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조원짜리 지하철역... 와 이건 진짜다

[ 타박타박 아홉걸음 세계일주 44 ] 식비를 줄이면 브로드웨이가 열린다

등록 2018.07.12 20:12수정 2018.07.1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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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으니까 그냥 하고 싶은대로 하자
어차피 완벽히는 할 수 없으니 요만큼만
뻥튀기는 하지말자 그냥 나의 몸집대로
아는 만큼만 말하고 모르는 건 배우면 되지
최선을 하다하면은 화창한 아침
도망만 다니면다면 어두운 아침
응원가는 싫지만 응원은 해주길 바래
- 오지은, '인생론' 노랫말 중에서

뭘 하지? 어딜 가지? 그런 질문을 아무리 해봐야 대답할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응원할 사람도 나 밖에 없다. 오늘도 최선을 다해서 화창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아침부터 오지은의 목소리 덕분에 힘이 조금 생겼다.

뉴욕에 도착한 지 사흘, 약 48시간 만에야 내 몸이 새로운 시간에 제대로 맞춰가고 있는 것 같다. 어제는 2만5000걸음을 걸었다. 저기까지만, 조금만 더 하던 걸음이 하루 종일 쌓이니 꽤 많아졌다. 덕분에 몸이 엉망으로 피곤해져서 일찍 잠들었고, 늦게 떨어진 해는 쉬지도 않는지 새벽 5시가 채 되기도 전에 다시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오늘부터는 발길 닿는 대로 걷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알찬 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이란, 어제는 미드타운을 걸었으니 오늘은 로어타운을 걷는 것이다. 이 정도만 해도 도보 여행자에겐 충분한 계획이다.

오늘은 더 많이 걸을 테니 아침을 든든하게 챙겨먹고 점심 도시락도 미리 준비했다. 간식은 오레오 쿠키, 물은 물병에 절반만 채운 다음 옆으로 눕혀서 얼려 놓았다. 아침에 나가면서 나머지 절반에 물을 채우면 종일 시원한 물을 마실 수 있다. 물가가 비싼 지역을 여행할 때 생긴 좋은 습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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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마다 도시락을 챙기는 것이 배낭여행의 기본이다. ⓒ 한성은



배낭여행을 장기간 다니다 보면 다들 나름의 규칙이 있을 텐데 나에게 있어 중요한 규칙은 식도락은 욕심 내지 않는 것이다. 혼자 쫄래쫄래 다니니까 좋은 식당에 들어갈 일이 거의 없기도 하지만, 여행 경비 중에서 큰 폭으로 조정이 가능한 것이 식비다.

수퍼마켓을 이용하면 저렴하게 식사를 해결할 수도 있고 저녁마다 수퍼마켓에 들러 장을 보고 아침마다 도시락을 싸는 것이 나에겐 여행이 쏠쏠한 재미처럼 되었다. 뉴욕에서 일주일 정도 지낸 현재까지 매일 세 끼를 든든하게 먹으면서 하루 7~8달러(한화로 약 8000원~9000원) 정도의 식비를 쓰고 있다. 그 정도면 맥주도 마시고, 커피도 마시고, 주스도 마실 수 있다.

도시락을 싸면서 여행배낭에 넣지 않은 중요한 물건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밀폐용기! 1년 넘게 배낭여행을 하면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사용했던 물건인데 이번 여행에 깜빡하고 챙겨오지 않았다는 걸 식빵에 포도잼을 바르면서 생각났다.

지퍼팩은 넉넉히 챙겨왔는데 지퍼팩에 샌드위치를 넣으면 점심 때 어떤 모양이 되어 있는지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다. 배낭여행을 준비하는 모든 분들에게 강력히 추천하는 아이템은 한국 밀폐용기다. 봉지라면을 전자레인지로 끓일 수도 있고, 시리얼을 말아먹고, 점심 도시락도 준비할 수 있으니 꼭 챙기시길 바란다. 밀폐용기는 한국제품이 정말 좋다. 유럽이나 미국은 비싸고 성능도 만족스럽지 않다.

