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쿨호수와 홍치라포

고태규의 실크로드 문명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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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규(tgko)등록 2018.03.25 19:25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는 국경초소, 홍치라포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는 중국의 국경초소인 홍치라포에는 새로 멋지게 지은 건물 두 개와 원시적인 신식 화장실 하나가 전부다. 구식 화장실에 들어가면 정말 원시적인 방법으로 일을 보아야 한다. 여기는 아예 옆문도 없다. 그러니까 서로 얼굴보고 얘기하면서 똥을 누어야 한다. 앞문이 없는 것은 참을만한데, 옆문까지 없는 것은 아직 적응이 안 된다. 나는 들어갔다가 어떤 남자가 앉아있기에 얼른 나와 버렸다. 아예 아무것도 없는 벌판이 훨씬 냄새도 덜나고 마음도 편하다. 관광객 이십여 명이 여기저기 서성거렸다. 중국 군인이 여기도 공휴일이라서 8일(화요일)부터나 파키스탄 쪽으로 통과가 가능하다고 말해준다. 공휴일에는 국경초소도 쉰다는 걸 여기 와서 알았다.      

대절한 택시를 타고 오후 두시쯤 타스쿠얼간으로 돌아와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존의 친구가 산다는 마얼양(馬爾洋 마이양)이라는 작은 마을에 가고 싶었으나 실패했다. 외국인은 방문이 안 된단다. 어제는 아무 말 없더니, 오늘 점심을 먹고 나서 현지 운전사가 그랬다는 것이다. 국경 군주둔지라 통제지역이라고. 지도로 찾아보니까 마얼량은 타스쿠얼간과 홍치라포 중간쯤에서 동쪽으로 약간 들어간 위치에 있었다. 동파미르고원에 자리 잡은 오지 중의 오지 마을이어서 가보고 싶었던 것이다. 중국은 왜 이리 안 되는 것이 많은지. 경제적으로 몸집이 커진 것 외에는 아직도 개선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 가는 곳마다 신분증 검사에서부터 불편한 화장실까지. 아직도 고쳐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차 안에서 기다리면서 거리를 오가는 현지인들을 구경했다. 타지크족 여인들의 의상이 특이하다. 이 여인들은 모자를 쓰고 다니는데, 위가 납작한 모양이다. 쓰고 다니기에 좀 불편해 보인다. 저들은 수백 년 동안 저런 복장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여기에는 한족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한족인 존도 여기서는 모든 걸 낯설어 하면서 외국인처럼 행동했다.    

카라쿨호수와 키르기스 유목민 민박
마얼양 마을을 포기하고 카쉬가르로 돌아가는 밴을 탔다. 두 시간쯤 가다린 거 같다. 7인승인데 승객이 5명 이상은 타야 운전사도 수지타산이 맞기 때문에 일찍 온 손님들이 아무리 가자고 졸라도 출발할 생각을 안 한다. 나는 카쉬가르에서 여기 올 때도 그랬기 때문에 조바심이 나지 않았다. 그러려니 하고 마냥 기다렸다. 중국인 두 명은 화가 났는지 왜 출발하지 않느냐고 성화다. 얼마쯤 지나서 손님이 5명이 되자 밴은 출발했다. 나는 이 사실을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 중국 오지에서 조바심 내면 나만 화병으로 죽는다. 이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 상책이다. 두 시간쯤 달려서 카라쿨호수에 도착했다. 승객 중 나 혼자만 내리고 나머지 4명은 카쉬가르로 떠났다. 

