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학살 희생자... 역경 이겨낸 '소씨 삼형제'

[박만순의 기억전쟁 ③] '왕촌 살구쟁이 학살' 희생자 가족 소재성·소재륜의 증언

등록 2018.10.27 11:55수정 2018.10.27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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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49년, 충남 공주에 살던 소재륜(당시 17살)의 지게에는 낫과 톱, 그리고 변또(도시락)가 실려 있었다. '나무하러' 가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그는 이런 모습으로 경찰의 수배를 받아 금구덩이(금광)에 숨어 있는 아버지 소구섭(당시 38살)에게 밥을 갖다 줬다. 소재륜은 항상 사방을 경계하기를 반복하면서 금구덩이로 향했다. 이 금구덩이는 일제강점기 까지만 하더라도 운영되었지만, 해방 후에는 폐광된 채 방치되고 있었다.

"아버지 밥 갖고 왔어요. 식사하세요." 아버지 소구섭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야위어가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이 되었다고 좋아한 게 엊그제 같은데, 정작 소구섭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내내 숨어다니는 생활을 해야만 했다.

소구섭은 한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이번에는 계룡면 중장리 뒷산 고려장(高麗葬)으로 거처를 옮겼다. 고려장은 높이가 2m, 폭 1.2m로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도 지붕이 있어 사람이 은신하기에는 적합한 곳이었다. 소구섭은 이곳에서 몇 시간이나 며칠이 아닌 6개월을 보냈다. 하루는 소구섭이 도시락을 가져온 아들 소재륜에게 이야기했다.

"재륜아. 여기는 너무 비좁아 살 수가 없구나. 네가 힘들더라도 동굴을 하나 파줬으면 좋겠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재륜은 사촌 형 소재희(당시 19세)와 함께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갑동 뒷산에 굴을 팠다. 40일가량 굴에서 숨어있는 동안에도 밥 나르기는 소재륜의 몫이었다.

이제는 80대 중반이 된 소재륜(86세, 인천광역시 부평구)은 "매일 밥 나르는 게 힘들긴 했지만 1년 가까이 숨어 있던 아버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지"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국회의원 선거 사무장으로 일했지만 예비검속 당해
   

살구쟁이 현장 부친이 학살된 살구쟁이 앞에 선 소재성 ⓒ 박만순


굴속에 숨어 있던 소구섭은 결국 경찰에 체포당했다. 이어 공주경찰서와 형무소에서 숱한 고문을 당한 그는 정상적인 수감생활을 할 수 없었다. 1년 가까운 도피 생활과 연이은 고문 속에 그의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병보석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소 구루마(소달구지)에 소구섭이 실려오던 날, 집안은 울음바다가 됐다.


수개월 동안 몸을 추슬러 병석에서 일어나자마자 경찰과 민간인이 찾아왔다.

"자네가 빨갱이로 소문난 소구섭이지. 전향서와 국민보도연맹 가입서에 도장 찍어."

소구섭은 더 이상 도피 생활을 할 수 없는 몸 상태였다. 더군다나 가족들에게 더 이상 피해를 끼칠 수도 없었다. 그는 전향서와 국민보도연맹 가입서에 도장을 찍었다. 1950년 봄이었다. 충남보도연맹이 결성된 1949년 12월 27일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뒤였다.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고 해서 그가 경찰들의 감시망을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을 통해 감시와 통제는 강화되었다.

'어차피 전향한 거, 새로운 활동을 해야겠어'라고 생각한 소구섭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선거에서 공주군 갑구에 출마한 무소속 김제원의 선거사무장을 맡았다. 하지만 선거운동 기간 내내 김제원 후보에게는 '빨갱이' 꼬리표가 붙어다녔다. "빨갱이를 사무장으로 채용한 놈도 빨갱이지"라는 소문이 돌면서 김제원 후보는 2763표(9.20%)를 얻어 낙선했다. 8명의 후보 중 5위였다.

선거가 끝나고 한 달도 한 되어 6.25가 터졌다. 1950년 7월 초 계룡지서 경찰들이 들이닥쳤다.

"소구섭이 나와!"
"무슨 일이에요?"
"잔말 말고 따라와!"


누구도 경찰들을 말리지 못했다. 소위 '예비검속'이 시작된 것이다.

소구섭이 1차로 강제 연행된데 이어, 계룡면 중장리 갑동에서는 소씨 집안에서 소병완, 소병우가 연이어 붙잡혀갔다. 이들은 계룡지서에 연행된 후 공주경찰서를 경유해, 공주형무소에 수감됐다. 그러다가 운명의 1950년 7월 9일이 닥쳤다.

