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화폐 제도가 부른 파장

[피렌체 삐딱하게 보기] 르네상스까지의 투쟁③ 치옴피의 난

등록 2018.05.14 11:12수정 2018.05.15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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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하게 본다는 것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더 넓고 깊게 보려는 노력이다. 이를 바탕으로, 피렌체의 '익숙하지만 낯선 모습'을 풀어본다. [편집자말]
그들은 책상 앞에 앉아 싼 임금으로 기계를 돌릴 방법만 생각했다. 필요하다면 우리의 밥에 서슴없이 모래를 섞을 사람들이었다. (중략) 영희는 회사 사람들이 노동조합 지부장을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끌어갔다고 말했다. 아주 심한 날은 삼십여 명의 공원들을 무더기로 해고시켰다. (중략) 은강방직 노조는 조용히 침몰해가고 있었다. (조세희 지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성과 힘, 220-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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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카토 누오보 미켈레 디 란도의 동상이 보인다. 평소에는 상인들과 관광객들로 붐비지만, 이 때는 성탄절 아침이라 한산하다. ⓒ 박기철


피렌체에는 예전부터 두 개의 큰 시장이 있었다. 하나는 로마 시대부터 시장으로 이용되었던 메르카토 베키오(Mercato Vecchio, 오래된 시장)인데 현재의 공화국 광장(Piazzi della Republica) 자리이다.

메르카토 베키오가 복잡해지자 메르카토 누오보(Mercato Nuovo, 새로운시장)를 만든다. 메디치 같은 금융업자들이 이곳에 영업용 녹색 테이블을 펼치면서 은행이 시작되었다. 현재는 코를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청동 돼지상이 있어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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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돼지상 수많은 관광객이 코를 만져 색이 변했다. ⓒ 박기철


여기에 깃발을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한 남자의 조각상이 있다. 피렌체의 양모 산업 하층 노동자들이 일으킨 반란을 주도했던 미켈레 디 란도(Michele di Lando)이다. 당시 많은 역사가들은 미켈레를 '맨발의 벌거숭이 폭도'로 비하했다. 하지만 군주론을 쓴 마키아벨리는 다르게 평가했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책 <피렌체사>(Istorie Fiorentine)에 이 반란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면서 미켈레를 단순한 폭도가 아니라 탁월한 민중지도자로 묘사했다. 그 내용을 따라가보자.

13세기 말, 오랜 시간 이어졌던 겔프와 기벨린의 대결에서 겔프가 승리했다. 그리고 겔프의 중심 세력이 된 신흥 상인들이 길드 자치 정부(시뇨리아)를 세우고 피렌체의 권력을 장악했다. 정부의 최고 행정 기구인 8인회와 그 대표 곤팔로니에레는 선출직이었다. 정책을 검토하고 정부를 견제하는 시민위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기까지만 보면 상당히 민주적인 정부로 보인다.
하지만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길드에 가입해야만 했다. 자연히 정부는 길드 회원인 상인들과 부유층의 이익 보호에 집중했다. 길드 가입 자격조차 없었던 뱃사공, 짐꾼 등 하층 노동자의 권익은 우선 순위에서 밀렸다.

상인들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은 화폐제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당시에는 금과 은이 주요한 가치 척도이자 교환 수단이었다. 자연히 화폐도 금과 은으로 만들었는데, 피렌체의 금화는 플로린이었고 은화는 피치올로였다.

플로린은 1252년 처음 만들어졌다. 이때만 해도 1플로린은 1리라(20피치올로)였다. 그런데 피치올로를 모아 1리라가 되어도 1플로린으로 쉽게 바꿀 수 없었다. 플로린과 피치올로는 완전히 분리된 다른 화폐였다. 왜 이렇게 두 개의 화폐제도를 운영했을까?

영국 출신의 작가로 메디치 가문의 경제 구조에 대해 파헤쳤던 팀 팍스(Tim Parks)는 그의 저서 <메디치 머니>에서 그 이유를 '사회 현실이 통합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이를 '화폐적 인종 분리'라고 말한다.


플로린은 부유층의 화폐였고 피치올로는 서민들의 화폐였다. 사치품을 구입하거나 국제 무역에는 플로린이 쓰였고, 빵과 같은 일반 서민 물품 거래에는 피치올로가 쓰였다. 마치 과거 한국이 가난했을 때 부유층들이 달러로 재산을 축적하고 사치품을 사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당시 피렌체는 쓰는 화폐 조차도 신분에 따라 엄격하게 구분되던 사회였다.

노동자들은 피치올로로 임금을 받았다. 그런데 부유한 상인들은 더 많은 이익을 챙기기 위해 정부의 화폐 정책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 피치올로를 만들 때 들어가는 은의 함유량을 점점 줄인 것이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피치올로의 가치는 떨어졌다.

처음에 1플로린은 1리라 였지만 나중에는 7리라(140피치올로)가 되었다. 노동자들은 고용주가 처음 약속했던 것과 똑같은 액수의 피치올로를 받았지만 실제 임금은 계속 줄어들었다. 고용주들은 인건비를 아껴 더 많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부자들은 인건비를 더 줄이기 위해 급여를 돈이 아닌 양모로 주기도 했다. 이렇게 해도 고용주들에게는 아무런 처벌이 없었다. 반면에 노동자들이 작업 중 실수를 하거나 불량품을 내면 채찍을 맞고 족쇄를 차야 했다.