여기도 주민끼리 손님 쟁탈 경쟁이 심해서 여러 명이 달라붙는다. 나는 모두 뿌리치고 호숫가에 있는 파오로 갔다. 나 혼자라고 했더니 옆집으로 가라고 손으로 다른 파오를 가리킨다. 그곳은 키르기스 유목민인 아뿌뚤라네 집이다. 호수에 비친 설산을 실컷 보고 싶어서 일부러 호수 바로 옆에 있는 파오를 선택했던 것이다. 숙박비는 저녁과 아침 포함해서 100위안. 이 남자는 27살이고, 24살인 아내 이르쓰꿀 사이에 두 아들을 두고 있다. 큰 아이가 두 살인 아뿌뜨세딸이고, 막내는 이제 다섯 달 된 아뿌네이잘이다. 이르쓰꿀은 얼굴을 보니 몽골인 혈통인 거 같다. 얼굴이 강한 햇빛에 구릿빛으로 그을렸는데도 이목구비가 수려한 게 예쁜 얼굴이다. 카라쿨호수 주변 마을에는 키르기스인들이 산다. 그런데 이들은 카자크인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민족의 피가 섞였기 때문에 얼굴만 보고는 잘 모른다. 복장과 언어 풍습 등으로 구별할 뿐이다. 내가 보기엔 아뿌뚤라는 타지크나 키르기스인 같은데, 아내인 이르스꿀은 틀림없는 몽골인이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몽골족인지, 키르기스족인지, 타지크족인지, 카자크족인지 구분하기가 힘들다.

중앙아시아 지역이 원래 지도를 놓고 보면 지구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어서 동서양의 다양한 인종과 민족들이 전쟁이나 상거래를 통해 서로 교류하면서 자연스럽게 피가 섞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13세기에 몽골군이 서역지방을 정벌하면서 저항하는 남자들은 무자비하게 살해했지만 여자들은 거의 죽이지 않았다. 원정과 전투에 지친 병사들에게 재물과 함께 전쟁 노획물로 제공했던 것이다. 중국 드라마 <징기스칸>을 보면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그러니 자연히 피가 섞일 수밖에 없다. 중앙아시아에서 몽골인이나 우리 얼굴이 많이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몽골이 거의 백년이나 지배했기 때문에 몽골 피가 많이 섞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키르기스에 가면 나를 몽골사람이라고 한다. 아이를 해먹에 메달아 놓고 달래거나 재우는 풍습도 우리와 똑같다. 우리 어릴 때만해도 바로 이 파오에 있는 해먹과 똑같은 해먹이 있었다. 저런 풍습이 실크로드를 따라 몽골을 거쳐 한반도로 흘러들어온 것이다.              

배낭을 파오에 두고 바로 말을 타러 나갔다. 한 시간에 150위안을 부르는 것을 100위안으로 깎았다. 우루무치 부근 천산 남산목장에서 처음 타고 두 번째다. 거기에서는 천산을 바라보면서 산등성이에서 탔고, 여기는 카라쿨 호숫가에 있는 쑤바스초원이다. 설산을 바라보면서 타는 것은 똑같다. 호수 건너편 키르기스 마을로 가다가 중간에서 내렸다. 내가 소년 마부의 속셈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 친구 말이 저 마을까지 가는데 한 시간이 걸리고, 돌아오는데 한 시간이 걸리니까 왕복 200위안을 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중간에서 바로 말에서 내려 걸어서 돌아왔다. 덕분에 쑤바스초원을 가로질러 걸어오면서 설산과 호수와 가축을 배경으로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었다. 가축은 야크와 소, 말과 양이 많았다. 방목되어 있는 것 같지만 어두워지면 주인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와서 자기 가축은 귀신같이 알아내고 모두 집으로 몰고 간다. 어릴 때 늦은 가을날, 해질 때까지 우리가 들판에서 연을 날리면서 놀고 있으면 엄마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저녁 먹으라고 자기 아이들을 데려가는 것과 똑같은 정겨운 가을 풍경이다.    

