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여서 죽은 게 아닙니다'... 국군은 왜 우익활동가를 학살했을까

[박만순의 기억전쟁 ⑤] 제천 수산면 주민들의 전쟁 피해

등록 2019.01.08 17:13수정 2019.01.0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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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지서에서 마을 청·장년들이 굴비 두름처럼 묶여 나왔다. 머리를 숙였지만 누구인지 모두 알아볼 수 있었다. 특히 평소 좋아하는 오빠 표래은을 못 알아볼 리는 없다. 정미소 창고에 숨어 오빠가 끌려나오는 모습을 지켜본 표옥은(당시 22세)은 속울음을 울었다. 오빠가 사지로 가는 것을 짐작했지만 감히 오빠 일행을 따라갈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런데 표래은 일행이 군인들에 의해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본 이가 여동생 표옥은만은 아니었다. 표래은의 오촌조카 표순호가 있었다. 당시 9세였던 표순호는 당숙아저씨와 마을 어른들이 지서에서 끌려나와 트럭에 실리는 모습을 목격했다. 트럭이 '부릉'하는 소리와 함께 출발하자 표순호와 친구들은 궁금증이 발동해 트럭 꽁무니를 뒤쫓았다.

수산초등학교 앞에서 트럭이 멈췄다. 인솔 군인이 내려 "이놈의 새끼들. 어디를 따라와? 빨리 집에 가!" 3~4명의 조무래기들은 군인의 고함에 줄행랑을 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트럭이 출발하자 다시 뛰었다. 초등학교에서 불과 500m거리에서 트럭이 멈췄다. 적재함에 실린 이들이 야산으로 끌려갔고, 조무래기들은 숨을 죽이며 이들을 뒤따랐다.

군인들은 부역 혐의자 9명을 일렬로 세웠다. "앞에 총"하는 인솔자의 명령에 군인들은 사격자세를 취했다. "쏴" "탕탕탕"하는 소리와 함께 민간인들이 짚단 무너지듯이 털썩 쓰러졌다. 조무래기들은 총소리가 나자마자 무서워 마을로 뛰어갔다.

잠시 후 이곳에 표옥은이 도착했다. 현장에는 시신들이 피를 쏟으며 눕혀 있거나 엎어져 있었다. 오빠를 보는 순간 곡이 터졌다. 눈물 콧물이 나면서 한참을 운 후 오빠를 자세히 보았다. 총알이 가슴에 맞아 옆구리를 관통하고 한쪽 손을 부쉈다. 가슴과 옆구리에서 피가 쿨럭쿨럭 하며 쏟아졌다. 표옥은이 겉옷을 벗어 오빠의 몸에 쑤셔 넣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체념하고 얼굴을 보니, 오빠는 눈 뜬 채로 있었다. '한 맺힌 죽음이니 당연할 수밖에'라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양복점 운영하던 의용소방대원
 

표래은 학창시절의 표래은 ⓒ 박만순

 
표래은은 수산면이 낳은 수재였다. 수산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동경에서 유학했다. 아버지 표이만은 일제강점기에 정미소를 운영했고, 6.25당시에는 소장사(소 중개인)를 했던 전형적인 시골유지였다. 표옥은(91세. 경기도 용인시)은 "당시 집에 소마차가 2대 있었어요"라고 회고한다. 이렇게 부유한 집안이었기에 아들 래은을 서울과 일본으로 유학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래은은 성인이 되어 고향인 충북 제천군 수산면으로 돌아왔다. 면소재지에서 양복점을 운영했는데, 70년 전 면단위에 양복점이 가능했을까 라는 의구심이 생긴다. 김석근(87세. 충북 제천시 수산면 수산리)씨는 이 의구심에 "수산면이요. 왜정 때 (수산면)적곡리에 텅스텐광산이 있어 엄청 부흥했어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이 1960대 초반까지 기생집(요릿집)이었어요. 명월관이라고요" 텅스텐광산이 수산면 경기를 활성화시켰던 것이고 면 소재지에 요릿집과 양복점이 들어오는 것을 가능케 한 것이다. 수산면 촌로들은 "수산면이 (충북)단양보다 전기가 먼저 들어 왔어요"라고 한다.

