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판 에펠탑, 법문사 사리탑

고태규의 실크로드 문명기행

검토 완료

고태규(tgko)등록 2017.12.18 20:09
아침 7시 반에 2번 투어버스를 타고 시안역을 출발해서 10시에 법문사(法門寺)에 도착했다. 시안에서 서쪽으로 120킬로 쯤 떨어져 있다. 법문사는 후한 영제 때 건립되어 1,8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황실 사찰이다.  당나라 때인 631년에 건립된 사리탑과 부처님 손가락 진신사리가 볼만하다. 1981년 지진으로 반이 무너지고 나머지 반도 1986년에 무너져버려 다시 지은 것이다. 반쪽만 위태위태하게 서있는 사진이 박물관에 남아 있다. 법문사는 스투파나 티벳 글씨가 보이는 걸로 보아서 티벳 라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거 같다. 부처님 진신사리는 새로 지은 사리탑 법당에 모셔져 있다. 여기 손가락 사리는 진짜라고 한다. 딱 하얀 뼈 한 마디만 보였다. 하기야 그 많은 사찰에 있는 사리가 모두 진짜라면 부처님 몸이 100개라도 모자랄 것이다. 유럽에 예루살렘에서 가져 왔다는 예수님 성혈이 많은 것처럼. 벨기에 부뤼헤에 있는 바실리크 성혈교회(Basilique du Saint-Sang)에서는 1146년 제2차 십자군전쟁 때 예루살렘의 대주교에서 받아왔다는 성혈을 크리스탈 용기에 담아놓고 보여주는 대가로 돈을 받고 있었다.     

법문사박물관은 진보 진열실과 역사문화 진열실로 나뉘어져 있다. 박물관에는 무너진 석탑 지하궁전에서 발견된 진귀한 불교관련 보물들이 잘 정리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여기서는 금박 8중 사리함이 걸작이다. 부처의 사리를 8개의 금박함에 차례대로 넣은 보물 중의 보물이다. 부처님 손가락 사리가 얼마나 소중했으면 8번이나 상자에 넣어 보관했을까? 이집트 카이로 국립박물관에 있는 투탕카멘의 관이 4개의 거대한 금박 박스에 차례대로 들어가도록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다. 그 크기만 다를 뿐이다. 귀한 물건일수록 싸고 싸고 또 싸는 심리의 유산이다. 사진 촬영을 엄하게 금지하여 벽에 붙어 있는 사진만 겨우 찍었다. 완벽한 형태로 잘 보관된 진귀한 유리병, 유리잔, 유리접시도 10여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시안에 오면 '병마용은 안보아도 법문사박물관은 봐야 한다'는 말이 빈말이 아닌 거 같다.  

원래 법문사 옆에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법문사와 사리탑은 중국 불교 사찰 건축에 대한 새로운 컨셉을 잘 보여준다. 건축물이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 그 양식과 건축 자재가 변하기 마련이어서 불교 건축물을 이렇게도 지을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중국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해석하는 나라라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조용한 시골 마을에 전원식 주택 대신에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지어놓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현대판 콘크리트 피라미드나 현대판 낙산대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 법문사 사리탑도 상당히 규모가 큰 탑인데도 새로 지은 법문사 탑에 비하면 대궐 옆에 붙어 있는 초가집처럼 초라해 보인다.

입구에서 사리탑까지가 거의 1킬로가 넘는 거리다. 까마득하다. 길 양쪽으로 다양한 불상이 서있다. 어머어머한 스케일과 나름대로 세련된 조각상에 놀랐다. 소재는 플라스틱이나 석고 또는 시멘트인 거 같다. 아무튼 석재나 목재는 아니다. 물론 진짜 금도금도 아니고. 보는 사람 기를 죽여버리는 그런 스케일이다. 중세 때 지은 유럽의 교회들이 그 어마어마한 스케일로 사람들의 기를 죽였던 것처럼. 성 베드로 대성당(로마), 쾰른 대성당, 세비야 대성당, 성 스테판 대성당(비엔나), 세인트 폴 대성당(런던) 등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내가 지금까지 본 교회나 사찰 또는 모스크 탑 중에서 이 사리탑보다 스케일이 큰 탑은 본 적이 없다. 유럽에서 가장 크다는 바티칸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이나 이스탄불의 아야 소피아 또는 블루 모스크의 첨탑도 이 새로 지은 법문사 탑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이란의 이스파한이나 마쉬하드에 있는 모스크들도 마찬가지다. 새로 지은 절의 규모도 엄청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으로 올라가서 정문 쪽을 바라보니 거리가 너무 멀어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과장이 너무 심한가? 아무튼 엄청난 거리다. 1킬로가 넘는 진입로 양쪽에는 거의 200미터 간격으로 아주 깨끗하고 세련된 현대식 화장실이 줄지어 서있다. 중국의 화장실이 더럽다는 속설을 한꺼번에 바꿔버리겠다는 오기처럼 보이는 것은 왜 그럴까?

