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썹은 눈을 이해하지 못했다 (2)

검토 완료

안세연(birdkite9366)등록 2019.04.08 17:41
S는 E를 사랑했다. 아니, 사랑한다고 믿었다. 그 무게감이 S의 얕은 시야를 가렸다. 만난 지 한 달쯤 지난 뒤, 그러니까 E가 사무치는 불안과 여전히 싸우고 있던 무렵, 그럼에도 누가 물어보면 E는 연애가 좋긴 하다고 답하던 무렵이었다.

E는 밤길을 무서워했다. 매일 밤을 E와 전화한 S도 그걸 알았다. E는 야근을 피할 수 없었지만, 밤길도 피할 수도 없었다. 종로 시내 한복판에서부터 아현까지는 멀고도 험했다. 

끈적이는 접촉을 견디느라 질식할 것 같았던 퇴근길의 지하철을 빠져나오자, 밤의 장막이었다. 거리의 밑바닥이 보이지도 않았다. 간판은 스스럽게 흩어져있었다. 띄엄띄엄 있던 가로등의 샛노란 빛은 바닥까지 채 닿기도 전에 어둠에 삼켜지고 있었다. E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어제의 뉴스엔 밤에 혼자 걷다가 남자에게 끌려간 여자의 이야기가 나왔다. E는 S에게 전화를 걸었다. E는 지금, S가 필요했다. 

"지금 데리러 와줄 수 있어?" 
"지금은 좀 바쁜데.. 많이 무서워?"

S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굳이 그래야 하냐는 듯이. S의 목소리를 듣자 E는 신입사원의 첫 날이 떠올랐다. 클라이언트에게 실수로 메일을 잘못 보냈었다. 울상으로 상사에게 보고하자 별 일 아니라고 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별 일 아니라는 듯 무관심했던 상사와 울먹였던 자신의 거리가 너무나 멀게 느껴졌었다. 그 때와 같았다. 상사가 잘못한 건 없었다. S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E의 불안은 좀 더 무거운 것으로 변하면서 가슴속으로 가라앉아 버리는 것이었다.

"아니, 됐어. 혼자 갈 수 있을 것 같아."
"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연락해."

E는 찰나에도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있지 않으면 안 될 것을 깨달았다. S와의 거리를 좁힐 수 없을 것 같았다. E는 밤길을 무서워했으나, S는 밤 산책을 즐겼다. S는 1시간이고 2시간이고 성북천부터 회기까지 걸어다니곤 했다. 아무것도 문제가 아니어서, E는 S가 부러웠다. 

별빛이 밝아서 사랑을 참을 수 없던 날도 있었다. E는 차창을 내리고 전기 라이터로 메비우스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깊이 들이마신 후 눈을 가늘게 뜬 채 토해냈다. 뿌연 연기 사이로 달이 보였다. 차가운 기운이 흘러 들어왔다. 별빛이 아련해서 E는 S를 사랑했다. 윤동주 시인의 <별 혜는 밤>이 떠올랐다. 시인은 하늘에서 밤을 새우며 별 하나에 추억과, 사랑을 아스라이 불렀었다. 그 때 E의 옆에는 S가 창가에 팔꿈치를 짚고 반대편의 밖을 보고 있었다.

"사랑해"
"왜 안 하던 말을 하고 그래, 부끄럽게"
"..."

표현을 잘 못한다고 했던 S의 대답을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S에게 곤란한 상황을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E는 그냥, 느끼고 있는 감정을 S와 나누고 싶었다. S에게도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E에게는 사랑한다는 말이 애쓰듯 쥐어짜서 나오는 게 아니라 이끌림처럼 나왔기 때문이다. 재채기가 나오듯, 울음이 터지듯, 사랑도 참기 어려운 말이었다. S에게는 그게 아니구나 싶었다. E는 S와 함께 있는데도 느껴지는 쓸쓸함의 이유를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서운함은 아무도 모르게 선명한 기억으로 쌓여만 갔다.

E는 S가 사는 신설동 오피스텔 1314호에서 머물렀다가, 또 떠났다가를 반복했다. E가 떠날 때면 S는 벌써로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E를 집까지 데려다줬다. 

자그마한 다툼이 시끄러워 별도 보이지 않던 날에도 S는 E를 데려다줬다. 전철역과 조금이나마 가까운 오피스텔 뒷길의 한밤, 잡동사니를 팔던 노점상들의 발길도 끊어진 마당에는 빗자국이 붓으로 그린 듯 뻗어있었다. 늦봄의 차가운 물감이 흩뿌려 놓은 듯한 정경에 E는 공연히 처연해졌다.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분위기가 주는 아름다움을 더 이상 헝클어놓고 싶지 않았다. E는 침묵 속에서 둥근 한마디를 애써 건넸다.

"나 추워"
"난 별로 안 추운데"
"그게 무슨 소리야?"
"넌 나보다 두껍게 입었잖아. 그런데도 추워?"
"너가 안 추우면 나는 추운 게 아니라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딱 봐도 그렇잖아. 겨우 이거 가지고 왜 그래?"

연이어진 가스등 사이에서도 S의 조각난 말은 E를 내려덮쳤다. 사소한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를 E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S에게는 자신이 느낀 감각만이 기준이었다. 자신이 걸어온 길만이 정답이라고 알았기 때문에 S는 본 적 없는 길들의 존재와 가치를 무시했다. 현실의 회색지대 속에서 살아가던 E는 S가 가진 안락한 흑백의 세계가 점차 겁이 났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 계정에 올린 글입니다.

https://brunch.co.kr/@goodwriting/76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