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없이 산 1년, 이렇게 먹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시골에서 살기로 했다⑤] 시골에서 했던 다양한 생계노동

등록 2018.06.05 07:31수정 2018.07.0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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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당연히 도시에서 살 거라 생각하던 시골소년이 서울의 삶을 두고 다시 시골로 갔습니다. 소유의 땅도 집도 없고 가족이나 친척도 없는 강원도 홍천에서 짝꿍과 함께 자연농과 시골살이를 배우고 있습니다. 현실과 부딪치고 방황하는 젊은 부부의 작고 솔직한 시골 사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말]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가장 큰 고민은 역시 먹고 사는 문제다. 세상에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몇이나 되랴. 서울에 살 때도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매달 어김없이 나오는 월급이 있으니 적어도 굶을 걱정은 없었다.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장 고민하는 것도 당장 월급이 없어진다는 것일 거다. 익숙한 서울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일자리를 시골에서 구할 수 있을까 불안할 수밖에 없다. 나도 그랬다. 그나마 짝꿍이 프리랜서 디자이너라, 시골에서도 온라인으로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우리는 처음 이주를 고민할 때부터 시골에서 직장생활을 할 마음이 별로 없었다. 그보다는 임금노동 시간을 줄여 다른 시간에 농사도 짓고 하고 싶은 일도 하는 삶을 꿈꾸었다. 당시엔 책을 읽기도 전이었지만, 시오미 나오키의 <반농반X의 삶>에 나오는 아이디어에 공감해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다.

'반농반X'란 조그만 농사를 지어 먹을거리를 최대한 자급하고 자신의 재능을 살린 일을 부업처럼 하면서 그걸로 현금소득을 얻는 방식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먹을거리를 상당부분 자급할 수 있어야 하고, 주 40시간 이상 긴 시간을 노동해야 하는 직장이 아닌 다른 일거리도 있어야 한다.

그럼 우리의 현실은 어땠을까? 돌아보니 그동안 이것저것 해본 게 꽤 된다. 처음 했던 것은 도시소비자에게 매주 보내는 채소꾸러미에 들어가는 진달래, 쑥, 아카시아(아까시나무)꽃 등을 따서 파는 일이었다. 근데 다 떠나서 일단 돈이 너무 안 됐다. 애초부터 돈보다는 일손을 돕는다는 느낌으로 했음에도 도저히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진달래와 쑥을 따는 데 걸린 시간과 그걸 따서 갖다 드리고 받은 돈을 계산해보니 시급이 3천 원도 안됐던 거다. 직접 맡아서 해보니 매주 꽤 오랜 시간을 들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에 비해 받는 돈은 생계에 보탬이 될 수준이 못 되니 월세라도 내려면 다른 일을 하는 게 맞았다.

게다가 우리는 차도, 저장고도 없어서 곳곳으로 따러 다니고 옮기고 보관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래도 남들은 일부러 꽃구경도 가는 마당에 꽃향기 맡으며 일한다는 건 꽤 즐거웠다. 그 덕에 진달래 화전도 한번 부쳐 먹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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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화전 작년에 진달래 따서 팔면서 조금 남겨서 부쳐먹은 화전 ⓒ 이파람


야생풀들을 식재료로 따서 파는 것은 관두었지만, 같은 시기에 시작한 꾸러미 택배 작업 돕는 일은 1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계속하고 있다. 그 일도 처음엔 돈과 상관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일손이 부족한데 느긋하게 와서 점심 한 끼 같이 먹고 택배 싸는 일만 조금 도와줄 수 없겠느냐고 말씀하셨다.

아르바이트는 아니지만 서울에서 택배로 받아먹던 꾸러미 채소도 가져가라셨다. 돕는 의미로 했지만 그렇다고 계산을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언니네텃밭에서 소비자들에게 보내는 친환경 먹을거리를 내 돈 주고 사려면 꽤 비싸다. 특히 달걀이나 두부, 우리가 키우지 않는 채소와 맛있는 완성품 반찬들을 얻을 수 있다는 건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우리가 서울에서 받아먹던 꾸러미 일주일 치 소비자가격을 고려해보면, 들이는 시간에 비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일주일에 하루 점심 얻어먹고 언니들과 수다 떨며 연고 없는 동네에서 이웃들과 친분까지 쌓는 걸 생각하면 완전 남는 장사다.

