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썹은 눈을 이해하지 못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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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세연(birdkite9366)등록 2019.04.15 08:05
계절이 한 바퀴 돌았다. S와 E가 처음 만났을 때 연노랑이었던 노랑 나비의 날개 빛깔은 백색으로 물들었다. 해빙이 녹고난 자리에는 잔 물결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는데 S와 E 사이의 바다는 염도가 거의 없는 민물인듯 얼음이 아직 녹지 않은 채 둥둥 떠다녔다.

E가 자신의 휴대폰을 S에게 스스럼없이 보여줬던 것에 비해, S는 E가 자신의 휴대폰을 보는 게 싫었다. 프라이버시라는 좋은 구실도 있었기에 S는 메신저를 보여 달라는 E의 요구에도 당당히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켰다. S는 그걸로 다 된 줄 알았으나, 녹지 않은 얼음은 결국 송곳이 되어 둘 사이를 아프게 찔렀다. 

S는 직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욕실로 뛰어 가 물부터 뒤집어쓰고 나오곤 했다. 침대에 누워 꼼짝 않고 S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E는 S가 두고 간 갤럭시 노트의 불빛을 보자마자 무언가를 깨달았다.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봐버린 것 같았다. 아주 짧은 사이에 강한 감정이 부풀어 올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E는 일어나 있었다. S의 친구가 보낸 메세지가 미리 보였다.

19:21'근데 G는 예쁘긴 한데..'
19:21'몸매가 별로지 않냐' 

E는 뉴스에서 보던 이야기가 자신 주위에도 일어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그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 같은 이야기였다. S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E의 굳은 표정을 보고 어찌할 바 없는 일이 일어났음을 넉넉히 알아차렸다.

"이거 뭐야?"
"왜 남의 폰을 멋대로 봐? 그거 그냥 친구들끼리 장난치는거야."
"G면 너네 회사 동기 아니야? 이 방에서 내 이야기도 했어?"
"아냐. 그럴 리가 없잖아."
"아까 그 대화방, 지금 전부 보여줘."
"우리 그러지말자. 애인이라도 지켜야 할 선은 있는 거잖아."
"지금 신뢰를 깨트리고 있는게 누군지 몰라서 그래?"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그 친구들 그렇게 나쁜 애들 아니야. 남자들끼리 술자리나 그런데서 이야기 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E도 S의 프라이버시를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S가 만든 얼음이 자꾸만 신경쓰여서 그럴 수 없었다. E와 S는 순전한 타인이었다. 둘이서 함께 쌓아야 할 신뢰는 어디에 있는지. 왜 이 일을 그토록 신경써야 하는지. E는 이해할 수 없었다. S를 반쯤 밀치고 침대 위에 엎드려 마침내 느껴울고 말았다. 얼음은 여전히, 앞으로도 단단했다. 

E는 마케팅 회사에 입사한 지 1년 만에 대리급으로 승진했다. 사회생활 못 한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일부러 술을 더 먹었고, 체력 안 좋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맡은 일이라면 며칠 밤을 새워서라도 어떻게든 해냈다. E는 동기들보다도 훨씬 빨리 능력을 인정받은 게 자랑스러웠다. S도 E의 승진 소식에 함께 기뻐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E가 올라가는 만큼 자신은 추락하는 것 같았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사회일수록 E가 자신에게 의지했으면 했다. 쾌활하게 웃고 떠들다가도 돌아서면 슬프고 괴로운 시간이 다가올 것을 깨달았다. 열등감이었다. S는 E와 격차가 벌어지는 게 극도로 싫어서 자신이 올라가든, 불가피하다면 E가 내려가기를 남몰래 바랐다. 그래야 아무 시스러움도 불안정함도 없는 자연스러운 위치라고 생각했다. 

회사는 치열한 인정 투쟁을 벌인 E의 능력은 인정했지만, E 자체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회사는 중요한 외부 미팅이 있을 때마다 E에게 E보다 높은 직급의 남성 직원과 함께 가도록 권유했다. 

"왜 Q씨랑 같이 가야 한다는 거예요?"
"회사 방침이에요."
"저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요. 저번에도 계약 유리하게 가져왔잖아요. Q씨는 오히려 방해만 돼요. 계속 제 말을 자르기만 한단 말이에요."
"어쩔 수 없어요. 임원들을 설득해서 방침을 바꾸든, Q씨랑 같이 가든 선택하세요. 회사에 불이익이 생기면 E씨가 책임질 것도 아니잖아요."

E는 Q씨와 함께 미팅에 갔다.
덧붙이는 글 https://brunch.co.kr/@goodwriting/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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