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에서 수배자로, '인민노련' 창설

[진보의 아이콘 노회찬평전 11회] 인민노련은 과학적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을 천명하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등록 2019.05.25 18:59수정 2019.05.25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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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5.3민주항쟁 자료 사진 ⓒ 인천 남구청

노회찬이 월급을 받아보기는 국회의원에 당선되기 전까지는 이때 3년 동안이 전부였다.

감옥에 가고 노동운동을 하는 기간에는 '동가식 서가숙' 하느라 월급 없는 삶을 살았다. 인천에서 노동자 시절이 비교적 안정된 생활이었던 셈이다.

그나마 인천의 '안전한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노동 현장에서 겪은 각종 모순과 비리,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인권유린은 남달리 정의감이 강한 그를 '월급쟁이'로 묶어두지 않았다. 

노동 현장에서 활동하는 '위장취업자'들과 수시로 만나 연대를 준비하고, 여러 차례 사측의 부당노동행위에 항거하는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때마다 사측의 신고로 시위대보다 많은 경찰이 달려오고, 그는 주모자로 찍혀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었다. 더 이상 공장에 다닐 수 없었다. 노회찬은 다시 생각한다. 기층노동자들이 일한 만큼 임금을 받고 헌법에 보장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인간다운 삶을 살게되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해서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하기로 작심한다.

이후 힘겨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경찰은 블랙리스트에 들어 있는 수배자를 검거하면 많은 상금과 특진이 보장 되어서 혈안이 되어 뒤를 쫓았다. 마치 일제강점기 왜경과 밀정들의 행태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광주 학살을 자행하면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의 폭압통치는 1985년 2월 12일 실시한 제12대 총선을 계기로 점차 민주세력에 의해 밀리기 시작했다. 야당ㆍ학생ㆍ노동자ㆍ민주인사들의 저항은 날이 갈수록 강화되고 각급 민간단체가 연대하면서 정권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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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5월 3일, 옛 인천시민회관 사거리에 몰려든 시위 인파.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야당 정치인과 사회민주화를 외쳤던 다양한 세력이 이날 시위에 참여했다. 이 시위는 ‘5.3사태’로 불리고 있다.<사진제공ㆍ30주년 인천 5.3민주항쟁 계승대회 조직위원회> ⓒ 한만송

1987년 5월 3일 인천에서 5ㆍ3항쟁이 발발했다.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의 경기ㆍ인천지부 결성대회를 계기로 재야인사ㆍ노동자ㆍ학생ㆍ시민 등 4천여 명이 모여 반정부 집회를 열었다. 노회찬은 수배자가 된 동지들과 이 집회에 참가하여 전두환 정부의 폭압통치를 비판했다.

5ㆍ3인천항쟁은 전두환 정부와 족벌신문, 심지어 이민우 신민당 총재까지 나서 "좌익학생들을 단호히 다스려야 한다."는 발언을 하는 등 이념의 색칠을 했다. 정부는 인천항쟁을 좌경세력의 준동으로 몰아가면서 국면전환을 시도하고, 이런 와중에 부천서 성고문사건이 일어났다.

노회찬에 대한 경찰의 추적이 더욱 강화되었다.

쫓는 자들도 극렬했지만, 피신자도 못지않았다. 쫓기면서도 위장 취업, 막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고 몸을 숨겼다. 다행히 고등학교 친구 중에 뜻있는 사람들이 조금씩 돈을 모아 전해 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들은 노회찬뿐만 아니라 동기생 중에 감옥에 간 친구들도 이런 방식으로 도왔다고 한다.

마침내 1987년 6월항쟁이 일어나고 노태우의 6ㆍ29선언이 발표되었다. 신군부의 항복선언이었다. 6월 26일 노회찬과 인천ㆍ부천ㆍ주안 등 경인지역에서 활동하던 동지들은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을 결성했다.
 

1985년 4월 22일. 사측과 임금형상중인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이 집회를 열고 있다. 당시 교섭대표 중 한 사람이 홍영표 국회의원이다. <사진·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김영숙

 
노회찬ㆍ주대환ㆍ최봉근이 지도부가 되고 노회찬은 조직담당 중앙위원과 기관지로 신문 『사회주의자』의 편집위원을 맡았다. 인민노련은 과학적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의 결합을 천명하고, 신문 말고도 『노동자의 길』, 『정세와 실천』 등을 발간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나섰다.

"지도부는 노회찬, 주대환, 초봉근으로 구성되었는데 모두 민중민주주의적 성향(이른바 '피디 PD')이 강한 인물들이었다. 그래서인지 결성 직후 주체사상파를 포함한 민족해방 진영(이른바 '엔엘 NL')이 일방적으로 이탈하면서 인민노련의 성향은 더욱 선명해졌다.

인민노련은 당시 유행처럼 번지고 있던 주체사상파와 제헌의회파를 양 극단의 교조주의로 비판하며 실사구시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양쪽으로부터 사민주의니 개량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그 현실주의적인 노선은 인천뿐 아니라 전국의 활동가들로부터 상당한 지지를 확보해 나갔다.

탁월한 논객인 주대환, 최봉근, 황광우 등이 집필한 기관지의 영향도 컸다. 단시간 내에 정회원만 600명을 넘어서서 당시 전국에서 제일 큰 지하조직이라고 할 만했다."(주석 3)


한국 사회는 해방 74주년이 되는 지금까지도 사회주의라면 공산주의의 4촌 정도로 백안시하는 경향이 있다.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들도 별로 다르지 않다. 과학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가 진행되면서 모순의 노정과 더불어 나타난 노동자 계급의 전락과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고자 나타난 이데올로기체계이다. 명칭과는 상관없이 민주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이념에 가깝다고 하겠다.

노회찬은 31살 때 인민노련을 결성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를 택한 이래 일관되게 '한국형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다. 당시 그가 과학적 사회주의 이념에 대해 얼마만큼 이해를 가졌는지는 헤아리기 어렵지만, PD계열과 주체사상파와는 확연히 다른 길을 모색한 것은 분명하다.


주석
3> 안재성, 앞의 글.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인물열전] '진보의 아이콘' 노회찬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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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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