공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재소자들과 함께 공주지역 보도연맹원들은 트럭에 실려 공주 상왕동 산 29-19번지(일명 왕촌 살구쟁이)에서 대한민국 군인에 의해 학살됐다. 소구섭과 같은 마을에 살던 소씨 일가인 소병완, 소병우 역시 희생의 제물이 되었다.

설탕물을 타주었던 아버지
 

휘문중학교 시절의 소구섭 ⓒ 소재성


5년제 학교인 휘문중을 나온 소구섭은 전주사범 1년을 수료했다. 교사자격을 취득한 그의 첫 발령지는 충남 논산군 광석면이었다. 몇 년 후 충남 강경에 있는 중동초등학교로 전근을 갔다. 소구섭의 3남 소재성(79세. 대전 유성구)은 강경 시절의 아버지가 여전히 생생히 기억난다. "아버지가 왜정 때 황설탕을 배급받아서 설탕물을 타주셨어요. 그리고 검정 운동화도 사 주셨죠." 설탕물과 검정운동화는 당시로서는 쉽게 구경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교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리라.

집안에서 한없이 자상했던 아버지는 교육에 대한 열정 또한 대단했다. 낮에는 학교에서 가르치고, 밤에는 야학에서 가르쳤다. 전근을 가는 곳마다 야학을 운영해,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그는 문맹퇴치와 교육이 유일하게 국가와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학교 교육 못지않게 야학에 애정을 쏟았다.

해방을 맞이한 곳은 충남 공주군 계룡면이었다. 계룡초등학교 교사였던 소구섭은 이때부터 좌익 활동에 참여했다. 인근 마을에 살았던 정상윤씨가 공주군 인민위원장을 했는데, 그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활동했다. 그러다 보니 계룡국민학교 진아무개 교장과 알력이 생겼다.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과 '미·소공동위원회'에 대해 생각이 달랐기 때문이다.

'친 이승만'이었던 교장에게는 좌익 활동에 적극적인 소구섭 부교장(현재의 교감)이 눈엣가시였다. 진 교장은 소구섭을 안면도로 좌천성 발령을 냈다. 안면도에 간 소구섭은 며칠 후 교사직을 사임하고 계룡면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정치 활동에 종사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이었다. 좌익 활동에 전력했던 소구섭은 정부의 좌익탄압정책에 의해 검거령이 내려졌고, 금구덩이, 고려장, 동굴을 전전했던 것이다.

쌀밥과 쇠고기 얻어 먹어 
   
전쟁이 발발하고 북한군이 통치하는 '인공시대'가 열렸다. 인민군이 집으로 찾아와 가족들을 계룡면 인민위원회 사택으로 이주할 것을 권했다. 가장 소구섭이 학살당한 뒤라 호구지책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머니는 사택에서 인민군 식사해주는 일을 맡았다. 북한군 점령 시절 내내 소재성 가족들은 밥을 걱정하지 않았다. 아니 쌀밥에 가끔 쇠고기국을 먹었다. 일찍이 경험해 보지 못한 호강이었다. 계룡면 인민위원장 김동준은 소구섭의 친구였다. 그러다 보니 소재성 가족은 사택에서 먹을 걱정 하지 않고 살았다.

소재성의 맏형 소재륜은 민청(민주청년동맹)에서 활동했다. 사실 민청 활동이라고 해봐야 고작 인민군 심부름이었다. 소재륜은 "절에 북한군 심부름 몇 번 하러 간 게 전부"라고 말했다.

계룡면 중장리 갑동 소씨 집안은 북한군 점령 시절 인공통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당신들의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학살당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소재성의 증언에 의하면 소재훈(당시 23세)은 계룡면 인민위원회에서 근무했고, 소재현(당시 21세)은 충남도 인민위원회에서 근무했다. 이로 인해 중장리 갑동은 '계룡면의 모스크바'로 소문났다.

소씨 일가의 비극
   

교사 시절 소구섭 앞줄 오른쪽에서 3번째가 소구섭 ⓒ 소재성

 
후퇴했던 군·경이 공주군을 수복한 후, 지서경찰과 서북청년회 회원들은 갑동 마을을 에워쌌다.

"소씨 놈들 전부 나와! 그렇지 않으면 다 죽을 줄 알아!"

마을 주민들은 사시나무 떨듯 떨며 집안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소씨 집안 사람들은 공포에 떨며 쭈뼛쭈뼛 마을 큰 마당에 모여들었다. 경찰들과 서청패들의 먹잇감은 인민위원회와 여맹(민주여성동맹), 민청에 참가한 이들이었다.