그랬는데 이젠 일당까지 챙겨주신다. 꾸준히 와서 일을 하는데 무급노동을 시켜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회의에서 많이 나왔단다. 이러니 손이 느려 큰 보탬도 안 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오히려 죄송해지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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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러미 택배 싸는 일 언니네텃밭에서 꾸러미 택배 싸는 일을 돕고 있다. ⓒ 김진회


그다음으로 했던 일은 품팔이였다. 품앗이는 많이 들어봤어도 품팔이는 생소했는데 시골에 오니 비교적 흔한 일자리 가운데 하나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나 시켜주는 건 아니다. 농장주 입장에서도 하루 치 일당이 아깝지 않은 베테랑들을 써야 손해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품팔이 자주 다니는 할머니들께서 일하시는 걸 보면 손이 안 보일 지경이다. 그걸 보고 있으면 아무리 20대 남성이라곤 해도 내가 과연 어디 가서 품팔이를 하고 돈을 받아도 되는 걸까 싶어진다. 체격이 더 건장했거나 체력이라도 더 키우면 일당을 더 받는 힘쓰는 일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나는 이도 저도 아니다.

그래도 한번은 어떻게 기회가 생겨 한살림생협에 유기농 농산물을 판매하는 농부님 하우스에서 품팔이를 하게 됐다. 짝꿍과 친구들과 함께였다. 원래는 배추를 수확하는 일을 하기로 했는데, 무더운 날씨에 배춧속이 상해버렸다. 그래서 하우스 안에 가득한 다 큰 배추들을 트랙터로 갈아엎기 위해 그냥 마구 뽑아버리는 일로 바뀌었다.

그 많은 배추를 그냥 버릴 수밖에 없다니 너무 안타까웠다. 사실 상한 부분은 얼마 되지 않아서 그 부분만 도려내면 먹을 수 있는데, 판매용으로 키운 것이고 한 가족이 먹을 수 있는 양도 아니라서 팔 수 없는 건 바로 폐기되는 것이다. 그 일을 다 하고 나서는 다른 하우스에서 양파를 뽑아냈다. 양파도 다 자라서 수확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거길 갈아엎고 그 자리에 다른 걸 심는 것이 더 이득이라는 판단으로 그나마 좀 큰 것은 모으고 자잘한 건 버리는 일이었다.

확실히 전업농 규모의 농사는 우리가 하는 농사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농부님들이 우리 밭을 보고 소꿉장난이라 느끼시는 것도 이해가 됐다. 그날 일당은 일하기 전에 약속했던 대로 각자 5만 원씩 받았다. 다들 워낙 초짜라서 시세에 비해 많은 금액을 받을 순 없었다. 하지만 맛난 밥과 참도 주시고 끝나고서도 집에 가져가 먹으라며 각종 채소를 잔뜩 챙겨주셔서 감사했다.

그날 일은 몸이 고되기도 했지만, 하필 다 자랐거나 한창 자라고 있는 작물들을 버리는 일만 종일해서 그런지 뿌듯함보다 찜찜함이랄까 아쉬움이랄까 하는 느낌이 남았다. 그 뒤로 아직까지는 농사일 품팔이를 해볼 기회도 없었고, 우리도 적극적으로 찾지는 않았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도 했다. 둘 다 서울서도 해보지 않은 걸 한 시간에 버스 두 대 다니는 이 동네에서 해보게 됐다는 게 재밌다. 가까운 곳에 큰 군부대가 있기에 먹고 사는 편의점이다. 실제로 손님 대부분이 근처 부대에서 일하는 군인들이었다. 편의점을 맡아 운영하시던 분이 임신을 하셔서 급하게 아르바이트를 구한 것이었는데, 장사도 잘 안 되고 하여 우여곡절 끝에 한 달 만에 잘렸다.

