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선고와 나의 재판은 '양심적' 이었을까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대한 법관의 의식이 궁금하다

검토 완료

김창엽(husky)등록 2018.02.07 09:12
"부당 이득금 부분은 원소 승소 판결하고, 매수 청구 부분은 원고 패소입니다." 2월 6일 오전 10시 5분 판사의 선고가 떨어졌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당사자가 돼 본 재판의 1심은 이렇게 매듭지어졌다.

우연스럽게도 한국 사회의 커다란 관심 속에 치러진 이재용씨의 항소심 판결이 내려진 직후 받아든 선고여서 기분이 묘했다. 60살이 멀지 않은 시점에서 내가 재판의 당사자가 될 것이라는 꿈꿔본 적도 없었는데, 결과는 일단 그리됐다.

나에 대한 재판이 이뤄진 법정. 원고석에 두 차례 앉아 각각 2분 남짓씩 재판에 임하는 걸로 나의 1심 재판은 끝났다. ⓒ 김창엽


이재용씨 재판과 내 재판은 다른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원천적으로 비교불가에 가깝다. 당사자 신분이 그는 피고였고, 나는 원고였으며 그는 형사재판을 나는 민사재판을 받았다. 사회적 지위야 말할 것도 없어서 그는 세계적 기업의 총수이고, 나는 시골 농부로 불리기를 가장하는 선호하는 무명씨에 가까운 처지이다.

그럼에도 재판의 두 당사자와 그 판결을 담당하는 법원 재판부까지, 모두 다 양심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는 근원적으로는 다를 게 없다. 그 양심을 바탕으로 원고, 피고, 재판부가 재판에 임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사소한 공통점도 있는데, 이재용씨 재판에 있어서는 당사자의 한쪽이 국가(검찰)이고 내 경우 지방자치단체(시청)라는 것이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는 일종의 법인격을 가진 존재들이고, 이재용씨나 나는 당연 자연인이다. 이재용씨 만큼은 아닐 수도 있지만, 공공기관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한다는 게 내 경우 상당히 고통스러웠다.

예를 들면, 소장을 제출한 게 지난 해 9월 4일이었는데, 2번의 변론 기회를 갖고 1심 판결이 내려지기까지 무려 5개월 이상 걸린 것이다. 설령 원고라 해도 재판을 즐기면서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듯하다.  

내 경우 첫 변론기일이었던 지난 해 12월 12일 이전 1주일가량은 잠을 제대로 청하기가 쉽지 않았다. 상대인 시청은 변호사를 고용했지만, 내 경우 나 홀로 소송이어서 혼자 인터넷을 뒤져보고 별의별 상황을 가정한 뒤 그에 대한 답변을 준비했다. 출정 날이 가까워지자 잠을 청하려 해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헌데 실제 첫 재판에 나가보니 내게 배당된 시간은 2분 정도였다. 예, 아니오 한마디씩만 했던 듯하다. 내 입장을 부연 설명하려 하자, 묻는 것에 답하라며 제지를 당했다.)

법정 앞의 재판 진행 일정표. 내 재판이 있었던 2월 6일 오전의 경우 10시부터 11시 45분까지 무려 24건에 대한 재판이 이뤄졌다. ⓒ 김창엽


1심 선고를 받아들기까지 지난 5개월은 여간 신경 쓰이는 시간이 아니었다. 돈만 생각한다면, 이렇게 힘들여 소송을 해야 하나 생각도 들었지만 공권력의 한 축인 행정력이 시민들을 상대로 부당하게 집행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면 힘을 내서 소송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5개월에 걸친 재판 과정에서 유일한 안도 혹은 반가움은 2차 변론기일이었던 지난 1월 16일 찾아왔다. 역시 2분 남짓 됐을까, 아무튼 3분도 안 걸렸던 당일 재판에서 판사가 "원고는 피해가 너무 크다는 것 이지요"라고 확인성 질문을 했던 것이었다. 판사가 내 마음을 알아주는 것 같아, 속으로 너무나 반가웠다.

그러나 1심 선고 즉 판결문에 내게 위로가 됐던 판사의 그 같은 '인식'은 반영되지 않았다. 부당이득금 승소는 100만원 여에 불과했고, 내가 패소한 매수청구 부분은 그보다 10배도 넘는 금액이었던 까닭이다.

한국의 대다수 판사들이 '살인적으로' 빡빡한 재판 일정을 감당하고 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누적된 업무 피로는 사실 양심의 작동에도 영향을 미친다. 결과적으로 원고인 내게는 실속이 전혀 없는 선고였지만, 그래도 난 재판정에서 한번이나마 판사로부터 위로를 느낀 까닭에 판사의 수고, 그리고 기본 양심에 감사하고 싶다.

법원 호실 안내판. 매번 속으로 긴장하며 법정의 호수를 확인하곤 했다. ⓒ 김창엽


그렇다면 이재용씨 항소심 재판은 어땠을까? 언론을 통해 접하는 표정 등으로 볼 때, 이재용씨는 판결에 만족하는 듯싶다. 인지상정, 재판부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재용씨의 속을 나 같은 촌부가 짐작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그도 재판부의 양심에 기대를 걸어보지 않았을까? 내 경우 믿는 것은 유일하게 판사의 양심이었다. 피고인 시청측은 애초부터 상식적이지 않았고, 또 재판과 관련해 공무원 개개인의 양심이 작동하길 바라지도 않았다.

이재용씨 역시, 원고인 특검에게서 양심 같은 걸 기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로지 재판부의 양심에 호소하고 매달렸을 것이다. 이재용씨는 그 스스로를 위무하기 위해서라도 "재판부가 양심에 기초한 판결을 내렸다"고 믿을 것이다. 물론 그에게 더 큰 죄를 물은 1심 재판부는 항소심 재판부만큼 양심적이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헌데 흔히들 양심이라는 말을 하지만 양심이라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다. 국어 사전은 양심을 이렇게 정의한다.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

사법부를 흔히 민주주의의 최후 보루라고 말한다. 재판부의 양심이 결여되거나 양심에 충분히 기초하지 않은 재판이라면, 민주주의는 유지되기 힘들다. 내 재판의 경우 엄청나게 과다한 송사업무에도 불구하고 판사의 기본 양심이 작동됐다고 나는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이재용씨 재판부도 그랬을까?

시골에서 태어나서 어쩌면 시골에서 뼈를 묻을, 나는 외관으로만 따지면 시쳇말로 '흙 수저'일 게다. 그러나 스스로는 한 번도 흙 수저니 금 수저니 하는 식으로 생각한 적이 없다. 사람은 제각각 다 그 나름의 가치가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한국 최고의 재벌 총수에 대한 선고 소식과 시골농부인 나의 재판 선고를 받아든 오늘만큼은 좀 씁쓸하다. 실체 없는 허깨비 같은 그 놈의 '양심'이라는 게 사람을 허탈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삶의 의욕이 꺾이는 듯한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덧붙이는 글 마이공주 닷컴(mygongju.com)에도 실립니다.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