인민위원회에 근무했던 소재훈과 소재현은 말할 것도 없고, 북한군 식사를 해주었던 소재성의 어머니와 소병완의 둘째 딸도 검거되었다. 소재성 어머니는 어린 딸을 업은 상태였지만 예외는 없었다. 사전에 부역자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경찰과 서청패들은 민청 활동을 했던 소재륜이 없자, 소리를 질렀다. "소재륜, 소재륜이 나오지 않으면 소씨 놈들 전부 죽여 버릴껴!"하며 몽둥이찜질을 시작했다. "악 악" 비명을 질렀지만 경찰과 서청패들의 몽둥이찜질은 멈추지 않았다. 총 개머리판도 사람들 머리 위에 수차례 떨어졌다. '퍽 퍽' 소리가 이어졌다.

법보다 주먹이 가까웠던 시절, 몽둥이를 이길 장사는 없었다. 뭇매를 이기지 못한 소씨 집안사람들은 마을을 다니며 소재륜을 찾기 위해 눈을 밝혔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소재륜과 동생 소재곤은 집 울타리 밑에 숨어 있었다. 얼굴과 등에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소재륜 형제가 숨소리 한 번 쉬지 못하고 있는 동안 경찰들의 몽둥이찜질은 계속되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결국 소재륜을 찾지 못한 이들은 체포한 이들의 손을 묶어 계룡지서로 끌고 갔다.

끌려간 여성들은 지서에서 매를 맞고 이틀 만에 풀려났다. 하지만 인민위원회에 근무했던 소재성의 사촌형들은 커다란 고통을 받았다. 소재훈과 소재현은 부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들은 사형에서 감형을 받아 몇 년 후에 석방되었다.

하지만 석방이 된 이들의 몸은 성치 않았다. 소재현은 형무소에서 나왔을 때 고문으로 인해 척추장애인이 되었다. 그는 40세경에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소재훈 역시 석방 후 고문후유증으로 오래 살지 못했다.

이것으로 소씨 집안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소구섭 동생 소인섭은 형의 전력으로 학교에서 교사직을 박탈당했다. 이후 복직을 하긴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소재성 가족은 소씨 집안에서도 미운털이 박혔다. 결국 본의 아니게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북풍한설의 야생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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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생자 명단에 소구섭의 이름이 있다. ⓒ 심규상

 
소재성 가족들은 마을을 뒤로 하고 1951년 봄에 충남 논산군 광석면으로 이사했다. 다시 대전으로 가족들이 이주했을 때,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사는 '사치'는 더 이상 허용되지 않았다. "고아원에 가면 먹을 것은 해결된다"는 말에 소재성과 여동생은 '영신고아원'에 가서 밥 신세를 졌다.

생계가 막막했던 소재곤은 김제원을 찾아갔다. 아버지 소구섭이 6.25 직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사무장을 맡았던 기억을 되짚어낸 것이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찾아갔는데, 다행히도 김제원은 품이 넓은 사람이었다. '이연공업주식회사'를 경영하고 있던 김제원은 소재륜과 소재곤을 아무 조건 없이 회사에 취직시켜 주었다.

소구섭이 선거사무장이었다지만, '빨갱이 가족'을 외면하던 것이 당시의 세태였다. 그런데 소구섭의 휘문중 1년 후배였던 김제원(1913년생)은 선배와의 의리를 선택한 것이다. 김제원은 후일 경향신문 사장을 거쳐 8대, 9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김제원의 호의가 있었지만, 소재성 가족의 앞날은 그리 밝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를 중심으로 가족들은 똘똘 뭉쳤다. 첫째 소재륜은 중학교를 다니다 말다 하다가, 부평경찰학교에 입학해 1961년에 경찰이 됐다. 그러나 1966년경 연좌제로 경찰에서 파면당했고, 공사판을 전전해야만 했다. 다행히 후에 복직되어 경찰로 정년퇴직했다.

둘째 소재곤(1935년생)은 대전상고 야간을 나와 건국대 법학과 야간을 다녔다. 인쇄소를 차려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결국 사업에 성공했다.

셋째 소재성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대전상고 야간을 나온 그는 공주교대를 거쳐 초등학교 교사 발령을 받았다.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중등교원 자격시험을 치렀다. 합격한 그는 중학교 교사를 하다가, 중학교 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민간인학살사건 피해자의 유가족이 이만큼 한국 사회에서 잘 적응해 생활했다는 이야기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했다. 궁금증은 소재성과의 대화에서 해소되었다.

"우리 가족은 북풍한설의 야생화처럼 살았어요. 고난과 시련에 좌절하지 않고, 더 열심히 살았어요."

소재성 가족은 과거의 아픔에 대한 한과 분노를 안고 주저앉지 않았다. 상처를 극복하고, 세상을 전면으로 응시하면서 적극적인 삶을 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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