저녁식사는 위구르 말로 '자펜'이라고 부르는 볶음밥이다. 중앙아시아에서는 가장 흔한 음식이다. 키르기스어로는 '팔로우'라고 한단다. 우리 볶음밥에 양고기와 감자를 넣고 만든 음식이다. 카쉬가르에서도 에덴호텔 앞 위구르 식당에서 먹어 보았던 것이다. 이르쓰꿀이 만든 것은 양고기는 적고 대신 푸릇푸릇한 애호박 같은 채소가 들어 있어서 그것보다 훨씬 깨끗하고 정성스러워서 맛이 좋았다. 그런데 그릇에 너무 많이 퍼주어서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이르쓰꿀이 저녁 내내 정성스럽게 만들었는데, 미안하지만 남길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차와 함께 먹으니 느끼함이 훨씬 덜하다. 이제 위구르 음식은 이골이 날만큼 많이 먹어서 슬슬 질리기 시작한다. 양기름 때문에 그런지 다른 음식보다 더 질리는 거 같다. 나는 한국 사람치고는 양고기를 아주 잘 먹는 축에 끼는데도 그렇다. 중국 음식은 그렇게 질리지는 않는데....
    
유르트 안에서 이르쓰꿀네 네 식구와 함께 잠을 잤다. 내가 바라는 현지인의 생활을 체험하는 여행이 바로 이런 것이다. 지난번 남산목장에서는 마을 행사 때문에 실패로 끝났었다. 오늘은 제대로 현지인의 생활을 그대로 똑같이 체험하는 것이다.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공간에서 잠을 자고. 내 이불은 맨 오른쪽에 폈다. 옛날 우리 목화 솜이불이 어디서 왔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바로 중앙아시아에서 온 것이다. 타클라마칸사막 주변 도시에 목화를 재배하는 밭들이 그렇게 많더니 바로 이런 이불을 만드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두께가 10센티도 더되는 무거운 이불을 두 개나 덮어주어서 너무 더워서 하나는 옆으로 제쳐두었다. 나무난로가 있어서 그런지 그래도 따뜻했다. 그런데 고산증 증세 때문에 그런지 머리가 계속 띵하고 아파서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어제부터 계속 머리가 아프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찬다. 여기가 해발 3,500미터쯤 되니까 그럴 만도 하다. 오늘 오전에 해발 4,500미터에 있는 국경초소 홍치라포에서는 더 심했었다. (2015년 10월 5일, 토, 맑음)

새벽에 오줌이 마려워 5시쯤 밖으로 나왔다. 이르스꿀네 식구들이 깰까봐 조심스럽게 파오 문을 열었다. 난로에 불기는 없었다. 호숫가에는 얼음이 얼 정도로 추운 늦가을 날씨라도 저녁 내내 난로를 피워서 그런지 파오 안에는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아직도 캄캄한 어둠 속에서 하늘을 보고 깜짝 놀랐다. 세상에! 하늘이 온통 별 천지였다. 금방이라도 하늘에서 호숫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하늘엔 잔별도 많고, 쾌지나칭칭 나네.' 그 가사가 딱 떠올랐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배웠던, 이제는 기억에서 사라진 수많은 별자리들과 캄캄한 하늘에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은하수들이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하늘을 밝히고 있었다. 저렇게 많은 별을 본 지가 얼마나 되었을까? 2011년에 통일전망대에서 해남 땅끝마을까지 국토종단 도보여행을 할 때 상주시 모동면인가 모서면인가 어느 중학교에서 텐트를 치고 잘 때 본 이후로 처음이다. 누군가 카라쿨호수에 가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하룻밤 머물면서 밤하늘의 별을 구경하라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고산지대에다가 주변의 공기가 그만큼 맑으니까 밤하늘에 별들이 많아 보이는 것이다.

나는 참 오랜 세월 동안 땅만 보면서 살아왔다. 아마도 우리 부모 세대도 먹고살기에 바빠서 거의 다 그랬을 것이다. 이제는 가끔 이렇게 하늘을 보면서 살고 싶다. 나 자신에 대해서 보상하면서 나머지 인생을 살고 싶다. 고등학교 때 단 한 번의 실수로 그동안 너무 먼 길을 돌아서왔다. 이제 그런 나 자신을 용서하고 싶다. 나머지 인생은 이렇게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 이런 경험과 기록은 내 인생의 부수입으로 남는 것이고----.

