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님, 허벅지 위 그 손 좀 치워 주시죠

'취업'과 '성추행'... 지긋지긋한 딜레마 벗어나려면

등록 2018.02.28 16:39수정 2018.03.06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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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으로 따지면 정말 취업을 할 만한 곳이 남을까? ⓒ unsplash


설에 만난 조카가 취업 이야기를 한다. 며칠 전, 회사의 인사 담당자와 통화를 할 일이 있었단다. 통화를 끝냈는데 곧장 그 회사에서 다시 전화가 왔다. 받아보니 아까 통화했던 담당자 보다 젊은 목소리의 남자 직원이었다. 직원은 조카의 이름을 부르며 꼭 함께 일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는데 말투가 너무 느끼해서 그 회사에 원서를 낼 생각이 싹 사라졌다고 했다.


속으로 '그래 잘 생각했다' 하고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걱정이 생겼다. 이런 식으로 따지면 정말 취업을 할 만한 곳이 남을까? 요즘 취업하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뽑아만 주신다면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하며 덤빌 수는 없지 않을까. 그래도 조금이라도 양성 평등한 일터를 찾아봐야지.

그래 사기업보다는 공기업이나 공공기관이 낫겠지. 중소기업체보다는 규모가 있는 곳이 좀 낫겠지. 뭐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머리를 저었다. 공무원인 검사도 성추행을 당하는 판국에 대한민국에서 어디라고 안전한 일터가 있을까?

25년 전, 내가 대학 졸업반일 때 겪은 일이 생각났다. 유명 대기업에서 역량 있는 대학생을 뽑는다는 신문 광고가 났다. 약 50명의 학생을 뽑아서 학생들이 재능을 맘껏 펼칠 공간에 컴퓨터 등 하드웨어를 제공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며칠을 고생했다. 내 보고서의 요지는 '백색가전들도 향후엔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처럼 다양한 색상이 나와야 한다' 이런 이야기였다. 그땐 참신한 관점이어서 뽑힐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했다. 다행히 1차 서류 전형과 2차 프레젠테이션을 통과해 최종합격을 했다.

합격한 학생들이 처음으로 다 모였더니 정말 이력이 화려했다. 자기 전공 분야에 재능이 출중했다. 회사는 우리에게 최신식 빌딩 한 층 전체를 내주었다. 학생들이 작업하는 데 최적의 환경이 갖춰있었다. 회사는 개소식을 어찌할지 학생들에게 일임했다. 지원은 충분히 해 주면서 자율성을 보장해 주는 회사의 방침은 참신했다. 친구들은 열정을 쏟아서 참신한 개소식을 준비했다.


인자하신 이사님의 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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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인자하신 이사님이 술이 들어가니 내 허벅지를 주물럭거렸다. 난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었다 ⓒ unsplash


그 와중에 나는 주눅이 들었다. 친구들의 창의성을 따라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 좋은 기회를 내가 놓치지 말고 버텨야 하나 아니면 떨어져 나가야 하나? 인연의 끈을 어쩌지 못하고 모임에 참석하던 날, 회식에 참가하게 되었다.

회식에 우리를 담당하는 이사님이 참석하셨다. 이사님은 우리 모임에 대해 애정이 남다르셨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려고 애를 쓰셨다. '너희는 당당해라. 이미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들이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런데 그 날 앉다 보니 내가 이사님의 옆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렇게 인자하신 이사님이 술이 들어가니 내 허벅지를 주물럭거렸다. 난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었다. 아는 사람에게 이런 일을 당하는 게 처음이라 머리 회로가 엉켜서 멍했다.

얼마 전까지는 이사님의 손은 어깨를 두드렸는데 그 손이 허벅지를 주물럭거리고 있는 상황. 같은 손인데 의미도 비슷한 건가? 아닌가? 설마 내 허벅지를 여성의 허벅지라서 주물럭거리는 건가? 만일 그렇다면 날 왜? 우리 모임엔 나보다 훨씬 예쁜 여학생이 있었다. 그러니 나에게는 이런 행동을 할 리가 절대 없다. 그렇게 나는 판단을 내렸다. 그래서 난 그 자리가 끝날 때까지 그 손을 참았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왜 그리 멍청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때 나는 학교에서 '여성학' 강좌를 들었고 페미니즘 책을 사서 읽었던 학생이다. 내 일이 아닌 저 멀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성희롱 사건에 대해선 내 생각을 똑 부러지게 이야기할 입을 가졌으면서도 내게 닥친 성추행 앞에선 무력했다. 어떤 대처를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러니 어떤 대처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 후로 그 모임에서 점차 참가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거기서 떨어져 나왔다.

매뉴얼이 필요하다

몇 해 전, 내가 선발되었던 대학생 모임의 멤버가 그 대기업의 젊은 나이에 임원이 되었다는 기사를 본 언니는 나에게 문자를 보내줬다.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언니는 다 들어온 떡을 놓쳤다며 안타깝다고 했지만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나도 솔직히 그 기사를 보면 아쉽기는 했다. 내가 참았다면 그 기업에서 '이사'는 못 돼도 '직원'은 한번 될 수 있었을까? 대기업의 직원이 되어볼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면 거기서 나오지 말고 끝까지 버텼어야 했다. 거기서 버티면서 성추행에도 당당히 대응했다면 아마 난 그 회사에 취업이 되진 못했을 거다.

과연 내 이력을 지키면서 성추행을 거부할 방법이 있었을까? 25년 전, 과거엔 그런 방법이 없었다. 사회에 내 엉덩이 하나 붙일 조그마한 자리가 날 때까지 누군가의 눈에 안 띄길 기도하며 참고 버티는 것. 이 정도가 그나마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 과거엔 그 방법이 없었지만, 과연 지금은 생긴 걸까?

'취업'과 '성추행'이 떼려야 뗄 수 없는 지긋지긋한 딜레마에서 나는 내 조카에게 어떤 매뉴얼을 제공해 줄 수 있을까? 조카에게 그냥 닥치는 대로 그때그때 알아서 살아남으라고 해선 안 되는 것 아닐까?

늦었지만 이제라도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매뉴얼을 학교에서 교과과정으로 배우게 해야 한다. 입에 딱 붙도록 훈련하고 위급한 상황에 닥치면 '엄마'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입에서 이 말이 튀어나와야 한다.

그리고 기업들은 청년들이 사회로 들어올 때 통과의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의 성별 비율의 차를 줄이는 데 노력을 해야 한다. 취업이나 '인턴'등의 선발하는 자리에 앉아있는 이들 대부분은 여태껏 남성이었고 가부장제 사고에 젖어있는 경우가 많았다.

정부는 이들의 성별 비율 격차를 줄일 대책을 세우고 이들이 평등한 사고를 갖도록 교육해야 한다. 그래야만 장기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지금이라면 허벅지 주물럭거리는 이사의 손을 보고 뭐라고 말해야 했을까?

"이사님, 제 허벅지 위에 그 손 좀 치워주시죠."

혼자 써 놓고 혼자 통쾌한 이 느낌은 뭘까?
#성추행 #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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