묵직한 가방을 둘러메니 마음이 든든하다. NYC 페리를 타고 어제보다 한 정거장 더 내려가서 월 스트리트 선착장에 내렸다. 수잔이 요즘은 한여름이라 너무너무 더울 거라고 했는데 날이 계속 흐린 데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시원한 정도를 넘어 추웠다.

며칠 더 지내면서 깨달은 건 뉴욕 날씨가 정말 변덕이 심했다. 흐린 하늘에서 갑자기 비라도 쏟아지면 턱이 떨릴 지경이었고, 해가 쨍하고 뜨는 날에는 정수리가 아플 만큼 뜨거웠다. 그런 날씨가 하루씩 번갈아가며 왔다갔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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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토리아 선착장에서 NYC 페리를 타고 월 스트리트 선착장까지 가는 동안 보이는 풍경 ⓒ 한성은


페리에서 내려 첫 번째로 향한 곳은 TKTS다. 그냥 Tikets를 줄여서 저렇게 브랜드처럼 사용하는 것 같았다. 맨해튼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을 저렴하게 보는 방법이 몇 가지 있는데 간단하게 정리하면 TKTS 티켓, 로터리 티켓, 러쉬 티켓이 있다. 뉴욕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 나처럼 무작정 오는 사람도 있을 테니 각각을 간략하게 설명해야겠다.

먼저 여행 경비가 넉넉하고 일정이 빠듯하다면 위의 방법들 말고 브로드웨이 극장별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원하는 날짜와 원하는 좌석을 예약하면 된다. 물론 나는 접속조차 해보지 않았다.

가장 저렴하게 보는 방법은 러쉬 티켓이다. 말 그대로 아침 일찍 극장으로 달려가서 사는 티켓이다. 극장측에서 공연 당일 아침마다 일정 좌석을 판매하는데 20~40달러 정도로 매우 저렴하지만 당연히 좋은 좌석은 아니다.

로터리 티켓 역시 이름 그대로다. 복권처럼 추첨을 해서 티켓을 판매하는데 극장마다 오후 일정 시간에 추첨을 하기도 하고 요즘은 온라인을 통해서 즉석에서 당첨 여부를 확인하는 극장도 있다. 나는 온라인 로터리 티켓을 매일 도전하고 있지만 오늘까지 한 번도 당첨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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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 할인 티켓을 살 수 있는 TKTS 부스 ⓒ 한성은


TKTS는 공연 당일까지 판매되지 않은 티켓을 50%정도 할인해서 판매하는 전용 부스의 이름이다. 일부 공연은 익일 티켓도 살 수 있었다. 티켓을 사는 방법은 그냥 TKTS 부스에 가서 줄을 서면 된다.

TKTS 중 가장 유명한 곳은 타임 스퀘어에 있는 부스다. 가장 유명하다는 말은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말이기도 하다. 맨해튼을 오가며 타임 스퀘어를 지나갈 일이 많았는데 언제나 항상 북적거렸다.

또 가장 유명하다는 말은 유명하지 않은 다른 곳도 있다는 말이다. TKTS 부스는 총 세 개로 타임 스퀘어와 월 스트리트 그리고 브룩클린에도 있다. 티켓을 살 때 좌석을 선택할 수는 없고 공연 이름을 이야기하면 알아서 좌석이 지정된 티켓을 준다.