아침 8시가 넘었는데도 사람들이 일어나는 기척이 없다. 여기 신장 시간이 북경 시간보다 두 시간 느리기 때문에 새벽 6시인 셈이다. 유목민들의 생활은 철저하게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게 되어있다. 어두워지면 잠을 자고, 날이 밝으면 일어나고. 아침 8시인데도 어두우면 일어나지 않고, 날이 밝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밤 10시인데도 어두워지지 않으면 잠을 자지 않고 노는 것도 마찬가지 이치다.

해가 솟아오르는 무스타커봉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가지러 다시 파오로 들어갔다. 배낭을 열어서 겨울 등산복으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어제 밤에 여름옷을 입고 그대로 잤던 것이다. 바깥 공기는 여전히 차가웠다. 다행히 바람은 불지 않았다. 호숫가에는 살얼음이 살짝 얼어 있었다. 청정하다는 말이 딱 맞는 그런 아침이다. 호수 동쪽의 무스타커봉은 하얀 몸통을 드러낸  채 몸매를 자랑하는 강건한 남성처럼 거기에 우뚝 서있었다. 석양 때와는 달리 호숫가에 그림자는 드리워지지 않았다. 손이 몹시 시렵다. 어릴 때 추운 겨울날 시냇가에서 썰매를 탈 때 느꼈던 그런 정도다. 아직 해는 나올 생각도 안 하고 있다. 히말라야로 사진을 찍으러 간 사람들이 이렇게 새벽에 일어나서 일출을 기다린다더니, 지금 내가 그런 상황이다.

여기 저기 유르트 연통에서 하얗고 푸르스름한 연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안주인들이 일어나서 아침식사를 위해 불을 피웠다는 신호다. 여기 남자들은 호숫가에서 물 한통도 길어다주지 않는 무정한 사람들이다. 이르스꿀 남편도 그랬다. 아내가 들통에 물을 길어오는 동안 따뜻한 난롯가에서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여기 주민들은 호수 물을 길어다 식수로도 쓰고, 세수도 하고, 걸레도 빨았다. 호수 주변은 관광객들과 주민들이 버린 쓰레기로 더러워졌지만, 호수 물은 보기에는 아주 맑아 보였다. 여기 유목민 민박촌에는 화장실도 따로 없다. 호수 주변에 있는 바위 뒤나 수풀로 들어가서 볼일을 해결해야 한다. 비가 내리면 그 오물들이 모두 호수로 흘러 들어가 호수가 오염될 것이다. 카라쿨호수에는 주민과 관광객을 위한 공동화장실이 시급한 것 같다. 

어느덧 무스타커봉 정상 부근이 노란색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해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지금 호수를 사이에 두고 호숫가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작은 바위 위에 올라가서 무스타커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다. 현장이나 혜초 스님도 1,300~1,400년 전에 이 바위 위에 올라가서 저 장엄한 설산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어느덧 내가 바라보는 산의 왼쪽 사면부터 노란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샛노란 황금색을 기대했으나, 그냥 희미한 노란색에 그치고 말았다. 해는 왼쪽 공걸봉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햇빛이 점점 강해지고 있어서 해가 떠오르고 있다는 느낌은 받을 수 있었다. 공걸봉과 무스타커봉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기대한 만큼 좋은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기온 때문에 그런 것인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샛노란 황금색으로 서서히 변하는 안나푸르나 같은 새벽 설산을 기대했으나, 이 산은 그런 자태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모습에서 조금 더 나은 그런 정도였다. 

