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선열과 삼례소작쟁의

이우성과 삼례소작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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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안나(arabianna)등록 2018.11.20 08:29
이우성과 삼례소작쟁의

순국선열의 날
11월 17일은 순국선열의 날이다. 순국선열은 국권을 잃은 일제강점기 자발적으로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 하고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돌아가신 분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분들을 기념하는 뜻 깊은 날에 지난여름부터 기사를 쓰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이우성 선생께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으셨다.
이우성 선생은 삼례출신으로 삼례소작쟁의를 이끄셨던 분이다. 전주도립사범학교(현 전주교대) 출신으로 안정적인 교원의 길을 버리고 농민운동에 헌신 하였다. 이것은 고향에서 자행되는 일제의 수탈을 경험하였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농민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깊이 동정 하였고, 농민이 대우 받는 나라를 꿈꾸며 반일과 민족주의자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었다. 이러한 선생의 행적은 조선소작인 상조회 전주지회 부회장을 맡았던 안용진이 변절하여 1931년부터 1941년까지 삼례면장을 지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삼례소작쟁의
삼례는 고려시대부터 역참이 있던 도시이다. 교통의 편리함 덕분에 동학농민혁명 시기 혁명군은 삼례에서 봉기 하였고 이 때 삼례의 남정네 5천명이 동참 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과 청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삼례에는 가장을 잃은 집이 태반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삼례에 큰 생체기를 남겼지만 그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일제강점기를 살아내야만 하였다.
곡창지대의 쌀에 눈독을 들인 일본인들은 호남평야에 모여 들었고 춘포들, 삼례들, 만경들은 일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일인들은 생산한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기 위해 교통의 요지 삼례에 기차역을 만들었다. 삼례역을 중심으로 노동자와 농민들의 고단한 삶이 이어졌다. 민중의 고단한 삶은 지식인들을 각성 시켰고 노우회와 농우회가 만들어지고 활동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소작권을 무기로 소작인에 대한 착취가 자행되었다. 한국인 마름들의 횡포는 말할 수도 없었다. 이 횡포에 대항하여 소작쟁의가 일어났다. 터무니없는 소작료 인상에 대한 항거였다. 일 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내 입은 고사하고 자식들 입에 쌀 한 톨 넣어 줄 수 없는 비참한 현실에 대한 항거였다. 이 항거를 주도한 인물이 이종갑, 이우성 형제이다.
이종갑, 이우성 형제는 삼례 구와리 출신이다. 특히 이우성 선생은 장수와 임피에서 교원으로 일하였다. 아마도 임피에 있는 동안 옥구의 소작쟁의를 경험한 것이 삼례 소작쟁의를 주도 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간회를 비롯한 전주지역의 활동가들이 삼례 소작쟁의를 후원 하였던 것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삼례에서 있었던 소작쟁의는 신간회 전주지회 진상용의 진술을 중외일보에서 특집기사로 다루고 있어서 날짜별로 재구성이 가능하다.

삼례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
더욱이 해방 이후 우리는 친일 부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하였다. 덕분에 삼례에서 이뤄졌던 수많은 항일에 관여했던 유명• 무명의 인사들을 제대로 예우하지 못했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그들의 충의와 절의를 기억해야만 한다. 이것이 삼례의 상처를 치유하는 첫걸음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우성 선생의 건국훈장 애국장은 참으로 의미 있는 진전이다.
내년은 3•1운동 100주년이다. 이것을 기념하여 삼례에서 이뤄졌던 항일운동에 대한 조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종갑. 이우성. 김불. 김춘배. 양칠성. 김형민. 박한영. 윤건중 삼례 출신 유명인이다. 이들과 함께 꼭 기억해야 할 동학농민혁명군.... 우리는 그들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잊을 수는 없다. 그들은 삼례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완주군 공식블로그 '완주스토리'에 개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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