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평가 애매해진 이유, 전두환 때문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죄악'과 '공로' 사이, 김종필을 말하다

등록 2018.06.24 12:21수정 2018.06.24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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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빈소를 찾은 조문객들이 조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23일 오전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세. 서울아산병원 빈소를 찾은 이낙연 국무총리는 김 전 총리에 대한 정부의 훈장 추서 방침을 전달했다. 

한 인간을 평가할 때는, 그의 처음뿐 아니라 마지막도 고려해야 한다. 김종필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제3공화국 및 제4공화국(유신공화국)을 이끌며 무고한 국민들을 탄압하고, 재벌 우대 정책으로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대북 적대적 태도로 한반도 냉전을 심화시켰으며, 민족의 뜻에 반하는 한일협정 체결로 식민지 청산을 방해했다.

3공·4공의 죄악을 오로지 박정희한테만 돌릴 수는 없다. 핵심 가담자인 김종필 같은 사람한테도 공동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김종필은 한국 현대사에 큰 죄악을 저지른 사람이다.

그런데 그는 71세 때 뜻밖의 행적을 남겼다.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 시절이던 1997년 10월 27일,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와 후보 단일화(DJP 연대)를 이뤘다. 이를 발판으로 김대중은 그해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선거에 승리해 한국 현대사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민정계(전두환 추종세력)가 중심이 된 한나라당은 '대쪽 판사' 이회창을 내세웠지만, 1980년부터 이어지던 신군부 출신 정권의 장기집권을 연장하는 데는 실패했다.

지금의 한국 민주화는 1997년 정권 교체에 힘입은 바 크다. 그래서 DJP 연대를 이룬 김종필의 공로를 간과할 수는 없다. 인생 전반부뿐 아니라 이렇게 후반부까지 고려하면, 김종필은 민주화와 현대사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후반부의 공로만으로 평가를 끝내기에는 전반부의 죄악이 너무나 크다. 김대중 정부를 출범시킴으로써 민주화에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박정희 정권 하에서 민주화를 탄압한 죄악이 다 씻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므로 김종필을 평가할 때는, 박정희 정권 시절과 김대중 정권 시절에 했던 일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필과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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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필 증언록>의 한 장면. 1962년 1월 1일 신년하례식 때 박정희와 악수하는 모습. ⓒ 김종성


그런데 김종필에 대한 평가를 그처럼 애매하게 만든 결정적 인물이 있다. 김종필 인생에서 최대 장애물이 된 '문제의 인물'이다. 박정희도 김대중도 아니다. 바로 전두환이다.

1961년 5·16 쿠데타의 핵심 참모였던 데다가 쿠데타 직후에 초대 중앙정보부장이 됐기 때문에, 박정희 정권 초기부터 김종필은 2인자 혹은 후계자로 거론됐다. 하지만, 정작 김종필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박정희가 자기한테 권력을 넘길 마음이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김종필 증언록 제1권>에서 박정희 후계 문제를 거론하면서, 김종필은 "권력은 부자간에도 나눌 수 없는 성질이 있다"고 말했다. 아들한테도 주기 싫어하는 권력을 조카사위인 자기에게 넘길 생각이 있었겠느냐는 뉘앙스를 풍기는 대목이다. 김종필은 이렇게 회고했다.

"내가 아는 한, 박 대통령은 돌아가실 때까지 누구에게든 권력을 넘겨줄 분이 아니었다."
"말년의 박 대통령은 권력의 정상에서 끊임없이 나를 주시했다. 나는 견제와 감시가 견딜 수 없어 그 울타리에서 도망쳐 보려고도 했다."

그런데 1969년부터 1978년까지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낸 김정렴은 1997년 발간한 <아, 박정희>에서 죽기 1년 전의 박정희가 자기한테 "내가 임기 1년 전에 물러나면 총리가 대통령권한대행을 맡게 된다. 그가 자연스럽게 공화당 후보가 돼 차기 대선에 출마하면 될 것"이라며 "아무래도 김종필을 다시 총리를 시켜야겠어"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말년의 박정희가 김종필을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종필은 그런 말을 한 박정희의 의도가 따로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 박정희가 자신의 권력욕을 감추고자 일부러 그런 말을 흘렸을 거라는 추측이다.

