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가족의 죽음, 그리고 나의 늙어감... 죽는 순간까지 향기롭기를

등록 2019.01.05 20:44수정 2019.01.0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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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죽기 마련이지만, 가족의 죽음은 우리에게 각별하다. ⓒ pixabay

 
누구나 죽기 마련이지만, 가족의 죽음은 우리에게 각별하다. 그 기억은 우리네 삶과 죽음을 다시 반추하게 한다.

내가 세 살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이른 봄 눈발이 옅게 깔린 보리밭 들녘으로 상여가 나가는 모습이 희미하게 영상처럼 스친 기억이 남아 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건넛방에서 내 울음소리가 나면 "아이 울리지 마라"고 이르셨단다.

그리고 막내 손주인 내가 태어나자 첫 새벽에 일어나 낙동강 물을 한 동이 이고 와서 첫 7일 동안 매일 그 물로 나를 씻기셨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은 이처럼 어머니를 통해 내게 아련히 남아 있다. 그 할머니의 정성이 내 몸과 맘을 오늘까지 지켜 준지도 모른다.

그때만 해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례는 삼년상으로 치렀다. 지금 생각하니 아버지의 효성이 그만큼 지극했던 게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감당하기 어려운 죽음의례였을 터이다.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사랑채 할머니 빈소에 상을 차려놓고 어머니가 구슬프게 소리 내어 곡하시는 게 참 신기하고 특이한 의례로 내 기억 속에 각인돼 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1899년생)가 아홉 살 때 돌아가셨다니 요즘으로 치면 요절하신 게다.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의 행적을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냥 고모부가 할아버지 시신을 지고 어린 아버지가 그 뒤를 따르는 애달픈 사연이 전설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1910년 경술국치 직전 곤궁한 민중의 삶을 짐작게 한다. 

생전에 인연이 없었던 할아버지지만, 나는 그분이 돌아가시고 70여 년 후에 산소 이장을 하면서 내 손으로 당신의 건장한 뼈를 가지런히 모시고 할머니 묘소 옆으로 옮겨드렸다. 그게 죽은 할아버지가 막내 손주인 내게 유일하게 남긴 흔적이자 인연이었다. 그래도 내 몸에는 여전히 할아버지의 핏줄이 흐르고 있을 터. 이처럼 할아버지와 나의 연(緣)은 수운 최제우 선생이 말한 <불연기연>이다. 즉, 불연(不然)이 기연(其然)이고 기연이 불연인 게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간접경험의 토막으로, 이런 식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내가 가족의 죽음을 직접 목도한 것은 1969년 정초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때였다. 아버지는 노환으로 일 년 남짓 몸져누워계시다가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장엄한 죽음을 맞으셨다.

여기 '장엄한 죽음'에 대한 기억은 두 가지 면에서 뚜렷이 내게 남아 있다. 하나는 아버지께서 온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지막 숨을 거두셨고, 게다가 친척들까지 임종 시에 함께 엎드려 곡하는 모습들이 참으로 장엄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오일장에 이르는 죽음의례(상례, 喪禮)가 온 동네 사람들이 참여하는 가운데 장엄하게 치러졌기 때문이다.

그때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이었는데, 그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마을의 장정들이 나서서 큰 상여를 메고 들판을 지나 빙판인 낙동강을 건너 5km 이상이나 운구해 가야 했다. 상여를 이끄는 구슬픈 앞소리에 상여꾼들의 뒷소리가 우렁차게 이어졌다. 이렇게 아버지는 죽어서도 마을 어른으로서의 권위를 유감없이 보이신 게다. 나는 그 이래로 고향마을의 장엄한 장례를 목도할 수 없었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당대 우리 동네에서 마지막 어른 대접을 받은 분이었다.

홀가분히 떠나신 어머니

죽음에는 차례가 없다더니 6.25 한국전쟁 때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큰 형님께서 1984년 어느 초봄에 큰길을 건너시다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식물상태인 채로 병원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당했다. 죽음을 맞이한 게 아니라 느닷없이 당하신 게다.