우리가 이렇게 세계에서 가장 돈도 많고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장식물처럼 느껴진다. 성당(盛唐)시대의 그 화려하고 장대한 불사를 재현하려고 한 거 같다. 화청지나 병마용 관광단지에서도 느낀 거지만 요즘 중국의 강력한 국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장대한 스케일에 세련미까지 과시하고 있다.

과거에는 크기는 거대하지만 조잡하거나 유치하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요즘 지은 건축물들은 차원이 다르다. 우리나라 관광지의 안내판들이 조잡한 것에서 세련되게 바뀌어가는 그런 느낌과 비슷하다. 선진국 관광지의 좋은 점을 바로 바로 받아들여 응용한다는 느낌이다. 보도블록만 해도 화청지는 아스팔트나 시멘트 벽돌이 아니라 대리석을 깔았다. 거기에 로마 보도블록에서 보는 것처럼 미끄러지지 않게 일일이 정으로 쪼아서 선을 그어 놓았다. 이건 엄청난 노동력과 재력이 없으면 시도할 수 없는 정성이다. 지금 중국이 그런 재력과 여유를 갖고 있다는 상징적인 사례이다. 과거 당나라나 명나라 또는 청나라 때의 전성기가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입구까지 너무 멀어서 나올 때는 셔틀 기차를 타고 나왔다. 요금을 20위안이나 받는다. 오후 한 시에 시안 역으로 돌아간다는 버스가 떠날 생각도 안 한다. 운전사가 안에서 자고 있다. 중국 사회가 엄청 빠른 속도로 변하고 있지만 아직도 변해야 하는 것도 많다. 버틀러라는 영어 이름을 가진 중국 청년과 함께 앉아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오후 4시가 다 되어서야 시안 역에 도착했다. 시안 역에서 일반 기차 타는 방법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일정 때문에 시안 북쪽에 있는 서하(西夏)왕국(1032-1227)의 수도 인촨(银川)과 중국 공산당의 근거지 연안에 가보지 못한 것이 내내 아쉽다. 서하는 실크로드 교역에서 가장 중요한 중개지 역할을 했던 나라이기 때문에 위키백과의 기술을 토대로 서하의 역사를 재구성하여 여기 소개한다. 일본의 저명 작가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 1907-1991)의 소설 <돈황>의 배경이 된 바로 그 왕국이다. 

서하는 1032년에서 1227년까지 중국 북서부의 간쑤성(甘肅省), 산시 성(陝西省)에 위치했던 티베트계 탕구트족의 왕조이다. 왕성은 이(李)씨이다. 전성기에는 북으로는 고비 사막, 남으로는 란저우, 동으로는 황허, 서로는 옥문에 이르는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국교는 불교였고 중국의 영향으로 문화가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되어 있었으며 한자에서 파생된 문자인 서하문자를 가지고 있었다.

탕구트족은 자신의 나라를 "크고 높은 나라"(大白高國)라고 불렀었다. 당나라는 탕구트족을 평하부(平夏部), 남산부, 동산부로 나누어 지배하였다. 9세기 후반 황소의 난 당시 평하부의 탁발사공(拓跋思恭)이 장안 수복에 결정적 기여를 하여 당나라로부터 황실의 성인 이(李)씨를 하사받고, 하국공(夏國公)으로 봉해진다. 1005년 송나라의 공격을 막아낸 덕명(德明)은 송나라와 화의하고 송 황실로부터 조(趙)씨 성을 하사받고 은주, 유주 절도사의 직책을 받는다. 1038년까지는 송나라의 신하국이었다.

1038년 서하의 원호(元昊)가 조씨 성을 버리고 탕구트어에 의한 성으로 바꾸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나라의 이름을 대하(大夏)로 정해 고대 중국 하(夏)나라의 계승을 자처하였고, 연호를 천수예법연조(天授禮法延祚)로 고쳤다. 서하문자를 제정하고 관제를 확립하는 등 독립국가의 면모를 갖추려 하였다. 서하는 송나라에게 동등한 관계를 요구하였으나 송나라는 서하 황제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1041년 서하군이 송나라 영토 근처에 집결해 호수천에서 양국 간 전투가 벌어졌는데, 송군이 패배해 전사자가 1만 3천 명에 달했다. 그 후 2년 여간 전쟁이 계속 되었는데, 송나라와 요나라가 강화를 맺고 서하의 병사와 백성들이 느끼는 전쟁의 피로가 커지는 등 전황이 서하군에 유리하지 않게 되자 서하에서는 송나라에 강화를 요청했다.

송나라는 서하와 요나라와의 동맹을 우려하여 서하의 강화 교섭을 받아들였다. 1044년 송이 서하에게 매년 조공을 바치는 대신 서하에서는 송나라의 황제를 인정하고 신하의 나라가 되는 조건의 강화를 맺었다. 그래서 서하의 황제는 하국왕(夏國王)에 봉해졌고, 송나라는 평화유지를 위해, 사실상 공물에 해당하는 비단 13만 필, 은 5만 냥, 차 2만근을 매년 서하국에 보내기로 하였다. 한나라가 흉노에게 그랬던 것처럼, 돈으로 평화를 산 것이다. 