간단하게 빵과 마유주(여기서는 그냥 '차'라라고 했다)로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이르스꿀네 집을 나섰다. 가족들과 기약 없는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장기여행 하면서 늘 겪는 일이다. 바로 옆을 지나는 314번 도로에서 카쉬가르로 가는 차를 잡아야 한다. 정기 교통편이 있는 것이 아니니까, 히치하이킹을 하기로 했다. 중국 복건성에서 온 네 명의 관광객과 함께 차를 기다렸다. 그들은 차를 예약했다고 한다. 그중 한 중년 여인이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한국인들은 영어를 잘 못하는데, 너는 왜 그렇게 유창하냐고 의아해 했다. 젊은 한국인들은 영어를 잘한다고 내가 대꾸했더니, 자기가 서울을 여행할 때 만난 한국인들은 할 결 같이 영어로 소통이 되지 않아서 답답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중국인에 대한 평가를 해달라는 것이다. 한국인과 비교해서. 자기 남편이 물어보라고 했단다. 난감한 질문이다. 이럴 때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나. 중국인은 하도 인구도 많고 민족과 인종도 다양해서 뭐라고 평가하기가 참 어렵다. 인도처럼 극과 극을 달린다. 중국 인구의 5-10% 정도인 1억 정도는 선진국 상류층보다 잘 살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살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특히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시골 사람들과 위구르인등 소수민족의 어려움은 더욱 심하다. 이번 신장지방 여행에서 나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목격했다. 차라리 여기저기 널려있는 초원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목축을 하면서 평화롭게 목가적으로 살아가는 카자흐나 키르기스, 또는 타지크 유목민들이 오히려 도시 빈민들보다 훨씬 더 행복해 보였다. 나는 중국인은 너무 다양해서 뭐라고 판단하기 어렵다고 에둘러 대답했다. 

카라쿨호수에서 카쉬가르로 돌아가는 길
그 여인이 카쉬가르로 가는 밴을 하나 잡아서 운전사와 뭐라고 하더니 100위안만 주면 된다고 한다. 일반 택시로 가려면 500위안은 족히 주어야 하니까 정말 싼 편이다. 차가 조금 더 달리자 아가씨 두 명이 손을 들어 차를 세웠다. 남자였으면 아마도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도 그러니까. 나도 아내와 함께 유럽을 자동차로 세 달 동안 여행하면서 남자들은 태워주지 않았다. 그 생물학적 이유는 행동생물학 교과서에 보면 잘 나와 있다. 우리 인간은 이렇게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전인자가 명령하는 대로 성실하게 복종하면서 생물학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동성보다는 이성에게 더 끌리는 유전인자가 대부분의 포유동물에게는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두 아가씨 중 한 명인 크리스티나 장이 아까 그 중년 여인보다 영어를 더 잘했다. 이번에 중국에 와서 34일 동안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다. 직업이 궁금했다. 영어선생이라고 한다. 어쩐지----. 영어를 제대로 배운 사람들은 세계 어디를 가나 이렇게 발음이 정확하고 알아듣기 쉽다. 그러니까 출신 국가에 따라서 발음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런 사람을 몇 명 만났다. 호주에서 영어 연수를 할 때 만났던 클라스 메이트였던 일본 청년 히로, 올해 포르투갈 포르투 유스호스텔에서 만났던 대만인 셴 할머니, 그리고 오늘 만난 중국인 크리스티나 장. 이들의 공통점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으로서 발음이 정확하고 깨끗한 정통(영국식) 영어를 구사한다는 점이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정말 기분이 좋아져서 콩글리시로 마구 떠들게 된다.

