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송길 산책

검토 완료

조기철(akshdtoa)등록 2019.05.02 12:24
 밤늦은 시간 문자 메시지!
 늘 오는 문자이기에 무심코 시간을 두고 열어 보았다. 형님이 장송길 산책을 갔다는 메시지였다. 무슨 말인지 잠시 생각을 가다듬으니, 행여나 갑작스럽게 문자 메시지를 받고 쇼크를 당하지 않나 하는 미연의 걱정에 미화법을 쓴 것으로 판단했다. 아직도 이승에서 상상의 꿈을 꾸면서 잠의 산책을 즐기고 있는 어른은 충격을 받을 수 있기에 무거운 말을 다소 부드럽게 표현하는 완곡어법이 때로는 필요한 것 같았다. 어린 시절에 젊은 삼촌이 갑자기 돌아가시자, 충격으로 이웃 친척이 쓰러져 장송길 줄산책이 일어났던 것을 경험한 터라, 메시지 한 글자에도 생각이 서려 있었다.

형님은 고요한 밤에 심장 마비를 만났다. 그래서 누구도 만나 같이 갈 수 없는 혼자만의 머나먼 나그네 산책길이 되어 버렸다. 인간의 삶이 비록 외로이 왔다가 외롭게 가는 길이라고는 하나, 같은 연배들이 떠날 때쯤 같이 가면 동무가 있어 산책길이 훨씬 수월할 텐 데. 아직도 이승에서 여러 친구들을 남긴 채, 다 즐기지 못한 여정도 남긴 채 푸른 하늘, 푸른 들을 지나 공기처럼 스쳐 지나갔다. 장송길은 누구나 한 번은 걸어야 할 운명의 영역이다. 파란 많은 사람도, 화려한 꽃길을 걷던 사람도, 명예와 권력을 한 손에 쥔 사람도 여울져 흐르는 물결처럼 세월의 길을 비켜갈 수는 없는 것이다.

 아직도 만나서 막걸리 마시며 봄의 정취를 맛볼 나이건만 여러 동생을 남긴 채 혼자만의 길을 떠난 형님의 길을 배웅하고자 학교에 처음으로 연가를 냈다. 교직 생활 마지막까지 장송길 산책 연가는 써 보지 않았지만, 4월의 마지막에 처음으로 학교로 출근하지 않고 장송길 산책 배웅을 나갔다. 가는 이의 배웅을 위해 모인 친인척의 모습은 하나같이 검은 넥타이에 검은 옷으로 단장했다.

그리고 화려하지는 않아도 깨끗하고 밝고 그러면서 살아서 웃고 있는 모습에 잘 어울리는 국화꽃 옷을 입고 있는 분은 형님이었다. 말은 없어도 웃음으로 답하고, 인친척 모두 모여 먹는 모습 즐거이 지켜 보면서도 향기를 피워 또 다른 방문객까지 맞이하는 다정한 모습도 펼쳐 보이셨다. 생전에 화려한 꽃송이 듬뿍 받아 보지 못했던 한을 오늘에서야 마음껏 받아 안고 있었다. 앉아 있는 모습이 남아 있는 이들에게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져 주는 것 같기도 하고, 가는 이의 뒷모습이 어떻게 정리되어야 하는 지도 이심전심으로 연상시켜 주는 것 같았다.

국화꽃과 검정옷을 입은 것은 "개화기 이후 서구 기독교 문화가 들어와 복식 간소화를 비롯해 실용적인 장례문화가 시작되면서 전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흰색 상복과 삼베옷을 입는 한국 전통 장례문화에 어울리는 흰 꽃은 국화밖에 없어 조화로 사용하게 됐다"고 혹자는 설명하고 있다. 또 장송길에 국화 사용은 1979년 충북 청원군 두루봉에서 구석기 동굴인 홍수굴에서 다섯 살배기 어린 아이 유골도 함께 출토됐는데 유골 위에 고운 흙이 뿌려져 있었고 그 흙 속에서 국화꽃 가루가 나왔다고 한다. 이처럼 국화는 죽음과 장엄함을 상징하는 꽃인 것이다.

 시골에 자동차가 마음대로 들어오지 못했던 시절, 나이든 할아버지 장송길 산책을 가시면 온 동네 사람들 대문에 나와 건너편 산으로 올라가는 상여 구경에 눈물 흘리는 때도 있었다. 동네 아이들 깃발 들고 상여 뒤를 따라 가던 추억의 길도 있었다. 또한 장송길 산책을 갈 시간이 되면 건너편 산야에서 조석으로 까마귀 울어대며 마을 사람들에게 장송길 준비를 알려 주던 민간 설화도 있었다. 그러던 시절이 이젠 노년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장송골 소풍 여행이 언제쯤인지 알 수 없는 사이에 찾아와 때로는 봄의 경치도 맛보지 못하고, 어떤 때는 가을의 풍성한 과일맛도 느끼지 못한 채 서둘러 장송길 떠남에 봄이 주는 자연의 푸르름을 눈으로만 감상할 대상만은 아닌 것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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