최근 몇십 년 동안 자동차 문화가 우리에게 일상화되면서 가족 가운데 누군가 교통사고로 크게 다치거나 죽은 사람이 없지 않은 게 우리네 현실이다. 전쟁이나 질병에 의한 죽음보다도 더 일상화된 게 사고로 인한 죽음이다. 이런저런 사고(事故死)사는 이 시대의 큰 재앙이다.

오 남매의 막내둥이인 나는 고등학교 3년을 부산 큰 형님 집에서 공부했다. 내 결혼 때도 큰형님이 혼주 노릇을 해주셨다. 사고를 당하던 날도 큰형님은 둘째 형님과 저녁에 우리 집에서 만나기로 두 분끼리 약속한 터였다. 평소 차분하던 분이 그날따라 왜 그리 급하게 길을 건넜는지 모르겠다. 졸지에 당한 어처구니없는 사고사였다. 지금도 나는 식구들에게 차 조심, 운전 조심하라고 입버릇처럼 당부한다.

큰아들 죽음을 가슴에 묻고도 나의 어머니는 96세에 이르기까지 비교적 건강하게 장수하셨다. 어머님이 장수하시는 걸 보고 나는 사람이 너무 오래 살아도 어른 대접받기 어렵다는 걸 알았다.

노모를 내가 직접 모시지 못하고 큰댁에 가서 어머니를 뵙고 돌아오면 맘이 편치를 않았다. 나이가 드시니 아예 전화로는 대화가 되질 않았고, 직접 뵈어도 동문서답하기 일쑤였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노령에 치매 증상까지 있어, 그냥 골방에 계시는 걸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어머니가 뒷방 노인이 되어 그렇게 지나시는 걸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어, 장조카에게 양해를 얻어 구미 큰댁 근처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입원 절차로 병원에서 기본적인 검진을 해보더니, 노화에 따른 쇠약증세 외에는 건강에 특별한 이상이 없다고 했다.

중환자실로 가지 않고 일반 병실에서 어머니가 편안히 쉬실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부터 두 분 형님이랑 서울 누님도 내려오셔서 교대로 어머니 병실을 지켰다. 나는 정년 퇴직하기 전이라 주로 집사람이 병원에서 수발을 들고 틈나는 대로 한 번씩 병원에 갔다.

어느 날 연구실에서 국책 프로젝트 후속 작업을 하고 있던 차에, 어머님이 위중하니 급히 오라는 연락이 왔다. 음력 정월 대보름을 이틀 앞두고 햇살 좋은 아침에 어머님은 그냥 마른 짚불 사그라지듯이 그렇게 조용히 숨을 거두셨다. 언제 숨이 멈췄는지 분간키 어려울 정도로 전형적인 자연사(自然死)였다.

사람이 자기 목숨이 다하면 저리 평안히 잠자듯 죽음을 맞을 수도 있는가 싶었다. 어머니는 우리 가족 중에 가장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임종을 맞으신 분이다. 아마 평소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셨고, 욕심 없는 삶을 사신 탓인가 싶었다. 허물 벗듯이 육신의 헌 옷을 벗고 영의 세계로 홀가분히 떠나신 게다.

인명사전에 새겨진 부모님의 이름
 

아버지 회갑 때(1959)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회갑 때 회갑 잔치상을 받고 어머니와 함께 찍은 흑백 사진. 이것이 두 분이 평생을 살며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 김병하

 
어머니 장례를 모두 치르고 집사람이 장례부조도 좀 남은 게 있으니 어머님 49재를 올려드리자고 했다. 막내며느리가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위해 49재를 올리자는데 아들인 내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어머니 49재를 외가와 인연이 깊은 도리사에서 모시기로 했다.

그 49재는 평소 불심이 깊은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큰 공덕을 입게 됐다.