김석근의 증언에 의하면 수산면에는 텅스텐 광산이 두 개나 있었다고 한다. 수산면 적곡리 동막에 '동촉광업소'가 있었고, 수산면 수리에 '수리광산'이 있었다는 것이다.
양복점을 운영하던 표래은은 의용소방대원으로 활동을 했다. 또한 대한청년단이 모체가 되어 만든 청년방위대에서도 활동을 시작했다. 래은의 사촌형 표성은이 의용소방대 부대장을 했기에 자연스럽게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즉 표래은은 좌익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전형적인 우익청년활동가였다.


그런데 이런 래은이 왜 부역혐의로 학살되었을까? 의용소방대와 청년방위대에서 같이 활동했던 친구들이 북한군이 점령했던 인공시절에 수산 분주소에서 일하면서 갈등의 씨앗이 배태(胚胎)된 것이다. 인공시절에 친구들이 래은을 몇 번이나 찾아와 "래은이 분주소에 나와 같이 치안활동을 하세"라고 권유했고, 어느 정치집단이 집권을 하던 행정기관과 치안기관은 필요한 것이기에 순순히 동의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보복학살의 희생양
   

표옥은 표래은 여동생 표옥은 ⓒ 박만순

 
군·경이 수산지서에 복귀하면서 인공시절 부역활동을 했던 이들을 불러들였다. "지서에 가 봐야지" "가면 안 돼. 피신해야 돼"라며 의견이 분분했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 전 수산면 청년방위대장이었던 이상근이 자신의 사촌동생만 빼돌렸다. 이상근은 이상○에게 "여기 있다가는 큰일 나. 얼른 몸을 피하자"라고 하며 부리나케 마을을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던 차에 이들 일행과 표래은이 조우했다. 래은은 이들을 향해 "같이 일해 놓고 너만 달아나려고 하냐"며 강력히 항의하고 몸싸움을 했다. 하지만 이상근은 사촌동생 이상○을 트럭에 태우고 도망갔다.

결국 피난을 못간 표래은과 동료들은 제천 수산지서에 구금되었다. 군인들은 살기등등했다. 2개월 전인 1950년 7월 27일 지방좌익들이 면내 우익인사 8명을 '반동'이라는 이유로 수산면 수산리 황기골에서 학살했기 때문이다. 우익인사들이 학살됐기 때문에 인공시절 부역했던 이들이 검거되면 즉결처형 되는 것은 당연시되는 분위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수산면 인민위원장 우광문은 8사단 군인들에게 검거되어 1950년 9월 말 수산리 야산 마구방골에서 즉결 처형되었다. 우광문은 수산면 적곡리 출신으로 적곡리 동막에 있었던 동촉광업소(일명 동막광산)에서 남로당 조직책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피신을 못한 표래은 일행의 신세는 바람 앞의 등잔불 격이었다. 사실 표래은 일행과 '우익인사 학살사건'과는 관련이 없었지만 보복학살의 희생양이 되었다. 우익인사 학살사건의 주모자는 군·경 수복 전 월북한 것으로 알려졌다.

표래은을 포함한 9명은 1950년 9월 30일 8사단 군인들에 의해 충북 제천군 수산면 내리 야산에서 학살되었다. 이때 죽은 피해자 9명 인적사항을 수소문했다. 그 결과 표래은, 이상열의 백부, 김대현의 부, 유동식, 유광열, 유광열의 자, 이덕주의 부가 확인되었다. 두 명의 이름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들의 활동이 구체적으로 어떠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은(83세. 제천시 수산면 수산리)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군이 총을 들이대며 심부름시키는데 안 할 사람이 있어?"라고 반문한다. "유동식은 북한군 명령에 의해 말메기를 걷으러 다녀 문제가 되었지"라 한다. 말메기가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말 먹이"라고 답했다.

결국 적을 도왔다는 무시무시한 부역죄의 실체는 북한군과 분주소장(지서장)의 명령에 의해 식량과 인원을 동원한 행위가 고작이었던듯 하다.

1차 부역자 학살이 1950년 9월 30일 수산면 내리 야산에서 자행되었고, 2차 부역자 학살은 1951년 1월 7일 수산면 수산리 황기골에서 자행되었다. 우익인사와 부역혐의자 약 50명이 이념 과잉시대에 보복학살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빨치산 활동이 이뤄진 '수산리'는 다른 곳인데...    

국군 8사단과 미군이 낙동강 이남으로 후퇴했다가 수복하면서 빨치산과 북한군 패잔병을 소탕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 연합군이 이들만 소탕했다면 별 문제가 없었는데 산악지역 인근마을을 전부 불태워버린 사건이 문제가 된 것이다. 특히 충북 제천군 수산면 수산리는 빨치산 활동과 전혀 관련이 없는 지역이었다.