이후 서하는 송나라 및 화북 지역에 있던 내륙 아시아인인 거란족의 요나라(遼)와 불안한 3국 관계를 유지했다. 서하는 송의 관제를 모방했으며,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었다. 중국과는 달리 불교를 열렬히 신봉하여,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서하의 정치 상황은 갈수록 부패가 만연하고 경제 사정은 열악해져 갔다. 게다가 1202년부터 서하는 당시 국력이 신장하고 있던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의 침략을 6번이나 받게 된다. 이를 명목으로 1206년 왕의 사촌 이안전은 환종 이순우를 시해하고 왕을 자처하였다(양종). 그런 만큼 이안전은 몽골의 침입에 대비해 군사력 증강에 힘썼다. 그러나 그러한 보람도 없이 1207년 몽골의 대대적인 침입에 수도가 함락될 위기에 놓였고, 결국 이안전은 몽골에의 복속을 약속하고 자신의 딸을 보내 칭기즈칸과 혼인시켰다. 이후 서하는 몽골의 명령을 받아 금(金)나라와 오랜 전쟁을 치렀는데, 이는 양국의 국력을 쇠퇴하게 하였다. 1211년 왕의 조카 이준욱이 반역을 일으키자 양종은 퇴위하였으며, 그 해 사망했다. 1226년에는 칭기즈칸의 서정(西征) 참가를 거부하여 분노를 샀고, 다시 몽골의 침입을 받았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과 국력의 소모 뒤에 결국 서하는 1227년 칭기즈칸의 몽골군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징기스칸이 바로 이 전쟁을 치르고 돌아오는 길에 말에서 낙마하여 부상을 입어 죽게 된다. 

서하를 점령한 칭기즈칸은 대대적인 민족 학살을 실시했는데, 이는 서하의 저항이 끈질겨 칭기즈칸을 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중국 국영 CCTV의 보도에 따르면, 칭기즈칸은 서하인을 매우 철저하게 살육해서 거의 멸족시켰기 때문에 현재까지 서하인의 후손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한다. NHK가 방영한 <실크로드 - 제4부 환상의 흑수성 편>에 보면 서하의 서북쪽 유적인 카라호토(黑水城) 전설이 나온다. 여기서 몽골군은 흑수성으로 흘러가는 흑수의 수로를 차단하여 서하군을 물리쳤다고 설명하고 있다.

서하는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사용했다. 탕구트어라고도 부르는 서하어(西夏語)는 중국 티베트어족의 티베트-버마어파에 속하며, 1036년에 공포된 서하문자(西夏文字)는 한자(漢字)와 마찬가지로 1자가 1음절 곧 1낱말을 나타내는 표의문자였다. 서하문자로 <논어 論語>, <맹자 孟子>, <손자병법 孫子兵法> 등의 서적이나 불경을 서하어로 번역하였고, <신집금쇄장치문 新集金碎掌置文>, <신집금합도 新集錦合道> 등의 문학 작품도 전해진다. 그리고 인쇄국(印刷局)인 각자사(刻字司)를 두어 문자 보급을 위해 단어집이나 음운(音韻)을 정리한 운서(韻書) 등의 서적을 출판하였다. 몽골에 의해서 멸망당한 후 서하의 민족과 언어는 절멸됐으나, 이들 서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서하문자는 오늘날에 와서 그 발음이나 의미가 파악되고 있다. 특히 서적 중에는 불경이 많은데 그 가운데 대부분은 한역 불경의 번역이므로 한자 문헌과의 대조가 가능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서하문자의 해독의 진행되었다. 지금은 완전히 해독되고 있다.

서하는 비단길을 통한 동서 교역을 매개하며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며 크게 세력을 넓혔다. 그리고 송과 활발히 교역하며 농경과 유목, 한족(漢族) 문화와 탕구트 고유문화가 결합된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닝샤후이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의 인촨 서쪽의 허란산(賀蘭山) 기슭에서 발견된 서하왕릉에는 9개의 황제릉을 포함해 250여 개의 묘지가 분포해 있는데, 서하 문화의 특징을 알려주는 수많은 유물과 부장물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서하왕릉의 능탑(陵塔)은 '동방의 피라미드'라고 불릴 정도로 웅장하면서도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또한 서하는 불교가 발달해 카라호토와 둔황(敦煌) 일대에 회화와 탑 등의 불교 미술 작품들을 남겼다. 불교를 국교화하여 국가에 화상공덕사(和尙功德司), 출가공덕사(出家功德司)라는 관청을 설치했고, 각지에 절이나 탑을 세우고 불교 경전을 서하어로 번역하여 보급했다. 이처럼 실크로드 문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서하왕국의 근거지를 가보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간직한 채 발길을 티엔쉐이(天水)로 돌린다. (2013년 9월 7일 토요일, 맑고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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