 공격수에게 중요한 특유의 위치선정과 슈팅력을 지니고 있었고, 크지 않은 키에도 헤더에 능했다. 프로 통산 경기당 득점률이 0.525에 달할 정도로 파울레타는 치명적인 공격수였다.(참고로 당대 최고의 공격수 중 하나인 반 니스텔로이의 득점률은 0.579로 크게 차이가 없다.) 파울레타는 포르투칼은 물론 유럽을 대표하는 공격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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