노동자들을 괴롭히는 정책은 이뿐이 아니었다. 국가에 내는 세금이나 여러 중요한 일에는 플로린을 내야 했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은 피치올로를 플로린으로 '환전'해야만 했다. 금융업자들은 노동자들에게 환전 수수료를 받아 챙겼다. 당시 피렌체는 열악한 노동조건 뿐 아니라 경제 구조 자체가 노동자들을 쥐어짜는 구조였다.

이런 착취 구조의 가장 하층 계급 중에는 양모를 씻거나 염색하는 노동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나막신을 신고 다녔기에 치옴피(Ciompi, 나막신)라고 불렸다. 이들이 하는 일은 모직물 제조 공정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지만 처우는 가장 열악했다. 정부는 치옴피들의 길드(조합) 결성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그래서 고용주들이 마음대로 해고해도 하소연할 길이 없었다.

아무리 일해도 참혹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노동자들이 처우개선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에 고용주들은 법을 핑계로 대며 할 얘기가 있으면 정부에 가서 하라고 했다. 하지만 길드를 만들 수 없는 치옴피들은 정부에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정부도 치옴피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일부 양심적인 성직자들이 이런 부자들의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피치올로가 아니라 플로린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말라가고 있었다.

1378년 5월 치옴피들이 산타 크로체 광장과 치옴피 광장으로 모여 들었다. 당시 산타 크로체 지구는 도심 외곽의 거주지역으로 하층 노동자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노동자들은 고통스러운 삶을 바꾸기 위해 목소리를 모으기 시작했다. 사실상 첫 대규모 파업이었다. 이때 지도자로 앞장 선 사람이 미켈레 디 란도였다. 그의 지도하에 각성한 노동자들은 빠르게 조직화했다. 치옴피의 난(Il Tumulto dei Ciompi)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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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 크로체 성당과 그 일대 성당 왼쪽으로 치옴피를 비롯한 하층 노동자들의 거주 지역이 넓게 자리 잡고 있었다. ⓒ 박기철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였다. 치옴피는 자신들에게도 길드 결성권을 달라고 외쳤다. 하지만 정부와 고용주들은 그들의 요구를 묵살했다. 분노한 시위대들은 부자들의 집을 약탈하고 불질렀다. 급기야 7월에는 정부 청사까지 무력으로 장악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 정부를 선포 하기에 이른다.

혁명 정부는 노동자들의 부채를 없애고 부유층에게만 유리했던 조세 정책도 바꾼다. 미켈레는 혁명 정부의 수반으로 균형감각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노동자들이 부자들에게 개인적으로 복수하려 하자 이를 설득하여 그만두게 했다. 그러면서도 부자들의 과거 행위를 처벌할 수 있는 공식적인 절차를 마련했다. 이렇게 혁명정부는 서민 중심의 개혁 정책을 펼쳤지만 여러 가지 한계도 보여 주었다.

우선 확장성을 가지지 못했다. 혁명 정부는 양모 노동자인 치옴피가 주축이었는데 다른 업종 노동자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그리고 혁명 정부 내부에서도 급진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대립했다. 미켈레가 중재하려고 했으나 결국 서로 간의 유혈 충돌까지 발생한다. 이런 치옴피들의 폭력성을 목격한 일반 시민들도 이들에게 선뜻 동조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이런 상황에서 고용주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피렌체의 주력 산업인 모직업이 타격을 받으면 국가 경제가 무너질 거라며 일반 시민들의 불안감을 자극했다. 여기에 치옴피들이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한 하층민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고용주들은 재빠르게 다른 지역에서 노동자들을 데려와 빈 자리를 메꾸었다. 치옴피들이 없어도 모직업과 경제가 굴러가자 혁명정부는 당황한다. 여기에 고용주들은 혁명 정부 인사들을 회유하고 이간질했다. 미켈레가 흔들리지 말라고 설득했지만 노동자들의 동요는 점점 커져갔다. 많은 치옴피들이 외국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길까 겁을 먹고 이탈해 버린다.

마지막으로 고용주들이 고용한 용병(혹은 폭력배)들이 몰려왔다. 분열이 시작된 혁명정부에게 이들을 막을 힘은 없었다. 결국 용병들의 무력 앞에 혁명 정부는 6주 만에 끝나고 만다. 다시 정권을 잡은 부자들은 반란 주동자 160여명을 사형에 처한다. 반면에 혁명 정부의 수반이자 반란의 중심이었던 미켈레에게는 추방령이 내려진다. 미켈레를 처형할 경우 분노한 노동자들이 다시 들고 일어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치옴피의 난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인간의 기본 권리에 대한 생각을 확장시켜 르네상스 태동에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기득권이 만든 법과 제도는 노동자들의 요구에 무관심했다. 참다 못한노동자들이 들고 일어나면 경제가 어려워진다는 얘기를 퍼뜨린다. 그리고 노동자들을 회유와 협박으로 이간질한다. 마지막에는 용역을 불러 노동자들을 에워싼다. 예나 지금이나 참 낯설지가 않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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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레 디 란도(Michele di Lando) 이탈리아 조각가 안토니오 보르토네의 작품(1895년) ⓒ 박기철


#피렌체 #치옴피의 난 #미켈레 디 란도 #멘르카토 누오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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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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