TKTS South Street Seaport(월 스트리트 부스의 정식명칭)에서 오픈을 기다리며 내가 급할 때만 찾는 신들의 도움을 구했다. '오페라의 유령' 티켓을 살 수 있게 해주세요. 역시 신들은 무신론자에게도 자비와 축복과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오페라의 유령은 익일 티켓 구매도 가능했고 나는 일주일 식비보다 비싼 티켓을 받아 들고 날듯이 행복해졌다. 오페라의 유령은 나에게 추억이 가득 담긴 공연이다. 이번에는 신들에게 AS까지 부탁했다. '좋은 자리 주신 거 맞죠?' 어쨌든 브로드웨이 공연 티켓이 고이 접어 나빌레라. 아차, 나비처럼 날아가면 낭패다.

추위를 날리려고 오레오 쿠키를 오물거리며 9.11 메모리얼로 걸음을 옮겼다. 월 스트리트라는 곳이 엄청 크고 거대한 무엇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크고 거대한 그 무엇들은 다들 빌딩 속에 있어서 길이 매우 좁았다.

슬라보예 지젝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월가를 점령하라'고 외치는 그 장면을 인터넷으로 보며 거대한 인파가 광화문 광장만큼 커다란 월 스트리트라는 곳을 점령하여 금융 자본의 폐단을 고발하며 정의를 외치는구나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냥 미국은 또 뉴욕은 뭐든 다 엄청 크고 웅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도로나 인도는 참 좁았다. 그 장소가 갖는 기능과 상징이 중요하지 크기가 뭐가 중요하겠냐만은 세계의 중심이라는 곳이니까 어떤 위엄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애초에 미국 문화와 위엄이란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을까? 월 스트리트의 상징인 '돌진하는 황소'가 처한 상황을 보고 나니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실제로는 월 스트리트와 뉴욕 증권거래소가 세상을 쥐락펴락 하고 있겠지만, 그들을 상징하는 황소는 관광객들이 쥐락펴락 하고 있었다.

황소가 청동이었기 망정이지 진짜 살아있는 황소라면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관광객들이 황소를 좀 괴롭힌다고 월가의 높은 분들이 책상 위에 있는 빨간 단추를 눌러 우리들 나라를 괴롭히지는 않겠지? 그나저나 황소의 고환은 대체 왜? 근엄하게 타박타박 걷는 여행자였는데, 돌진하는 황소 앞에서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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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스트리트를 상징하는 돌진하는 황소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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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스트리트는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관광객은 황소를 쥐락펴락했다. ⓒ 한성은


그런데... '돌진하고 싶지만 사람이 너무 많아 곤란한 황소'를 바라보며 실컷 월가를 비웃던 내 앞에 그런 나를 가소롭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는 새 한 마리를 만났다. 월드트레이드센터 환승역에서 날갯짓을 하고 있는 무려 5조원 짜리 지하철역 '오큘러스'가 바로 그것이었다.

9.11 그라운드 제로를 향해 타박타박 걷고 있었는데 기이하게 생긴 건물이 앞을 떡하니 가로 막아섰다. 한눈에 규모가 가늠이 안 될 정도로 큰 규모였고, 카메라로 담는 것조차 어려웠다. 지하철역이 이럴 수도 있는 건가?

9.11 테러 이후 뉴욕은 맨해튼 남부를 살리기 위해 여러가지 프로젝트를 시도했고 무려 7개의 지하철이 교차하는 World Trade Center Station을 12년간 40억달러를 들여서 완공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지하철역인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가장 아름다운 지하철역이기도 할 것 같다.

오큘러스는 매년 9월 11일에 천장이 열리면서 별명처럼 그 눈을 뜬다고 한다. 마치 "이게 뉴욕의 클라스야!" 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자존심이나 사대주의를 떠나 그저 "네, 형님이 짱이세요!"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5조원짜리 지하철역 바로 뒤에는 9.11 그라운드 제로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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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기간 12년, 건축 비용 40억 달러의 지하철 역 '오큘러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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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큘러스 내부는 다른 세상으로 가는 통로 같았다. ⓒ 한성은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기자의 블로그 '타박타박 아홉걸음(http://ninesteps.tistory.com)'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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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저에게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줍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성실한 여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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