그 일을 계기로 불가(佛家)에 친밀감을 가지던 차에, 그해 여름 우연히 내가 좋아하는 이홍우 교수가 주석하고 지은 <대승기신론통석>(2006)을 손에 넣고 빠져들기 시작했다. 지금도 평생 내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고전을 한 권 들라면 나는 단연 <대승기신론>을 꼽는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연고로 지난 5월에는 대구시민대학에서 감명 깊게 읽은 고전강좌로 <대승기신론> 강의를 하나 맡기도 했다.

내친김에 기신론에 얽힌 사연을 좀 털어놔야겠다. 기신론을 처음 읽고 손에 딱히 잡히는 건 없었지만 뭔가 가슴에 찡하게 와 닿는 걸 느꼈다. 누구나처럼 부처의 씨앗을 내장한 중생이기에 그럴 수 있었던가? 딱히 뭐라 설명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그로부터 나는 기신론을 열 번은 더 읽었을 게다. 한동안 서점에 있는 기신론은 뭐든 보이는 대로 구입해 읽었다. 그 중에도 <대승기신론통석>(2006)은 내게 각별한 함의를 안겨 주어 거듭 읽었다.

오죽하면 정년 퇴임 직전 나는 대학원 강의에서 이 통석을 기본교재로 택한 적이 있었고(개설 강좌와 직접연관이 없었음에도), 그 후 <대승기신론의 특수교육 교사론적 함의>라는 논문도 한 편 발표했다. 아직도 기신론의 가르침이 확실히 내 안에 자리 잡지는 못했으나, 그 가르침이 주는 감동이나 신비는 여전하다. 그래서 우리에게 삶은 신비다. 이게 모두 따지고 보면 어머니의 죽음과 무관하지 않게 얻은 공덕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년 뒤인 2010년, 뒤늦게 세계인명사전인 'Who's Who in the World'에 등재되고, 영국 국제인명센터(IBC)에서는 21세기 지식인 2천 명에 나를 선정해주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그 인명사전 첫 줄에 아버지 Kim, Hong Sang(김홍상, 金泓相), 어머니 Park, Bong Seok(박봉석, 朴奉石)이라는 영문 이름이 표기된 것을 보고, 그나마 내가 교수로 살아오면서 부모님 이름에 누를 끼치지 않고 자식 노릇 한 것을 큰 위안으로 삼았다.

게다가 어머니는 한글도 해독하지 못한 문맹으로 살아온 고달픈 일생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언어는 모진 세월을 인고한 생동감과 영감이 배어있다. 어머니는 어릴 적에 내게 '천강스럽다'는 표현을 자주 썼는데, 이것은 한글 대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죽음을 기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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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현국 선생은 "노인은 죽음 앞에서 무기력한 허무한 삶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잘 익은 열매처럼 향기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 unsplash

 
세월과 함께 늙어가면서 나의 죽음은 어찌 될까? 뭐라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나는 죽음을 반추하면서 살고자 한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고 했다. 문제는 정신력이다. 끝까지 자기 정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어쩌면 노인들에게 암보다 무서운 게 치매다. 80대 중반을 넘어서면 노화에 따른 치매 증상은 정도의 차이일 뿐 일반적 현상이다.

그래서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게다. 까딱하면 100세까지 살 수 있는 시대다. 오래 사는 게 좋은지 어떤지는 답이 없다. 채현국 선생은 <100세 수업>이란 책에서 "노인은 죽음 앞에서 무기력한 허무한 삶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잘 익은 열매처럼 향기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결코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다. 죽는다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하지만, 죽음에 관한 한 누구도 뭐라 장담할 수 없다. 다만 늙어도 자존감을 잃지 않고, 죽음에 대한 결정권을 끝까지 사수해야 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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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둥이로 구미(고아 평촌)에서 태어나 지금은 명예교수(대구대)로 지나고 있음. 정년후에 주로 독서, 글쓰기, 산책을 즐기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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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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