그런데 미군이 한국어에 익숙하지 못해 착각을 일으켰다. 수산면 수산리와 월악산 인근 마을인 충북 제천군 덕산면 수산리와 혼동을 한 것이다. 당시 월악산은 빨치산의 주요 활동 공간이었고, 북한군의 후퇴 이동루트이기도 했다. 미군이 덕산면 수산리를 초토화시킨다는 것이 수산면 수산리를 싹쓸이 한 것이다.

수산면 주민들은 국군의 소개령으로 1950년 12월 9일 피난 짐을 싸 경북 문경으로 향했다. 피난 간 지 한 달 만인 1951년 1월 초에 마을로 돌아왔을 때 주민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상은은 "수산리 200호가 전부 불타버렸어요. 당시에 타지 않은 건물은 4채밖에 없었어요" 면사무소와 지서, 이상근, 이경림 가옥이 불타지 않았다고 한다.

관공서를 제외한 민가는 2채가 방화의 피해에서 벗어난 것인데, 이곳은 기와집이었다고 한다. 나머지는 모두 초가집이었기에 쉽게 타버린 것이다.

졸지에 삶의 터를 빼앗긴 주민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했다.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해와 움막집을 지었다. 겨우 비바람만 피한 상태로 약 2년간을 지낸 것이다. 일부 주민들은 면 소재지 근처 마을에 가서 방을 하나 빌려 기거했다.

미군에게 성폭행 당하고, 시가에서 쫓겨나

수산면 주민들의 전쟁 피해는 가옥이 불타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겨울 난리에 피난 가기 전 미군들은 수산면소재지 집들을 일일이 다니며 '처녀사냥'을 했다. 젊은 여성들이 보이면 막무가내로 납치해 끌고 가 성폭행을 저질렀다.

표옥은은 "약혼했던 내 여자 친구를 미군들이 납치해 끌고 갔어요. 동네사람들이 쫓아가 미군들에게 항의해 다행히 풀려났어요. 하지만 수산면 밤골에 살았던 다른 여자는 미군에게 끌려가 성폭행을 당해 임신을 했어요. 출산을 했는데 흑인이 나와 시집에서 쫓겨 났어요"라고 당시 상황을 기억했다.

흑인을 낳아 시집에서 쫓겨난 여성의 남편은 부역죄로 국군들에게 학살된 상태였다. 남편은 부역죄로 학살되고 아내는 미군에게 성폭행 당했다. 역사의 피해자인 이 여성은 가족과 마을로부터 보호받기는커녕 시집에서 쫓겨나는 이중의 피해자가 된 것이다.

산소에 국수 가져 가서... "오빠 잡숴봐"
 

사건 현장 사건현장에 선 표순호(좌측)과 표순월 ⓒ 박만순

 
오빠의 처참한 최후를 목격한 표옥은은 나이 90이 넘도록 오빠를 잊을 수 없다. 오빠를 가매장한 지 한 달 만에 수산면 수산리 밤골 선산으로 이장을 했다. "이장을 하기 위해 관 뚜껑을 열었는데 다리가 퉁퉁 부었어요."

한동안 오빠의 묘를 찾지 못했지만, 표옥은은 한시도 오빠를 잊을 수 없었다. 몇 년 후부터 매년 음력 6월 보름에 산소를 찾았다. 오빠의 생일이기 때문이었다. 생전에 국수를 좋아했던 오빠를 위해 국수를 삶아갔다. "오빠 잡숴봐" 대답할 리 없는 오빠를 한참이나 기다리다보면 국수는 팅팅 불었다.

2019년 1월 2일,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를 여읜 표래은의 딸 표순월(70.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이 육촌오빠 표순호와 함께 수산면 내리 사건현장을 찾았다. 아버지가 학살된 장소인 것이다. 표순월은 아버지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얼굴도 보지 못했지만, 69년 전 이곳에서 죽임을 당한 아버지를 생각하니 눈물이 저절로 나왔다. 당시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당숙의 최후를 목격한 표순호는 헛기침만 했다. 생후 한 달도 안 되어 어머니의 등에 업혀 경북 문경으로 피난 갔던 표순월은 태어나자마자 고행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70 평생 고행의 길을 걸은 표순월의 인생에 대한 보상은 아버지의 명예회복이다. '빨갱이였기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국가폭력에 의해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 그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박만순의기억전쟁 #양복점 #분주소 #수산리 방화 #텅스텐 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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