갑자기 잘려서 당황스러웠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잘된 것 같다. 오후부터 자정까지 주 5일 일했는데 물류 차가 늦으면 새벽 1시가 다 되어 끝날 때도 많았다. 여름이라 더워지기 전 새벽에 농사일을 해야 하는 시기라 같이 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 뒤 몇 달 동안은 짝꿍의 아르바이트가 우리 부부의 가장 큰 수입원이었다. 동네 초등학교 셔틀버스 동승보호자 일이었다. 아침에 등교할 때 한 시간, 오후에 하교할 때 한 시간씩 하루에 두 시간 일하는데 출퇴근을 두 번씩 해야 했다.

시급도 1만 원으로 꽤 높았고 육체적으로 고된 일도 아니라는 점이 좋았다. 그러나 아침에 갔다가 다시 왔다가 뭔가를 하다가 다시 또 가야한다는 게 꽤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올해 2월 말에 학교와의 계약이 종료되기도 했고 짝꿍이 열매하나 출판사와 함께 그림과 글이 들어가는 책을 쓰기로 해서 그 작업과 올해 농사에 집중하기 위해 그만두었다.

그 사이에 나는 한살림생협에 들어가는 절임배추 만드는 일도 했다. 수확해온 배추를 다듬고 소금물에 하루를 절인 뒤 깨끗하게 씻고 손질해서 포장하는 일이었다. 2주간 하려고 했는데 몸 관리를 잘못하여 앓아눕는 바람에 이틀밖에 못 했다. 납품기일을 맞추려다 보니 밤늦게까지 작업하는 일이 잦았다.

처음 일하러 갔던 날은 날짜가 바뀌고서야 집에 들어왔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너무 늦게 끝나서 깜짝 놀랐다. 그러고 다음 날 아침 8시에 다시 일하러 갔다. 다행히 다음날은 6시에 끝났다. 그렇다고 전체 작업이 그때 끝난 것은 아니다. 내가 맡은 부분에 더 이상 할 일이 없었던 것뿐이고 박스에 포장하는 분들은 그날도 밤늦게까지 일하셨단다. 시급은 야근한 시간까지 꼼꼼히 체크하고 시간당 만 원씩 주셔서 이틀밖에 일 안 했는데도 겨울철 난방비에 큰 보탬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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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의 어린이날 풍경 일하고 있는 학원에서 어린이날이라고 선물을 준비하셨다. ⓒ 김진회


쓰고 보니 그동안 먹고 살려고 이것저것 해봤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난다. 지금은 읍내에 있는 학원에서 일주일에 두 번 중학생들에게 과학을 가르치고 있다. 거기에 더해 지난주엔 동네 이웃분이 고등학교 1학년 아들의 과외를 부탁하셨다. 처음엔 주말에 수학, 영어 두 과목을 과외해달라고 하셔서 고민 끝에 거절을 했다.

그랬는데 다시 연락이 와서는 평일에 수학 한 과목만 해달라며, 동네에 과외를 해줄 만한 사람이 없다고 간곡히 부탁하셔서 결국 해보기로 했다. 덕분에 졸업 후 십 년 만에 처음으로 고등학교 수학문제를 들여다보고 있다.

사실 학원 강의나 과외는 시골에서 살아보자는 고민을 할 때 기대했던 것과는 거리가 먼 일거리다. 그렇지만 별 기술도 없는 내가 나름 농사도 지으면서 적은 시간을 투자해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고맙다. 또 다른 일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일에서도 보람과 재미를 찾고 싶다.

무엇보다 이 일로 매주 나와 만나고 있는 나보다 조금 더 어린 사람들에게 즐거움이나 도움을 주진 못 할망정 폐는 끼치지 않고 싶다.
#귀촌 #시골아르바이트 #시골일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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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서울에서 이런저런 활동을 하다, 지금은 홍천에서 자연농을 배우고 있는 한량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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