다시 보아도 이 길은 천하절경이다. 이 지구상에 이렇게 이색적이고 멋진 풍경을 자랑하는 길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키르기스의 서쪽 잘랄라바드에서 동쪽 나린으로 넘어가는 산길도 이 경치와 비슷하다. 바로 이 길을 걸어갔던 법현과 현장, 혜초와 마르코 폴로도 나처럼 이렇게 감탄하면서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지금은 여기 저기 공사로 먼지가 날리고 어수선하지만 옛날에는 정말 목가적이고 평화스러운 그런 길이었을 것이다. 이런 길을 걸으면 전혀 피곤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단 먼지를 일으키면서 지나다니는 저 아귀 같은 공사장 트럭들도 없었을 것이고, 이 천변만화의 산들과 협곡, 그리고 이 지역 주민들의 생명줄인 저 강은 오염되지도 않고 맑고 깨끗한 상태로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길을 오가는 목마른 길손들이 강가에서 피곤한 걸음을 멈추고, 저 물을 손으로 떠서 그냥 마셨을 것이다. 그러면서 불경이나 물건을 실고 오는 낙타나 말 등 동물들에게도 저 물을 먹였을 것이다. 이런 상상은 내가 1년에 걸쳐서 통일전망대에서 땅끝마을까지 800킬로를 두 다리로 걸으면서 직접 도보여행을 해 보았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저렇게 아름다운 모습도 이제 앞으로 몇 년이면 못 보게 될 것이다. 중국 정부가 저 협곡 중간에 (정확한 지명은 모르겠다) 수력댐을 건설하려고 지금 거대한 토목공서를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서부터 수십 킬로 상류로는 모두 물에 잠기게 되어 거대한 인공호수가 생길 것이고, 하류로는 수량이 지금보다 훨씬 작아질 것이다. 환경단체들이 아무런 반대도 안하는 걸 보면, 중국이 이런 면에서는 아직은 후진국인가 보다. 앞으로 이 길은 모두 사라지고 란저우 병령사처럼 배를 타고 지나가야 하는 시절이 곧 올 거 같다. 병령사도 란저우에서 그 앞까지 이어지는 실크로드가 있었다. 현장도 그 길로 걸어갔다. 그런데 유가협댐을 지으면서 그 길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정말 멋진 실크로드 노선 하나가 우리 인간의 탐욕 때문에 또 사라지는 것이다. 우리 인간들이 살자고 자연의 생태환경을 바꾸어버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 왜 이리 가슴이 답답한지 모르겠다.

카쉬가르(카스) 국제버스터미널과 붙어 있는 토만강빈관에 숙소를 정하고 샤워부터 했다. 이틀 동안 씻지를 못해서 몸에서 역겨운 냄새가 엄청 난다. 예약해 둔 버스표를 받기 위해 택시를 타고 샤먼빈관에 있는 올드로드투어여행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키르기스스탄 오쉬로 가는 국제버스가 내일(월요일) 출발하지 않고, 모래 출발한다는 것이다. 공휴일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면 일주일 전에 내가 표를 부탁했을 때 그렇게 얘기를 해주었어야지. 그러면 내가 일정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을 텐데. 카스에서 하루를 더 묵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카스가 실크로드의 중심지는 중심지인가보다. 내가 원하지도 안했는데 6일씩이나 묵게 되고. 그리고 주변 도시를 오가면서 세 번이나 오게 되는 걸 보면. 처음에 기차를 타고 우루무치에서 쿠차를 거쳐 올 때 한 번, 타클라마칸사막을 일주하고 돌아올 때 한 번, 이번에 카라코람하이웨이(314번 국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타스쿠얼간과 홍치라포를 다녀와서 한 번. 그러니까 중국 신장지방을 오가든,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오가든, 중앙아시아로 오가든 카스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교통의 요지인 셈이다. 그 역할은 옛날 구법승들이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호텔 방에서 냄새가 안 나서 다행이다. 밀렸던 원고를 정리하면서 푹 쉬었다. 중국에서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9월 3일에 웨이하이에 도착해서 34일 동안 중국 서쪽으로 실크로드를 따라 여행한 것이다. 이제 중앙아시아 키르기스로 넘어간다. (2013년 10월 6일, 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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