<김종필 증언록 제1권>에서 김종필은 "'내(박정희 지칭)가 권력의 노예가 아니다'라는 점을 주변에 알리고 싶었을지 모른다"며 "아니면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자신의 유고 상황을 가상해 비서실장에게만은 당신의 의중을 알려둘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지 모른다"고 분석했다. 박정희가 자기 죽은 뒤에는 몰라도 살아 있는 동안은 절대로 남한테 넘길 마음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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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장 시절. 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의 박정희대통령기념도서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박정희가 김종필에게 넘길 마음이 없었다는 점은, 앞서 '문제의 인물'로 언급한 육사 11기 전두환을 중용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김종필·김형욱·강창성·윤필용 등이 포함된 육사 8기는 1948년 12월부터 1949년 3월 사이에 입학해 최단 24일에서 최장 5개월간 학업을 이수했다. 졸업한 날짜도 제각각이다. 육사 10기까지는 이랬다. 반면에, 전두환·노태우·정호용·김복동 등으로 대표되는 육사 11기 는 1951년 입학해 4년제 과정을 이수했다. 그래서 육사 11기부터는 정규 육사로 불린다.

김종필 말대로 박정희는 권력욕이 특별히 강했다. 그는 쿠데타를 함께한 육사 5기 및 8기에 대해서도 편안한 눈길을 보내지 못했다. 그래서 후배인 8기를 이용해 선배인 5기를 약화시킨 데 이어, 그 다음에는 8기를 약화시킬 또 다른 후배 장교들을 찾았다. 그들이 바로 육사 11기다. 김충식 전 동아일보 기자의 <KCIA 남산의 부장들>에 따르면, 실명 공개를 거부한 쿠데타 주역 K씨가 이런 말을 했다.

"박 의장은 8기 세력이 커지자, 그들보다 더 어려 믿을 만하고 4년제 육사를 마친 영남 출신의 11기 몇 명을 충복처럼 귀여워하게 된 것이다."

박정희는 육사 11기 이하를 뽑아 하나회라는 사조직을 만들었다. 김종필을 비롯한 8기를 견제하고자 육사 11기 이하를 하나회로 묶은 것이다. 이 덕분에 출세가도를 달린 인물이 육사 11기 대표주자인 전두환이다.

그런데 박정희가 하나회를 만든 시점은 쿠데타 2년 뒤인 1963년이다. 이는 쿠데타 얼마 뒤부터 박정희가 김종필에 대한 견제에 착수했음을 의미한다. 김종필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했기에, 박정희가 자기를 후계자로 생각했을 리 없다는 단호한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김종필과 전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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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월 16일 전두환 대통령이 서울 신라호텔 다이나스티홀에서 열린 대한상의 주최 신년인사회에 참석, 김종필 공화당 총재(왼쪽)와 환담하고 있다 ⓒ 연합뉴스


박정희가 김종필을 견제할 목적으로 육성한 전두환은, 박정희가 죽은 뒤에도 자기 임무에 충실했다. 1979년 박정희 암살 뒤에, 김종필이 공화당 총재가 되면서 유력 대권주자로 급부상했다. 이때 그의 발목을 잡은 이가 바로 전두환이다. 12·12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전두환이 김종필을 부정축재자로 지목해 재산을 환수하고 정치활동도 금지시켰던 것이다.

1987년 6월항쟁 뒤의 제13대 대선에서 김종필이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나서 8.1%의 득표율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김종필 인생에서 대통령이 될 유력한 기회는 박정희 암살 이듬해인 1980년이었다. 박정희만 죽었지 그 조직까지 죽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막강한 박정희 조직을 활용할 수 있었던 1980년이 김종필한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 기회를 전두환이 가로챈 것이다.

전두환이 물러난 뒤인 1990년에 김종필이 김영삼과 함께 전두환 추종세력인 민정당과 합당해 민주자유당(민자당)을 만들기는 했지만, 김종필과 전두환은 서로 화합할 수 없는 관계였다. 악연도 보통 악연이 아닌 관계였다.

그런 관계였기 때문에 5년 만인 1995년, 김종필이 민자당을 탈당해 자민련을 창당한 것이다. 또 전두환을 결코 용서할 수 없었기에, 민자당 후신인 한나라당의 반대편에 서서 DJP 연합을 이뤘던 것이다.

김종필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애매해진 것은 그가 1997년 여야 정권교체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DJP 연합에 가담한 데는 전두환과의 악연이 적지 않게 작용했다. 김종필에 대한 평가가 애매해진 것은 바로 이 전두환 때문이었던 것이다.

전두환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김종필의 관점에서, DJP 연합은 적의 적과 손을 잡는 일이었다. 세상이 볼 때는 뜻밖의 행동이지만, 그 본인에게는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쪽에 있던 사람이 전두환에 대한 불편한 마음이 중요한 동기 중 하나가 되어 박정희와 너무도 상반된 김대중 쪽으로 가는 바람에 김종필에 대한 평가가 애매해지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전두환 때문에 여야 정권교체에 기여하는 업적을 남기기는 했지만, 그 '4년제 후배' 때문에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정치인생에서 이런 굴곡이 생기고 말았다.
#김종필 #전두환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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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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